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범수에게는 대화를 할 때 버릇이 하나 있다.
말문을 열 때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토를 다는 것이다.
말버릇 하나에서도 드러나듯이,
이범수는 흉중에 품은 생각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말석 단역으로 출발해 주연 자리에 오르기까지
뚜벅뚜벅 자기 길을 걸어온 배우가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다.
배우로서, 영화인으로서 이범수가 하고 싶은 말들을 기탄없이 듣는다.
▶(FILM 2.0 137호 표지의 김래원 사진을 보고) 표지 한 번 해야되는데.
표지 하지 않았었나? <정글쥬스> 개봉할 때.
▶단독 말이다. 단독. 그때는 장혁하고 같이 했지 않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한 가지만 물어보자.
영화 전문지에서 표지 모델 선정하는 기준이 뭔가?
뭐... 표지는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배우가…
▶이 잠깐. 난 스스로 영화인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연예인도, 방송인도 아니다.
내가 영화만 하는 건 그만큼 영화에 애정이 있다는 소리다.
카드 한 장 가지고 있는데 그걸 영화에만 쓰는 것은 대단한 애정이다.
나는 영화인이기 때문에
여성지, 시사지, 방송지 이런 데서 화제가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패션 잡지에 100페이지 나오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하지만 영화 잡지에 한 번도 단독 표지 모델을 못한 건 자존심이 상한다.
왜 표지 모델로 안 쓴다고 생각하나?
▶뻔하지.
이범수가 표지로 나가면 책이 안 팔릴 거라는 생각 때문 아닌가.
그런데 그런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그런 생각은 분명히 불식시키고 싶다.
다시 한번 내 기질이 발동한 것 같다.
자, 표지 얘기는 그만하자.
현재 후반작업 중인 <오! 브라더스>에서 연기하는
조로증 걸린 12살 소년은 워낙 독특해서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다.
▶배우라면 누구나 멀쩡한 성인이
열두 살 먹은 아동 역을 해야 한다면 호기심을 느낄 것이다.
나의 본 모습과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정말 해보고 싶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나도 기대가 된다.
배우들이 원래 그렇지 않나.
자신의 모습과 동떨어져 있는 캐릭터에 큰 매력을 느끼고.
▶감독의 역량, 드라마 구조, 흥행성 등 여러 요건이 있지만
난 기본적으로 인물이 매력 있어야 된다.
시나리오, 인물에서 인간 냄새가 나야 한다.
<정글쥬스> <몽정기> <싱글즈> 등 최근 출연작들이
다 인간 냄새는 나는 영화들이다.
그런데 <오! 브라더스>를 두고 보면
‘이범수가 어떻게 열두 살 아이 역할을 했을까?' 궁금하다.
▶좋은 배우는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고 바탕이 순수해야 한다.
<오! 브라더스>의 소년 오봉구는
그 두 가지를 특히 극대화해서 보여줘야 하는 역할이다.
촬영 내내‘내가 열두 살 소년이라면 이러했을 것이다'는
상상에 많이 의존했다.
그렇더라도 상상력만으로 성인이 열두 살 소년이 되기는 힘들다.
아이의 행동 양식, 말투, 습관 따위는
연기의 테크닉이 필요한 부분들 아닌가?
▶물론 아이들을 많이 관찰했다.
초등학교 4학년 수업을 참관하면서 여러 가지를 유심히 살폈다.
아이들은 산만하고 순간순간 변화의 폭이 크고,
그런 점을 많이 살리려고 했다.
어떤 인물을 형상화할 때 관찰에 많이 의존하나?
▶이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인데 더 어려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모를 때가 더 편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연기는 직감과 직관에도 의존하지만
전체를 컨트롤하는 이성적인 계산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오! 브라더스>처럼 관찰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연쇄 살인범이나 조선 시대 무사처럼
관찰이 어려운 캐릭터도 있다.
상황에 따라 접근 방법이 다르지만
내가 상상력, 관찰력이 남들보다 조금 더 있다는 생각은 한다.
<오! 브라더스>의 아동 연기는
소위 말하는 외적인 변신의 폭이 큰 역할이다.
사람들은 일단 외적인 변화의 폭이 크면 주목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배우가 눈에 보이는 변신을 하면 사람들은 일단,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를 가지고 들여다보게 돼 있다.
가령 <오아시스>에서 문소리씨가
장애인을 연기한 것은 무척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적인 표현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좀더 학구적으로 얘기해보자면,
애인 연기를 하는데 몸을 어떻게 꼬고 혀가 어떻게 돌아가느냐 하는 건
표면적인 어려움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이다.
하지만 보이는 어려움보다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더 크다.
문소리씨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변화는 배우밖에 모르는 것 아닌가?
▶배우의 변신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걸 대단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 어느 배우든 간에
자기가 맡은 역할 중에 같은 게 하나라도 있나?
죄다 다른 배역이다.
<몽정기>의 선생님과 <정글쥬스>의 양아치, <일단 뛰어>의 형사는
머리 끝 부터 발 끝까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렇다면 배우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그런 변화된 모습을 배우는 즐길 줄 알아야 하고
나 역시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배우가 된 거다.
하지만 배우들은 변신에 대한 강박에 짓눌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비유해보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도 가야 하고, 과외도 받아야 하고,
뭐도 해야 하고 이런 생각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업 시간에 충실하면 된다.
학교에서 안 배운 내용이 시험에 나오지는 않는다.
수업을 다 이해했다면 학원에 가고 과외를 받을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하다면
변신에 대한 강박은 가질 필요가 없다.
좀 전에 말했듯이 배우의 배역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러운 변신이다.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영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조금씩 꾸준하게 다져가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굉장히 의식적으로 노력을 많이 했을 것 같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학교에서 연기를 배울 때 ‘세상에 하찮은 배역은 없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맞다. 하찮은 배역은 없다.
하지만 하찮은 배역은 없다는 생각만 믿고
평생 동안 하찮은 역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웃음)
하찮고 하찮지 않고를 떠나서
배우는 본질적으로 주목받고 싶어하는 동물이다.
단역 시절에는 더 많은 분량, 주목받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배우의 본능이 그렇다.
더 많이 주목받고 더 많이 나를 바라봐주고
더 많이 나를 거론하는 걸 원한다.
초기에는 임팩트가 강한 역할이 많았다.
나 또한 주목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임팩트가 강한 인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초기 이미지가 희극적이 된 것 아닌가?
▶본의 아니게 관객에게 선보인 첫번째 보따리가
희극적인 이미지가 된 셈이다.
정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 거다.
희극 연기를 먼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이범수라는 배우가 얼마 만큼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럼, 기점이 되는 영화는 <태양은 없다>로 봐야 하나?
▶<태양은 없다>의 병국은 단순한 깡패가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그로테스크한 면이 있는 깡패였다.
보면 찝찝하고 기분 나쁘고 아무튼 묘한 놈이었다.
그 전까지 내가 한 역할은 깡패면 깡패,
양아치면 양아치였지 그렇게 복합적인 성격은 없었다.
그런 복합적인 캐릭터들에 끌리나?
▶난 연기의 매력,
아니 인간의 매력은 액면과 이면이 공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아이러니, 페이소스가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태양은 없다>의 병국은 그런 액면과 이면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
<몽정기>의 선생님, <싱글즈>의 정준,
다음 영화인 <안녕!유에프오>의 뚱한 괴짜 로맨티스트는
지금까지 내가 보여주지 않았던 다른 보따리들이라고 생각한다.
<안녕!유에프오>로 드디어 멜로를 하는 건가?
▶(단호하게) 내가 드디어 멜로를 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진 또다른 보따리, 그게 멜로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른 것이라도 기뻤을 거다.
그게 설령 또라이라고 해도(웃음).
일단 다른 보따리를 보여줄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게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차후에 문제고.
이번에는 그 기회가 멜로가 됐을 뿐이다.
자신감이 대단하다.
▶멜로가 어렵고 멀리 있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누구나 멜로를 할 수 있다. 지금의 멜로는 몇 십년 전의 멜로가 아니다.
가리봉동에서 생선 파는 아줌마가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산다.
선남선녀의 멜로만 장사가 된다는 편견도 깨지지 않았는가.
이범수 얼굴이 멜로 마스크가 아니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나.
내가 가지고 있는 멜로 코드가
다른 배우가 가진 그것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다.
장동건? 잘 생겼지. 인정한다.
멜로에 어울리는 배우를 1위부터 100위까지 줄을 세운다면
장동건은 1위에 가깝겠지.
하지만 20~50위 권에 있는 배우들은
엇비슷해서 누가 낫고 못하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배우마다 개성에 맞는 멜로를 하면 된다.
내가 1위 장동건이 하는 멜로를 할 필요는 없다.
이범수에 맞는 멜로를 찾아서 하면 되는 거다.
그럼 <안녕!유에프오>는 이범수의 개성을 살린 멜로인가?
▶딱 그런 멜로지.(웃음)
20대 후반의 구파발 종점 마지막 버스 운전사로 나온다.
쥐꼬리만한 월급받고 성실히 사는 운전사하고
그 버스를 타는 시각 장애인 여자의 로맨스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다.
<태양은 없다>의 깡패 역처럼
지금까지 기폭제가 된 역할이 있나?
▶<오! 브라더스>가 그렇게 될 것 같다.
개봉도 안 했는데 이렇게 건방 떨면 안 되는데.(웃음)
배우가 충실하게 임했던 작품에 대해서
기대를 갖는 것 또한 지극히 아름다운 것 아닌가.
절대 자만이나 들뜬 기분에서 말하는 게 아니다.
<싱글즈>는 우정 출연이었는데,
제안을 받을 때부터 우정 출연이었나?
▶그렇다.
얼마 전 <싱글즈>의 권칠인 감독을 만났는데 편집에서
이범수 분량이 50% 이상 빠졌다면서 상당히 미안해 하더라.
▶배우는 편집을 두려워하고 싫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현장에서 연기를 1부터 10까지 했다고 치자.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1~10까지를 한 거다.
그런데 편집에서 3과 8을 들어내버리면
결과로 보여지는 연기는 덜컹거리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나는 관객들에게
“난 연기를 할만큼 했는데 편집에서 들어내서 그런 거예요”
라고 말을 하고 싶다. 진심으로. 내 연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 배우로서.
물론 3과 8을 들어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걸
이해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1에서 10까지는 모두 현장에서 오케이가 난 컷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우의 책임은 아니라는 말이다.
감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지 않은가?
▶감독은 영화 전체를 꿰고 있는 사람이다.
감독이 잠망경 올려서 좌표 불러주면
배우는 물속에서 정확한 좌표를 보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을 왔더니 “왜 여기로 왔어?”라고 하면 안 된다.
세상에 어떤 컷이든지 감독이 오케이 안 한 컷이 있나.
감독이 다 오케이 한 컷이다.
인터뷰에서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기자가 물었을 때 “글쎄요. 뭐 특별히 내세울 건 없었죠”라고
말하는 감독님들이 있다.
이 자리를 빌어 세상의 모든 감독님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제가 그렇게 디렉션했습니다. 왜 어때서요? 그게 이상합니까?
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오케이를 내렸고
배우의 연기에 만족합니다”라고 말해야 멋진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자아가 강한 배우들은 현장에서 감독과 연기에 대해
논쟁을 하거나 갈등을 빚기도 한다.
▶내가 식당을 오픈했다고 치자.
손님이 와서 자장면을 주문했는데 주문한 음식을 갖다 줘야지.
한식을 먹어야지, 볶음밥을 먹어야지
왜 자장면을 시키느냐고 하면 되나.
배우가 뭔가. 감독이 주문한 연기를 뽑아내는 사람이다.
감독이 자장면을 주문했는데 탕수육이 낫다는 둥,
짬뽕이 낫다는 둥 내가 왈가왈부하며 안 된다.
그럼 내가 감독을 해야지.
단, 간자장이 어떻겠느냐,
당신 매일 자장 먹는데 오늘만은 짬뽕이 어떻겠느냐
하는 대화는 나눌 수 있다.
영화는 결국 감독이 열쇠 구멍으로 바라본 세상이기 때문에
절대 배우가 월권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가끔 주문을 이상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자장 달랬다가,
“아냐. 생각해보니까 짬봉이 괜찮을 거 같아”라고 했다가,
볶음밥으로 다시 바꾸고.
그럼 그걸 다 섞으면 뭐가 되나. 개밥 밖에 더 되나.(웃음)
그렇다. 개밥은 먹기 힘들다.(웃음)
▶그럴 때는 내가 만드는 음식의 소중함도 있으니까 주장을 한다.
감독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감독은 존경받고 박수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감독을 해야 된다.
군대에서 사병이 잘못하면 그 사람 하나 죽고 말지만
대대장이 잘못 하면 대대원들이 다 죽지 않나.
그러니까 대대장이 대단한 것 아닌가. 경례도 받고.(웃음)
요즘은 너무 감독하고 싶다고 다 감독하는 거 같다.
배우 하고 싶다고 아무나 배우 하는 것처럼.(웃음)
이범수에게 없는 보따리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그러고 보니 내가 할 수 없는 역할이 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진짜 한번 고민 해봐야겠다.
반대로 자기만 가지고 있는 보따리에 대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보따리는
다른 배우들도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다.(웃음)
내가 가진 보따리가 많다는 것을 스스로 검증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스펙트럼을 얼마만큼 넓힐 수 있을지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그런 매력에 이끌려 애초에 연기를 시작한 것이니까.
아직 못해 본 게 너무 많다.
<오! 브라더스> <정글쥬스> 같은 영화에서
투 톱으로 나올 때는 상대 배우들과의 보이지 않는 경쟁심,
밀고 당기는 심리전 같은 게 있지 않나?
▶당연히 있고, 있어야만 한다.
배우라는 동물의 본능은 주목 받고 싶어한다니까.
상대 배우와 코드가 맞지 않으면 아주 괴로울 것 같다.
▶그게 야구와 같다.
내가 1회 초에 수비를 했으면 1회 말에는 공격을 한다. 그게 룰이다.
상대가 1회 초 공격에서 열심히 공격하는 건 인정한다.
나는 그때 열심히 수비하면 되는 거다.
내가 1회 말 공격할 때 열심히 점수 내면 되는 거고.
내가 주목을 받아야 하는 장면에서 상대방이 방해하면 안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걸 잘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선의의 경쟁’이다.
1회 초든, 1회 말이든 무조건 자기 점수만 내려고 하는 상대를 만나면
그것까지는 용납 못한다.
내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무슨 봉사하려고 서는 게 아니다.(웃음)
연기할 배역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서는 거다. 그 책임을 져야지.
대한민국의 어떤 배우하고 만나도
난 쿨하게 경기 운영한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쿨하게 게임하려고 하는데
1회 말 겪어보니까 이거 아니다 싶으면 나도 사정없지.(웃음)
상대 배우에 따라 많이 달라지겠다.
▶함께 영화를 하려면 먼저 동료 배우를 좋아해야 한다.
좋아하게 되면 허물도 용서가 된다.
수비에서 공격하려고 해도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고.(웃음)
좋은 맞수는 미워할 수 없다. 같이 겨룸으로써 행복하고 즐거운 법이다.
그런 점에서 <오! 브라더스>에서 이정재씨는 좋은 상대였다.
서로 만족하면서 젠틀하게 경기를 했던 것 같다.
이정재씨는 <태양은 없다>에서도 만나지 않았나.
▶그때는 서로 낯설었다. 난 무명이었고.
영화 하면서 아직까지 못 견딜 만한 배우를 만난 적은 없다.
아직 임자를 못 만났다는 소리인가?
▶그런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강력한 내공을 지닌 배우를 만나서
불꽃 한 번 튀겨보고 싶다.
1,2년 전부터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웃음)
기회가 되면 제대로 한번 겨뤄보고 싶다. 진검으루다가.
일이든 생활이든, 계획을 세워서 치밀하게 하는 편인가?
▶연기 시작할 때부터 멀리 보고 온 것은 사실이다.
지금 앞날을 멀리 내다보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
▶좀 엉뚱한 얘기 하나 하자. 나는 한국 영화계가 자랑스럽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면 한국 영화계에 좋은 배우들이 많아서 흐뭇하다.
이건 진심이다.
그들을 경쟁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직장 동료 아닌가.
애경사 있을 때 찾아와 줄 수 있는 동료이자 선후배다.
잭 니콜슨,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는 20대 말부터
옥신각신하면서 엇비슷하게 성장해온 사람들 아닌가. 다 좋은 배우들이고.
30~40년 동안 함께 영화 할 동료들 중에 연기 잘하고
훌륭한 배우들이 많으니 얼마나 흐뭇한가.
앞으로 영화가 얼마나 좋아지고 기름져지겠나?
이야기가 범영화인의 문제로 번지는 것 같다.(웃음)
▶이건 진심이다. 좋은 배우들과 좋은 영화를 많이 하고 싶다.
흥행도 잘되고 평가도 받고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그렇게 평생을 좋은 영화에 이바지하고 싶다.
서른 넘으면서 계속 그런 생각을 한다.
여담이지만, 생각보다 너무 진지한 사람 같다.(웃음)
▶난 원래 진지하다.
영화배우가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하고,
부탄 가스나 불던 애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웃음)
그런 건더기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다.
연예인이나 방송인이 아니라 배우이기 때문에
당연히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진지한 배우들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배우 중에는 아웃사이더들이 많다.
당신도 아웃사이더인가?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보스 기질이 조금 있어서 어디 끼고 이러지를 못한다.
내가 새로운 그룹을 만들면 만들었지.
그런 면 때문인지 주변에서
‘이범수는 영리하고 자기 몫을 확실히 챙길 줄 아는 배우’
라는 소리를 자주 한다.
▶그런 평가는 듣기 좋다.
인색해서 손해볼 일은 안 하는 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면.(웃음)
난 상황이 안 좋다고 포기한 적은 없다.
대사 한마디 없는 역을 맡아도
‘대사 없으니 대충하고 다음에 대사 있는 역 줬을 때 열심히 해야지’
절대 그럴 놈은 아닌 거지.
별의별 짓을 다 해서라도 그 상황에서 눈에 띄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과거의 내 모습을 자랑스럽고 기특하게 생각한다.
물론 그 동안 대사 없는 단역은 없었다.(웃음)
그렇게 하고 나면 후회는 없겠다
▶후회를 할 것 같더라도 매번 있는 힘을 다하는 게 분명하기 때문에,
그건 후회가 아니다.
지금까지 내 삶이 그랬던 것 같다.
취재 장병원 / 사진 한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