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학과를 다녔던 하진은 취직이 가장 잘된다는 회사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하진도 이젠 일을 시작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반건성으로 쓴 이력서를 제출했다. 며칠 뒤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으로 이력서 접수가 되었으니 몇날 몇시에 면접을 보러오라는 메시지가 뜬다. 이력서를 썼던 마음과는 달리 너무 쉽게 연락이 왔고, 그냥 물어보는 것에만 대답햇을 뿐인데 마음에 들었던지 바로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다. 이렇게 빠른 시간안에 일이 순차적으로 풀리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하진은 언니에게 사실을 알린다. 언니와 새어머니는 그것보라는 눈빛으로 진작에 알아보고 취직해볼것이지 하는 말을 내뱉는다. 평소 경직되는 옷을 좋아하지 않는 하진은 마땅히 첫 출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입사원표 옷이 없어 언니의 옷을 빌려 입고 나간다. 잠이 많지 않던 하진은 아침에 일어나는것이 무리가 되지 않았다. 일찍이 회사로 나가보니 다른 신입사원들도 긴장을 했는지 일찍부터 나와있었다. 이번에 뽑히게 된 신입사원중 같은 부서로 배정받은 인원끼리 부서로가 소개를 하고 소개를 받았다. 하진이 배정받은 책상에 앉았을때였다.
"자자, 햇병아리 여러분들 이쪽 주목해주시구요, 여기는 우리 부서를 돌봐주시고 계시는 실장님. 인사들 해요."
하진은 앉다말고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식당에서의 그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신입사원 한사람 한사람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진의 손을 잡으며 악수를 하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하더니 다시 씽긋 웃어보이며 채하진씨, 잘부탁합니다 하고 말한다. 유난히 친한척하는것 아닌가 싶어 하진이 옆을 돌아보니 다들 명찰엔 이름이 써있었고 이미 다른 신입사원들에게도 그런식으로 인사를 한 모양이다. 실장님이라는 그 남자와의 악수가 끝나고 신입사원들은 다 자리에 앉았다. 이제 여기서 무엇부터 시작하면 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중에 실장님이라고 불리던 그 남자를 소개했던 이가 다가와 실장님께서 부르니 가보라고 한다. 하진은 그저 그때 그 5000원때문에 부르는거겠거니 하고 실장실로 들어갔다. 실장이라는 그 남자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저 부르셨다고..."
"아, 채하진씨. 이리와서 앉아요."
책상옆에는 의자가 하나 있었다. 하진이 의자에 앉자 남자는 자신의 의자를 끌고와 하진의 맞은편에서 멈춘다. 하진이 가만히 실장실 내부와 책상을 구경하고 있자 남자가 입을 연다.
"저, 기억하시죠?"
"........"
"저번에 식당에서 5000원 빌렸던."
"네. 기억해요."
남자는 환하게 웃어보이더니 말을 이어간다.
"나중에 왜 연락안하셨어요. 돈 갚으려고 5000원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정말 5000원갚을 생각으로 5000원짜리를 챙겨 갖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하진은 가만히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때 제가 이자까지 쳐서 갚겠다고 했죠?"
남자는 5000원짜리를 지갑에서 꺼내어 하진에게 준다.
"이자는 오늘 저녁어때요? 퇴근하기전에 제 방으로 오세요. 맛있는거 사드릴게요."
하진은 고개한번 끄덕이고는 알겠다는 표현을 하고 실장실에서 나왔다. 문이 닫기는 그 틈으로 남자가 외친다.
"제 이름은 서강현입니다!"
남자에게서 받은 명함에서 이미 그의 이름을 봐서 알고 있기때문에 뒤에서 들려온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는다. 하진이 자리로 돌아와 앉자 주위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신입사원뭐야? 출근첫날부터 실장실엔 왜 드나든데?"
"그러게 말이야. 누가 아니래? 실장님이 총각인거 알고 저 여우년이 꼬리치는거 아냐?"
"그렇겠지. 뻔하지 뭐.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 무슨 눈치가 있겠어. 얌전하게 생겨서는. 안그래?"
"맞아. 근데 실장니미 먼저 부르셨다나봐."
"어머어머, 왜? 실장님은 우리 모두의 연인이라는거 몰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여자 사원들끼리의 그런 이야기가 오고가고 하진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녀들이 하진의 눈에 비치기에는 최신 트렌드라는 트렌드 아이템은 온 몸에 걸치고 이름 값하는 명품들만이 자신이 패션리더라는 것을 보여주는것처럼 느끼는 그런여자들이다. 그런여자들의 입에서 질투어린 시기가 가득찬 말들이 나오는건 신경쓰일 말들이 아니다. 하진은 어렸을때부터 겉모습만을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회장님소리를 듣는 아버지, 대기업에 외국어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언니. 엄마만이 그녀에겐 유일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집으로 초대되어 오는 손님들 모두 하나같이 아버지에겐 입에 발린 칭찬들과 좋은 말들만 해주었다. 사랑하나로 극복하기 힘든 어머니의 출신은 그들에게 뒷담화하기에 딱 좋은 얘깃 거리였다. 언니는 그런말 들리는게 싫으면 열심이 공부해서 좋은대학가서 좋은 직장을 다니라고 했다. 아버지 힘 안빌리고 저희들끼리 성공하고 나면 그들도 어머니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할것이라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큰 회사의 회장이라는 직분에 있어도 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취직하고 회사를 다니고 있다. 어머니는 늘 하진에게 따듯한 마음을 가질수 있도록 노력해주었다. 그치만 너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준 새어머니는 하진의 눈엔 그저 초대되어 집에 오셨던 그 손님들과 별다를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하진은 자신이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람들에게 평가되는 모습도 싫었고 평범한 집안의 여자라는 이유로 뒷담화에 오르락 내리락했던 어머니도 불쌍했다. 의상학과를 다니면서 졸업하면서 하진만큼 꾸미고 다니지 않았던 학생은 없었다. 그치만 하진의 직업적면에서의 감각은 겉모습만 트렌디하게 꾸미고 다니던 이들도 인정했다. 디자이너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저 여자들도 하진의 눈에는 그저 남들보기에 멋져보이는 이들로밖엔 안보인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하진은 귀찮아졌는지 강현과의 약속은 없던일처럼 그냥 집에 가고 싶어졌다. 잠시 엎드려 있다보니 어느새 잠이 들었나보다. 강현이 어깨를 톡톡치는 것에 눈을 떴다. 일어나 두리번거리니 사무실엔 강현과 하진 둘뿐이었다.
"언제부터 잔거에요?"
눈엣가시가 되어버린 하진을 깨우지 않고 다들 그냥 퇴근해 버린모양이다. 하진은 대답하지 않고 백과 코트를 챙긴다. 하진은 앞장 서는 강현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강현은 환히 웃으며 하진에게 조수석문을 열어준다. 강현이 잘 안다는 식당으로 가는 사이에 강현의 말은 많았지만 하진은 대답만 할뿐 길게 말하지 않았다. 강현이 잘 안다고 하진을 데려간 식당은 부대찌게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었다. 강현은 계속해서 이런저런 말을 걸어왔지만 하진은 역시 대답만 할뿐 그 대답도 말로 하지않고 고갯짓으로 하는게 전부였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국물만 떠먹고 있던 하진이 고개를 들고 강현을 쳐다본다.
"아니, 원래 그렇게 말이 없는거에요, 아님 제가 싫어서 그러는거에요?"
"원래 말수가 적어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인다.
"그럼 내가 싫다는건 아니군요."
하진은 그말에 내가 그렇게 말이 없었나 하고 생각한다. 생각을 해보니 어떤사람을 만나건 꼭 듣는 소리 중 하나였다. 얌전해 보인다, 차가워보인다, 말이없다. 곰곰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데 강현이 하진을 부른다. 하진은 고개를 들어 강현을 본다.
"국물만 떠먹지말고 여기 햄도 있고 김치도 있잖아요. 이것저것 건더기좀 많이 드세요."
"네."
"혹시 부대찌게 안좋아해요? 메뉴를 잘못골랐나."
하진은 웃어보이며 맛있다고 한다.
"하진씨 웃을줄도 아네요. 벙어리에 안면근육마비 장애있는줄 알았어요."
"말수가 적긴하지만 잘 웃는 편이에요."
강현은 이제야 혼자밥먹고 있는것 같지 않다며 웃었다. 이것저것 푹푹 퍼먹던 강현은 하진의 나이를 묻는다.
"저한테 관심있으세요? 왜 이렇게 묻는게 많아요?"
"아니요, 전 그냥 편하게 지낼까해서 통성명했으니 나이도 서로 밝히면 편해지잖아요. 앞으로 회사에서 쭉 볼 얼굴인데."
"전 78년생 올해 27되요."
"엇, 저둔데! 그럼 우리 동갑이네요! 우리 나이도 같은데 친구먹는게 어때요? 음 회사는 어쩌다보니 부하와 상사사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사적으로는 친하게 반말도 하면서 친구먹읍시다."
"나야 손해볼것 없지. 그래."
"그래, 채하진이라고 했지? 난 아까 이름을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번더. 서 강 현 이라고한다."
강현은 하진의 머리에 조각이라도 새겨넣을모양으로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이름을 재차말했다. 하진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식사가 끝나고 강현은 하진의 집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간단히 인사하고 하진이 집으로 들어오자 언니 하민은 이미 퇴근을 했고 다정해 보이는 세가족은 TV를 보며 과일을 먹고 있었다. 어떤 프로그램을 보는지 모드들 깔깔대며 웃어대고 있고 하진이 들어온것도 모르는지 현관쪽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하진은 왠지 모를 소외감에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려고 기침을 했다. 시끄러운 TV소리를 뚫고 하진의 헛기침소리가 들렸는지 새 어머니가 현관쪽으로 돌아본다. 하진의 딴엔 작게 냈다 싶었는데 꽤 크게 내었나 보다. 어쩌면 도우미 아주머니가 대문을 열어주었을때부터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진이 왔니? 첫 출근은 어땠니."
"괜찮았어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요."
TV모니터만 보고있던 언니도 하진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만 아버지만은 계속해서 TV만 응시하고 있다. 하진은 시선들을 뒤로 하고 2층 방으로 올라간다.
"재수도 너 스스로 결정하고 취직도 마음대로 하더니 첫 출근도 이 애비에겐 말을 안했더구나. 너희 어머니가 말 안해주었으면 깜빡 모르고 그냥 넘어 갈뻔했구나. 이젠 또 무얼 니 마음대로 해버리고 나는 다른사람한테 소식을 듣게 만들거니. 독립도 가출처럼 그렇게 할 생각이냐?"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는 TV소리에 묻혀 작게 들리긴 했지만 하나하나 또박히 박힌다. 섬섬하셨을 것이다. 하진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수능시험을 보고 온 하진은 결과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진학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때는 그저 생각없는 나이라 그러하였을 거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다음해에 다시본 수능시험후 갑작스레 의상학과로 진학을 하겠다는 하진은 가족을 놀라게 만들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고작 의상학과를 목표로 그 좋은 점수를 포기하고 재수한것이냐 반대를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모아둔 돈으로 대학입학금을 내버린 하진을 더이상 말릴순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다 아버지가 원하는 곳으로 알아서 가주었다. 늘 모의고사점수도 전국에서 순위권 안에 들었기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흡족하게 해주는 딸이었다. 하진이 이렇게 일을 제 멋대로 하는거에 대해 처음엔 뒤늦은 사춘기가 와 반항심에 하는것이다 했지만 대학까지 자신이 결정을 내리고 통보를 해주니 아버지로서는 배신감이 드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말없고 무뚝뚝하지만 막내딸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하진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맘껏 표현하셨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하진과의 대화가 줄어들고 하진에게 무관심해지던게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그리고 하진은 그때부터 더 말수가 적어지고 무뚝뚝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