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안정환’ 이름 석자를 외치는 팬들의 뜨거운 함성이 운동장을 가득 메운다.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등에 업으며 안정환은 가볍게 트랙을 뛰어올라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답례한다. 늠름한 갈색 야생마의 갈기처럼 그의 긴 머리칼은 가을 햇살의 애무를 받으며 더욱 눈부시게 반짝이고 178cm 72kg의 균형있게 잘빠진 몸매는 유니폼 아래서 더욱 탄력적으로 드러난다. 관중을 몰고 다니는 그라운드의 스타답게 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본능적으로 본부석 앞쪽에 눈길을 돌린다.
열살 연상의 남자와 사랑의 도피
그곳에는 그의 사랑의 모체이며 정신적 지주인 그리운 어머니가 아들의 한동작 한동작을 놓칠세라 눈길을 고정한 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기도가 좋았다. 아들아, 너는 오늘 잘 싸울 거다. 엄마는 틀림없이 믿는다’.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저는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이심전심의 미소 속에 모자 사이에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세련된 눈매, 매끈하게 내리뻗은 콧날, 감출 듯 말 듯 수줍은 열정이 묻어나는 입술.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외모와 빼어난 기량으로 인해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자리잡은 안정환 선수 어머니의 이름은 안혜령(법명, 49). 이쯤되면 눈치 빠른 사람들은 남다른 사연이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렇다. 모자는 성이 같다. 안정환 선수는 아버지의 성이 아닌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고 있다.
안혜령씨는 그 이유를 ‘사랑 때문에’라고 짧게 대답한다. 사랑? 독일의 유명한 작가 헤르만 헤세는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인내에서 얼마나 강한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있다’고 일찍이 사랑의 속성을 간파한 적이 있다. 이 말은 바로 안혜령씨의 일생을 꿰뚫은 말이기도 하다.
친구 소개로 만난 10살 연상의 남자. 바람을 머금은 듯 우수를 간직했으면서 가슴이 따뜻했던 그 남자는 모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스물넷 꽃다운 처녀는 그 남자와의 첫만남에서 운명을 읽었고 곧장 사랑에 빠졌다. 안혜령씨 집안에서는 당연히 그 남자를 반대했다. 1백평 넘는 큰 집에서 살 만큼 부잣집 6남매의 막내딸로 귀여움을 흠뻑 받으며 자란 안혜령씨는 당시 집안의 꽃이었다. 얼마든지 좋은 남자 골라 결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녀의 친정에서는 나이 차도 많고 가진 것이라곤 육체뿐인 남자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막으면 거세게 흐르는데 하물며 사랑의 일에서랴. 말리면 말릴수록 사랑은 더욱 거세게 타올라 안혜령씨는 마침내 하숙하고 있던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채 둘이 꼭꼭 숨어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곧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아이가 아장아장 한창 예쁘게 걸을 나이인 14개월 무렵, 아이의 아버지는 어이없게도 여자와 아이를 남겨두고 혼자만의 먼 여행을 떠났다. 허망하게도 그녀의 러브 스토리는 2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끝맺은 것이다.
“신혼 때 기침을 심하게 했어요. 감긴 줄 알았지요. 꽤 오래가나 했는데 정환이가 돌 될 무렵 쓰러졌어요. 병원에 갔는데 폐암이래요. 진단받고 3개월 남짓 살았나 봐요. 그이는 정환이에게서 ‘아빠’ 소리도 못 듣고 그렇게 훌쩍 갔지요. 그때까지 호적에는 이름도 못 올리고 있어서 저는 미혼모 아닌 미혼모가 되었지요.”
운명의 수레바퀴 앞에서 그녀는 친정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노발대발할 줄 알았던 그녀의 친정에서는 의외로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 잃은 외손자를 한시도 무릎에서 떼지 않고 끔찍이도 귀여워했다. 그녀와 정환이는 그렇게 아픔을 딛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애가 있지만 안혜령씨는 호적상 처녀였다. 큰오빠와 올케 생각에는 여자 혼자 살기에 스물다섯은 너무도 젊었다. 이곳저곳에서 중매가 들어오자 “애는 우리가 맡아 훌륭히 키워줄 테니 결혼을 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실연도 큰일인 나이에 사별이라는 일을 겪고 나니 정신적으로 허해서 그랬는지 몸이 자꾸 아프고 헛깨비같은 것이 눈에 아른거렸어요. 병원에 가도 뚜렷한 병명도 안 나오고…. 기운을 못 차리고 시름시름 야위어만 가니 어머니가 무당집도 여러 곳 찾아 다니셨어요. 어떤 집에서는 신내림받아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그럴 수는 없다고 해서 저 때문에 굿도 여러번 벌였어요.”
그러다 그녀는 흑석동에 있는 감로사라는 절을 찾게 되었고 그곳의 주지스님을 만나며 안정을 찾았다. 스님은 그녀를 보고 “미안한 말이지만 사주팔자에 남편이 없다. 다시 어떠한 남자를 만나도 백년해로 하기는 힘드니 아들 하나 잘 키우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면서 안혜령, 지금 사용하는 이름 석자를 지어주었다. 본명은 남편, 자식 아무도 없이 혼자 살아야 하는 이름이라며. 그 이후로 그녀는 기억 속에서조차 자신의 본명을 잊어버렸다.
“백원으로 아빠 사올 테야”
과거를 가슴에 묻고 아들의 재롱 속에서 아기자기한 삶의 재미를 조금씩 찾아갈 무렵 그녀는 아빠의 존재를 묻는 정환이의 질문 때문에 다시금 가슴이 미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다섯살 철부지 꼬마는 옆집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물놀이 가기 위해 튜브와 수영복을 사들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집에 돌아와 그녀에게 “엄마, 나 백원만 주세요”했다. “백원은 왜? 무엇하게?” 했더니 정환이는 “시장가서 백원 주고 아빠를 사올 테야” 했다.
그녀는 코끝이 찡해지며 눈 밑으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안되겠다. 아이에게 아빠의 일을 알려야지 싶었다. 하지만 우는 엄마를 올려다보며 어느새 자신의 눈에도 그렁그렁 눈물을 담고 있는 정환이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그녀는 차마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정환아, 아빠는 돈을 주고 살 수가 없어. 정환이 아빠는 미국에 계시는데 조금만 있으면 오실 거야. 아빠가 오실 때까지 아무리 아빠가 보고 싶어도 정환이는 참아야 돼.”
어른같았으면 뻔한 거짓말이라고 일축했겠지만 순진한 정환이는 엄마 말을 믿었다. “아빠 대신 엄마랑 물놀이 갈까?” 그 말에 활짝 얼굴이 펴지는 정환이를 보며 그녀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사업을 하던 친정아버지 덕택에 정환이가 6살 될 때까지 물질적인 어려움을 몰랐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신은 그녀에게 편암함보다는 고통에 견디는 인내력을 더 시험하고자 했다. 친정아버지는 건축업이 부도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해 돌아가셨고 그녀는 큰오빠 가족들과도 헤어져 친정어머니와 흑석동에 단칸방을 얻어야 했다. 이제는 그녀가 생활전선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친정아버지의 유산을 정리하니 약간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친정어머니와 함께 중앙대학교 앞에 권리금 6백만원, 보증금 1백80만원을 주고 커피숍을 차렸다. 하지만 커피숍은 6개월 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건물이 도시계획에 걸려 권리금은 떼이고 보증금만 겨우 건져 나왔다. 불과 6개월 사이에 6백만원이라는 거금을 날렸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다가 뜨거운 맛을 본 셈이었다. 어수룩하게 살면 안된다는 차가운 현실을 뼈에 새겼다. 하지만 이때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축구선수로 키울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커피숍을 할 때 정환이는 곧잘 유치원이 끝나면 중대부중 운동장에 가서 놀았어요. 친정어머니와 제가 가게 일에 매여 있으니 공 하나 들고 혼자 운동장에 가서 볼을 차며 놀았는데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과 친해져 함께 어울려 다녔어요. 신림중학교에서 코치하던 김태국씨가 ‘꼬마가 공을 제법 잘 찬다’며 효창운동장을 비롯해 지방 시합이 있을 때 정환이를 데리고 가기도 했어요.”
내성적이던 정환이는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을 아버지삼아 잘 따라다녔고 어떤 날은 유치원 가는 것도 마다하고 공에 너무 열중해있어 그녀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축구선수로 만들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충무로에 있는 영화배우학원으로 정환이를 데리고 갔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이목구비가 시원하고 서구적으로 잘생겨 주변사람으로부터 “그 녀석 커서 영화배우하면 잘 하겠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 축구보다는 영화배우가 낫겠다 싶었고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환이는 카메라만 보면 싫다고 도망가 도저히 카메라 테스트를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포기하고 정환이를 데리고 나왔다.
수중에 있는 돈이 자꾸 줄어들자 그녀는 미혼이라고 속이고 개인회사에 취직했다. 50만원 보증금에 월세 5만원짜리 방을 얻어 집도 노량진 본동으로 이사했다. 환경이 바뀌자 축구에 대한 정환이의 관심은 줄어들었다. 축구보다는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던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환이 스스로 선택한 축구의 길
그러나 일시적인 줄 알았던 정환이의 축구에 대한 관심은 노량진 본동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정환이를 키우며 딱 두 번 무섭게 매를 들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어났다.
당시 정환이의 담임 선생님은 특별히 정환이를 예뻐했다. 수업이 끝나고도 시간 내서 정환이가 모르는 것을 알기 쉽게 더 가르쳐 주었는데 정환이는 공부에는 관심 없고 운동장에 나가 축구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축구 코치와 담임선생님 간에 시비가 벌어지기도 했다. “얘는 공부를 해야 할 아이다. 축구는 안된다” “누가 뭐래도 본인이 하겠다고 우기는데 어떡하겠느냐”며.
정환이가 공부보다 축구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회초리를 들었다. 축구는 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순종적인 아이라 곧 “그러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자국으로 종아리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는데도 정환이는 끝내 “축구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자식 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을 그녀는 그때 실감할 수 있었다.
정환이의 축구에 대한 염원이 어떠했는지 그녀는 아들의 전학서류를 떼며 알게 되었다. ‘이왕 시킬 바에야는 확실히 하자’는 생각으로 축구부가 활성화되어 있는 대림초등학교에 가보니 이미 정환이의 전학 서류가 도착되어 있었다. 그만큼 정환이는 축구가 하고 싶어 대림초등학교를 들락거렸고 그곳의 코치 선생님은 싹수가 보이는 정환이를 탐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에 대한 설움은 대림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면서 가시화되었다. 정환이는 어렸을 때부터 머리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축구부원들은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다. 코치 선생님이 “임마, 머리 잘라”했더니 정환이는 “머리를 잘라야 한다면 축구 안할래요”했다. 아이가 고집을 피우니 코치 선생님은 “좋아, 그럼 그냥 둬” 했다.
“정환이만 머리를 길렀으니 축구부 엄마들의 시샘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또 제 자존심에 아빠 없는 아이라는 말을 안 듣기 위해 비록 형편은 넉넉지 않아도 정환이에게 좋은 옷, 신발을 사 입히고 신겼는데 그것도 못마땅해 보였나 봐요. 여기가 축구하는 데냐, 패션쇼하는 데냐, 쟤만 왜 튀냐 면서 말들이 무척 많았어요.”
어느날은 정환이가 엉엉 울면서 “아빠는 언제 미국에서 와?”하며 들어왔다. 이유인즉 축구부의 한 아이가 자기 엄마가 그러는데 “정환이는 아빠도 없고 환경도 안 좋은 아이니 함께 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냐, 울 아빠는 미국에 계셔” “거짓말이야” 하면서 아이들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정환이를 달래며 그녀는 남의 불행을 보고 위로는 못해줄망정 뒤에서 욕하는 축구부 엄마들의 미성숙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정환이에게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14개월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기는 힘들었다. “아빠는 미국에 안 계셔. 4학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야. 그래서 못 오신단다” 하고 거짓말을 섞어 말했다. 그 이후 정환이는 아빠에 대해 다시는 묻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로 굳어졌고 정환이가 유명해지면서 그의 아버지는 4학년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모자
축구를 시작하면서 정환이는 아침 6시면 잠에서 깨어 아침밥을 먹고 6시30분이면 학교로 갔다. 그녀는 그보다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들의 아침 식사준비와 매일 도시락 세개를 준비했다. 점심시간에 먹고 운동 끝나고 먹고 오후 어느 시간이든 또 배고프면 먹으라고. 그러면서 직장을 다녔다. 정환이는 남서울중학교에 입학했고 그녀는 직장생활이 힘들어 친정오빠의 도움으로 양재동에 레스토랑을 차렸다. 6개월 정도 되니 손님이 제법 들고 자리가 잡혀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뿐, 그녀는 신장염으로 쓰러져 일년여 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당연히 주인없는 레스토랑은 적자행진을 기록했고 빚만 떠안은 채 또한번의 실패를 맛봐야 했다. 훈련에 바쁜 정환이는 자주 병원을 찾을 수 없어서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하루에 한 번 아들과 통화하는 시간만이 그녀에겐 삶의 보람이었다.
언젠가 일본으로 원정경기를 갔던 정환이가 병실에 와서 수줍게 손을 내밀었다. 받아보니 약병이었다. 용돈을 모았다가 일본에서 제일 인기 좋다는 영양제를 어머니를 위해 사들고 온 것이었다. 이미 아버지만큼 훌쩍 키가 커진, 아버지를 쏙 빼닮은 아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목이 메어 울고 또 울었다.
그런 그녀가 두 번째로 정환이에게 회초리를 가하는 사건이 서울공고 2학년 때 일어났다. 전지훈련비만도 80여 만원, 거기에 매월 합숙비 12만원, 유니폼비, 식비까지 끝없이 돈이 들어가자 정환이는 어머니의 부담을 덜 생각으로 그녀 몰래 방학을 맞아 지하철 공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가 들통이 났다. “누가 너보고 돈 걱정 하랬니. 그러다가 근육이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내가 누구 하나 믿고 사는데…” 하면서 매질했지만 그녀의 가슴 한편에는 어느새 자라 엄마를 염려하게 된 아들에 대한 듬직함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대학교 입학 무렵 모자는 또 한 번의 진통을 겪었다. 그녀는 대학 진학을 권했지만 정환이는 ‘더 이상 고생하는 어머니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실업팀에 가겠다고 우겼다. 그때 아주대학 김희태 감독의 결정적인 한 마디가 쇠심줄같이 강경했던 정환이의 마음을 돌려 놓았다.
“돈은 언제든지 벌 수 있다. 실업팀에 가서 돈을 벌어 월급 타서 어머니를 돕겠다는 마음은 가상하지만 그것만이 효는 아니다. 더 실력을 쌓아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유학을 가고 지도자가 되어 더 크게 발전하는 것이 돈 몇푼보다 어머니를 더 기쁘게 해드리는 진정한 효다. 더 큰 안목으로 세상을 봐라.”
마음을 바꾼 정환이는 아주대학으로 진학했고 올해 부산 대우에 첫 프로 데뷔를 했다. 프로 데뷔 첫해 그는 승승장구하며 천부적인 골감각을 선보여 9월 현재 시즌 12골 3어시스트를 기록, 올해의 신인왕상을 바라보고 있다. 안정환은 프로에 입단하면서 자유롭게 머리를 기르게 되었고 시합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긴머리에 머리띠를 둘렀다. 이것이 신세대 남성 사이에 유행되면서 안정환의 유명세를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정환이는 시합이 있기 전날 밤이면 운동화를 깨끗하게 닦고 출정할 유니폼을 입고 자는 버릇이 있어요. 이렇게 하면 정신통일도 되고 마음도 다져지나봐요.”
올초 프로 입단을 하면서 받은 계약금 1억2천만원의 일부를 집안의 빚 갚는 데 내놓았던 정환은 어머니에게 이제는 안방마님이 되라고 당부했다. 그동안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직장다니고 가게한다고 하루도 편히 쉰 날이 없는데 지금부터는 아들만 믿고 살라는 소리였다. 감격해서 안혜령씨는 또 울었다.
수요일과 주말, 안정환은 일주일에 2번 시합이 있다. 그리고 그날 새벽 6시에서 8시까지 어김없이 안혜령씨는 흑석동의 감로사에서 아들의 승전을 위한 불공을 드린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고 아들의 시합시간에 맞춰 경기를 관전하러 간다. 요즘은 열광하는 팬들에 밀려 사랑하는 아들과 단 한마디의 말조차 나눠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만 보고 와도 그녀는 좋다. 스물네살의 사랑은 지금 저기서 환하게 웃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