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이기에 서툴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
<1장 그녀와의 장난>
사랑한다고 정말 한번만 이라도.....
제발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도 나는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또 아무 말없이...그 사람의 목소리만을 듣고 있다. 밤...10시... 항상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누구야??'
'...........'
'아우..~야 또 너냐? 너 진짜 벌써 몇 번째냐..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지...야!야!!!'
'............'
'그래..너 정말 신기한 애구나..왜 전화를 걸고 말을 안해?'
'...........'
'아우 짜증나 야 나 끊는다!' 뚝! 띠띠띠띠...
그냥 끊어버린 전화.. 그래도 나의 얼굴은 웃고 있다.. 오늘도 그토록 사랑하는 너의 목소리를 들었으니까.. 비록 나는 한마디 말도 못하고...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져있을지라도...
다음날 나는 학교를 가는 길에 너를 만났어. 참..친구들이랑 장난치면서....등교하는 너를 보는데 왜 그렇게 이뿌던지... 오늘도 여지없이 밤 10시가 되었다. 이정도면 거의 스토커 수준이다.
'여보세요..'
'............'
'......아...또 너구나......야.....너 웬만하면 이제.. 말 좀 해라....나 진짜..답답하다.....내가 이렇게 반말하는데 기분 나쁘지 않어? 너 나 좋아하냐? 왜 맨날 나한테 전화해? 응?'
'..........'
그날 너는 술에 취한 목소리였고 무슨...말을 하려했었지...
'훗...참나....진짜....야 너도 정말...끊질기다..그래그래..니가 정 말하기...싫으면 이렇게해..내말에 맞으면 전화기버튼 한번 누르기... 아니면 두번...알았지....?'
띠!
'하하....그래.....그럼 물어볼게...너 나 좋아해?'
띠!
'흠....그래? 날 좋아한다구? 그럼...너 우리 학교 다녀?'
띠...
'흠 누구지?... 야 진짜 너 누구냐? 그냥 니 이름을 말해봐!'
'그럼 나랑 동갑이야?‘
띠띠!
'아니라구? 야 그럼 누구야..그냥 말해!'
'...........'
'말 안해? ...휴~ 야 근데 어떻하냐...난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예?....... 뚝!’
너무나도 큰..충격에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그랬다... 나는 그녀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그리고 너무도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였다.
<제2장 나의 고통스럽던 사춘기 시절>
시간을 거슬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우리 옆집에 한 여자애가 이사왔다. 너무도 뽀얀 피부에 찰랑거리는 머릿결.. 꼭 영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여자애였다.
이 여자애... 우리학교에 다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내가 멀쑥한 교복을 입는 반면 그 여자애는 매일 사복차림으로 학교를 나간다.
저녁에는 매일 그 여자애 집 앞에서 괜스레 농구공을 튕기며 관심을 끌어 보기도 하지만 여자애가 쓰는 방의 창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있을 뿐이다....
나는 매일저녁 슈퍼마켓에서 먹지도 않을 과자를 바리바리 사들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릇도 생겼다. 매일같이 그녀의 집 앞에 과자를 놓고 가는 것이다... 좀 유치한 접근이지만.. 나름데로 나의 마음을 표출할 일종의 탈출구였다...
이런식으로 서너달이 지나가고 나는 어느덧 지역 사립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매일아침 일찍 등교해야하는 고등학생 생활에 나도 어느덧 차츰 익숙해질 무렵 나는 내 눈앞에서 믿기지 않는 일을 보고 말았다. 우리 옆집에 사는 그 여자애가 우리학교로 들어 가는 것 이었다.....
학교 도서관이다... 그녀가 매일같이 방과 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가 도서관 청소 담당을 핑계 삼아 그녀가 공부하던 탁상에 서서 그녀의 흔적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이름은... 김수연 나이가 나보다 1살 많은 누나였다. 예전부터 조금씩 누나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확인을 하고나니 조금은 섭섭함과 약간의 후련함이 함께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실체를 파악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녀에게 빠져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매일같이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위안 삼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 계속됐고 밤마다 잠을 청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고통스러운 나날이 지속될 뿐이었다...
여지없이... 새로운 하루가 밝았다. 도시락을 챙겨들고 학교로 향하려던 순간 나는 집 앞에서 이상한 종이박스 하나를 발견한다. 과자상자였다........ 그녀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아침에 집 앞에 놓여진 상자로 인해 오늘 난 학교에서 무슨 수업을 했는지... 내가 노트에 적은 내용들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게 하나도 없다... 온통 칠판 한가득 수연이라는 그 이름 두자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과자상자에 들어있던 과자들은 마치 무슨 유형문화재인 마냥 내 방 한구석을 장식하는..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될.. 내 보물1호 컴퓨터와도 맞먹을 그런 재산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에 큰 트럭 두 대가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았다. 비좁은 도로 위를 가로막고 있는 트럭이라 무척이나 괘씸해 보이던 찰나에 내 머리를 스치는 불안한 생각...
그랬다... 그녀의 집이 이사를 가는 것이다... 아직 고백도 못했는데 이렇게 떠나간다는 생각에 가슴 한구석 울컥 치밀어 오르는 서글픈 감정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슬펐다...
제발이지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가길 또 학교만큼은 옮기지 않길 바랬던 나의 희망도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몇 일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그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곤 나도 그녀를 조금씩 잊어가기 시작했고 나의 첫사랑의 얼굴은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3장 그녀와의 재회>
어느덧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나에게도 청춘의 상징이라는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지난 1년간의 말로는 이루지 못할 수험생활의 고생을 생각해보면 이제는 실컷 놀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 속을 가득 메운 대학 신입생인 것이다.
학교 MT가 끝나고 곧 있으면 대학에서 처음 맞이하는 중간고사다. 대학 와서는 절대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 생각에 큰 변화는 없었기에 내일이 시험인데도 과친구들과 내가 다니는 경영대 앞 잔디밭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소주병이 하나둘씩 기울어지고 친구들도 하나 둘씩 드러눕기 시작할 즈음 2학년 선배는 나에게 만원짜리 지폐를 건내주며 술을 더 사오라는 어명을 내리신다. 그래도 내가 덜 취해 보이기는 했나보다....
가장 가까운 인문대 뒤의 구멍가게서 소주 몇 병을 사들고 학교로 들어서는데 나는 내 눈을 의심케 하는.. 실로 잊을 수 없는 여자를 보고 만다... 몇 년 전 나의 사춘기시절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게 했던 김수연.. 내 첫사랑이었다...
나는 내 의지를 추스릴 여지도 없이 첫사랑 수연의 발걸음을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간곳은 인문대 독서실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와는 다른 공부벌레이기에 내일부터 있을 시험에 대비해 공부하는 듯 했다... 도서관에서 술병이 담긴 흰 비닐봉지를 들고 서있을 한 사람을 상상해보라..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을 선배가 있던 잔디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오늘부터 시험이다. 나는 가뜩이나 자리 잡기 힘든 경영대 독서실을 피해서 인문대 독서실에 전공책을 펼쳐놓았다. 사실 딴 맘이 없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일 듯...
나는 지난 몇 해 전 고교 독서실에서 능숙한 탐정마냥 그녀의 사생활을 훔쳐보았던 전력을 경험삼아 그녀가 자리 잡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고 이틀간의 고생으로 그녀가 중문학과 학생임을 확인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그 자리에서 중문과 학과실을 찾아가 마치 그녀의 선배인마냥 행동하면서 그녀의 연락처를 물었던 것이다... 결과는 ok였다.
이렇게 나의 그녀에 대한 사랑스러운 장난 행각은 다시금 시작되고 있었다...
<제5장 사랑만으로 사랑이 되니?>
'아니라구? 야 그럼 누구야..그냥 말해!'
'...........'
'말 안해? ...휴~ 야 근데 어떻하냐...난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예?....... 뚝!’
너무나도 큰..충격에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다음날...나는 그녀를 언제나 그랬듯이 멀리서 또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도...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이런 사실을 누구한테도...말 할수가 없었으니까..
그날 밤...나는 많이 망설였다. 전화기 옆에서..몇 번을 망설였다.. 내 손은 이미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를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말에 나는... 나는...전화를 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 그날 그렇게 미치도록 후회를 하면서도... 그 다음날.....그 다음날에도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랑 잘 되라는... 내가 방해가 되지는 말자는.. 그런 생각에...
어느 날...... 그녀는 잘 나오던 도서관에 나오지 않았다...난....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했지만....그 다음날....그리고....그 뒤로도 계속 그녀는 학교에 오질 않았다.... 그래서 난 중문과 학과실을 찾아가 그녀의 휴학여부를 물었다... 다행히 휴학이나 자퇴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제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내 볼 참이었는데... 다시금 장난전화를 시작해야한단 말인가...
사실 장난 전화를 다시 한다는건 나로써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금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받질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됐다... 이대로 영영 볼 수 없는건 아닌지...
그렇게 또 다시 몇 달이 지나가고... 내가 대한민국의 현역병 군입대를 앞두고 매일같이 친구들과 방탕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시기였다... 신체검사를 받고나서 바로 입엽희망원을 낸터라 한달 뒤 바로 영장이 나왔다... 1월 19일...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입영일이다...
1월이 어느덧 성큼 다가오고 나는 하루하루 더욱 더 미친 듯이 놀지 않고서는 입영일까지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오늘 술 한잔을 마셨다면 내일은 꼭 2잔은 마시고 놀아야 분이 풀리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렇게 입대일을 1주일 남겨둔 시점에서 난 학과선배 그리고 같이 입대하는 친구 녀석 한명과 흔히 말하는 단란주점이라는 곳에 가게 됐다... 돈 많은 선배와 씀씀이가 해펐던 나의 성격으로 인해 조금은 퇴폐적이고 값비싼 술값을 내야하는 주점도 한번은 겪어봐야할 곳이라고 애써 합리화 시키며 속물적 근성을 자주 드러내던 시기였다...
하지만 정작 즐겁고 화끈한 밤을 보내자고 들어간 주점에서 나는 정작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시종일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수연씨가 그 주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리가 들어간 룸으로 따라 들어왔고 나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술자리가 시작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실망도 컸고 내가 알고 있는 수연씨가 아니라는 생각... 더욱이 그녀에게 비춰질 나의 속물적인 모습...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먼저 말문을 건넸다...
‘왜 여기에서 일을 하게 된거에요?’
그녀는 당황했다.. 여태껏 손님 가운데 그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없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역시 그녀는 웃어넘기려했지만 나의 진지한 표정에 다시금 아픈 감정을 숨기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끝내 그녀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난 용기를 내어 오늘 일이 언제 끝나는지를 물었고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퇴근 후 함께 얘기 좀 할 수 있냐는 얘기를 건넸고 그녀는 싫지도 좋지도 않은 표정으로 수긍해주었다...
그녀가 나왔다... 술을 많이 먹지 않은 탓에 나는 그녀와 함께 다시 술 한잔 할 것을 권했고
그녀도 싫지 않은 듯 내 뒤를 따랐다...
우린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누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마냥 급속도로 대화가 잘 풀려나갔다... 술이 한잔 두잔 들어 갈 때마다 나는 그녀의 숨겨진 속사정과 실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꾸 더 이상 못마시겠다던 그녀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한잔을 더 마시도록 유도했고 지금까지의 가벼운 분위기를 벗어나 다시금 그녀를 당황케하는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왜 학교를 다니다가 이런일을 한거죠?’
그녀는 한참을 숨죽이다가 이내 큰 눈망울 아래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난 순간 괜스레 아픈 상처를 건드린건 아닌가 하는 후회스러움도 밀려왔지만 결국 그녀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 그녀의 가정 형편은 내가 알던 아니.. 정확히 말해 추측한 것과는 달리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받은 퇴직금을 사기당하는 바램에 부모님은 이혼하셨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등록금 마련도 힘들어서 이일 저일 해보다가 가장 돈벌기 쉽게 여겨진 주점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던진 나에게 어쩌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내 앞에서 자존심 따위를 챙길 만큼 속사정이 그러지 못했다... 아직 주점일에 익숙지 않던 터라 여기저기서 맘고생이 너무 많은듯했다... 그렇게 그녀의 술주정에 가까운 속마음을 듣고 나서야 나는 잠시나마 그녀에 대해 오해를 했던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속사정을 알아차린 나로서도 이제 일주일 뒤면 대한민국의 현역병으로써 군복무를 시작해야하는 처지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욕심같아서는 그녀에게 학비라도 보태주고 싶었고 나의 연인이 되어달라고 애걸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을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주점 생활에 조금은 익숙해져있었고 쉽게 버는 돈맛을 알아 버린 터였다... 별 보잘것없이 지내다가 군복무를 시작하는 멋모르는 이에게 무슨 애정이 생길까하는 자책감마져 드는 순간이었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고 전화 연락처만을 받아내는걸로 만족해하고 자리를 일어서려고 했다... 그때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호프집 사장님도 문 닫을 시간이라며 눈치를 주는데 정말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나가서 택시라도 잡아서 그녀의 집을 찾아 가야할 판국이지만 눈 오는 날 새벽녘에 택시를 잡기란 너무도 힘들었다... 나는 결국 그녀를 등에 업히고 눈 내리는 새벽길을 끙끙거리며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갈 곳도 없었고 그녀의 집도 몰랐다.. 내가 사는 하숙집에 데려 갈까하는 생각도 바로 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근처의 여관으로 들쳐 업고 갔고 흐트러져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점심이 다되어 눈을 뜬 나는 제일 먼저 그녀가 방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행이도 그녀도 이제 막 눈을 뜨고 있던 참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난감함... 우리는 구겨진 옷에다 씻지도 않은 몰골로 여관을 나섰다... 그리곤 근처의 허름한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별다른 말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일단 그녀가 집에 돌아가는걸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집에 보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 내가 왜 이럴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저녁도 거른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길 몇 시간 결국 나는 그녀가 남겨준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역시 그녀는 받질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음성메시지로... 나는 일생일대의 첫 사랑고백을 해버리고 말았다...
<제7장 군생활의 시작>
이제 입대가 하루 남았다... 내일이면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사회생활을 접고 지옥같은 군생활이 시작된다... 나는 입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수연이라는 이름 두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제발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나주길 바랄뿐이었지만 그녀는 내 전화도 받지 않는채 그 주점에도 나오지 않은채 연락이 없었다... 음성메세지를 괜히 남겼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도 내가 내일 입대한다는걸 알텐데... 나에게 맘이 있다면 다시금 연락을 해줄텐데... 하는 마음만 간직한채 하루가 지났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뒤 나는 친구녀석과 함께 진주 훈련소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친구녀석도 다음달에 육군으로 입소할 예정이지만 나를 위해 진주까지 따라와 준 것이다...
부대정문에서 나는 친구의 휴대폰을 빌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역시 그녀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1월 19일 오후 2시 이렇게 나의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부대에서 헌병이라는 보직을 맡았다... 참 운도 지질이도 없는 놈이다... 이는 나에게 어느 여타의 보직보다도 힘든 군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두달간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 뒤 바로 첫 정기 휴가를 나왔을 때다... 집에 돌아와서는 제일 먼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외로 그녀는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목소리도 옛날과는 다르게 활기차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부대주소를 알려주었고 편지 한통이라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녀는 처음엔 머뭇머뭇하더니 결국 시간이 나면 편지를 쓰겠노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주소도 확인한 후 기쁜 맘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정기휴가를 마치고 부대에 들어와서는 매일같이 그녀 생각만 하며 힘든 군생활을 이겨내 갔다... 근무를 마치고 저녁에 침상에 들어서서는 미미한 불빛을 전등삼아 그녀 앞으로 보낼 편지를 한 통 한 통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편지를 자주 붙일 수 없는 부대 특성상 일주일치 편지를 한꺼번에 보내야하는 한계 때문이었다....
4월 24일 그녀에게서 첫 편지가 내 품에 찾아들었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노란봉투에 깨알같이 써내려간 그녀의 작은 글자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무척 설레이게 했다... 그녀가 다시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들어있었다...
그 뒤로도 그녀는 나에게 서너통의 편지를 더 보내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고 다음 달에 있을 2박3일간의 정기외박을 나가서는 장미 100송이를 그녀에게 안겨주며 정식으로 사귀자는 사랑 고백을 해볼 참이었다...
그러던 참에 나를 잘 챙겨주던 고참병이 나에게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일병이 되어야만 밖으로 전화를 할 수 있는 소대내의 규칙을 깨뜨리고 나에게 전화를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장 다 쓰지도 못할 동전 한 뭉큼을 집어들고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에 더욱 더 걱정하실 부모님 생각도 잊은 채 그녀의 전화번호를 먼저 누르게 되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말문히 막혔다..... 앞뒤 사정도 없이 뒷일도 생각해보지 않은채로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병진입니다.. 면회 와주지 않을래요?’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이... 참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챙피한 마음에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화기 버튼을 잡아내리고 말았다... 후회스러움... 2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이렇게 나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진적은 없었을터...
오늘은 토요일... 면회가 되는 날이다. 오늘도 고참들은 여자친구니 부모님 면회니 하면서 다들 들뜬 표정으로 면회장에 나가고들 있다... 부럽기도 했지만 난 돌아오는 이번주 화요일이면 두 번째 맞이하는 2박3일간의 정기외박이 있기 때문에 작게나마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때였다. 상황실 스피커를 통해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심 내가 무슨 또 사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