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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Luciano Pavarotti (1935.10.12~1997.9.6)

정소진 |2007.09.06 21:43
조회 65 |추천 1
  


세계적인 테너 가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파바로티는 어릴적 음악보다는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1935년 10월 13일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아마추어 가수이자 제빵사의 아들로 테어난 파바로티는 생전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항상 행복했다. 우리 가족은 형편이 어려웠지만,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해내리라고 믿었다"고 말해왔다.

어린시절 파바로티는 공부보다는 축구에 더 재능을 보이기도 했지만, 가수인 아버지가 소장한 베냐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유시 비욜링, 주세페 디 스테파노 같은 유명 테너들이 음반도 항상 즐겨 들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도 이어갔다.

파바로티가 어릴적 함께 노래를 공부한 친구이자 현재 유명 소프라노가 된 마렐라 프레니와 함께 음반을 내고 콘서트 무대에 선 일은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십대에 접어들어 파바로티는 아버지와 함께 교회 성가대와 지역 오페라 코러스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당시 미국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던 가수 마리오 란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십대 시절 마리오 라찬의 영화를 즐겨 봤다. 그의 영화를 본 날이면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면 란차를 흉내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노래는 그에게 취미 이상이 아니었다.그러나 20살이 되던 해, 코러스와 함께 팀을 결성해 월레스에서 열린 국제 음악 대회에 나간 파바로티는 일등을 거머쥐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계에 발을 들어놨다. 그이 약혼자였던 아두아 베로니의 격려로 정식 교습을 받기 시작했으며 교습비를 돈으로 지불하기에 형편이 어려워 보험으로 교습비를 대신하기도 했다.

올해 71세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스페인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칭송받으며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클래식 음악가로서 오페라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파바로티는 1961년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의 아킬레 피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공식 데뷔했다.

그만의 환한 미소와 육즁하게 움직이는 모습, 아리아, 손수건을 들고 노래를 부르는 취향 등은 '파바로티스러룸'으로 각인됐으며 그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페라로 명성을 얻은 후 파바로티는 1982년 제작된 영와 '죠르지오의 사랑', '리골레토'의 영화 버전에도 출연했으며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는 자서전 '나,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저술했으며 텔레비전 광고에도 등장했다.

이외에도 1992년~95년까지 보스니아전이 계속되자 U2의 리드 싱어인 보노와 함께 의료원조를 실시했으며 전쟁이 끝난헤에는 모금을 통해 보스니아계 예술인들을 위한 파바로티 음악 센터를 설립해 음악적 후원에 앞장섰다. 또한 1988년 미국에서 있는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콘서트를 열며 자선사업에도 앞장섰다.그러나 그는 화려한 삶만큼이나 구설수도 항상 끊이지 않았다.

모데나에서의 콘서트에서 립싱크를 한 것이 드러나 비난을 받았고, 한 여류 예술가에게서는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탈세 혐의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바로티는 항상 자신의 죄를 부정했고 "나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고 괴로운 삼정을 밝혔다.

196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공연한 '라보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서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와 부른 '라보엠'과 오페라 '투란도트'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 하면 파바로티를 떠올릴 정도로 두 오페라는 그이 베스트 넘버다. 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런던 코벤트 가든,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등 세계 주요 오페라좌에서 공연해 온 그는 1990년대 이후에는 로마월드컵 전야제 때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칼레라스와 함께 3테너 콘서트를 연 것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대규모 관중들을 동원하는 야외공연을 열어 왔다.

1982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땅 국제콩쿠르를 창설하고, 매년 그의 고향인 모데나에서 세계 난민을 위한 '파바로티와 친구들' 이라는 자선음악회를 열면서 가수 이외에도 국제적 명사로서 활발히 활동해 왔다.

우리나라에도 수차례 내한한 바 있는 파바로티는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독장회를 시작으로 1993,2001년도에도 공연을 가졌으면 특히 특별기회 '빅3 테너 초정 콘서들'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그러나 보통 성악가들이 4,50세가 되면 은퇴하는 것과는 달리 70세가 넘어서도 활동하며 영원히 활동할 것처럼 보였던 파바로티도 나이와 건강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2000년 말 미국 애틀랜틱시티에서 있는 트럼프 타지마할 카지노 공연에서 감기로 수준 이하의 공연을 해 공연료 환불 사태가 벌어졌으면, 200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공연에서는 몸을 가누지 못해 동료들이 부축을 받으며 공연을 하는가 하면 고음 부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해 청중들을 실망시키며 구설수에 오르다 결국 2005년 건강상의 문제가 불거졌다.

이후 2006년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전야제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것이 현재까지는 마지막 무대였다.

한편 1961년 아두아베로니와 결혼한 파바로티는 2000년 이혼, 2003년12월 자신개인비서였던 35세 연하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재혼했으며 현재 아두아 베로니와의 사이에 딸 셋과 만토바니 사이의 앨리스라는 딸이 있다.말년인 7월 파바로티는 뉴욕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송별 공연을 준비 중 췌장암을 앓고 잇따는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콘서트를 취소한 채 뉴욕에서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 중병을 앓고 있음을 안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게델라세라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행운을 타고난 행복한 사람이다. 이제 그 행운과 행복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병에 대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이후 파바로티는 소수의 학생들을 교습하면서 종교 음악을 녹음했는데 이 앨범을 2008년 발매될 예정이었다.

파바로티는 건강 악화 후 모든 활동을 접고 페자로 아드리아해에 인접한 고향 모데나에서 시간을 보내며 수술과 치료등을 병행하며 요양중이었다. 지난 달 고열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최근 그이 두번째 아내 만토바니는 이탈리아 신문 스탐파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마치 사지와 같이 싸우고 있다. 그는 절대 지지 않을 것" 이라고 말하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바 있으나 파바로티는 결국 6일 타계했다. 그가 타계하는 자리에는 아내 만토바니와 여동생 가브리엘라를 비롯해 첫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세 명의 딸 로렌자, 크리스티나, 기우리아나, 두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앨리스, 그의 사촌들과 가까운 친지들, 친구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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