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수는 내가 보기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연기자다.
순식간에 스타가 만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우리나라 대중문화 속성상,
그같이 꾸준히 자기의 연기세계를 넓히는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우선 그는 '나에게는 이런 배역이 맞소' 하는
자기 얼굴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한다.
매작품마다 조금씩 색깔을 달리해 보는 이의 눈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그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다.
보통의 연기자들이 자기 얼굴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는 데 반해
그는 어느 자리에 서 있던 진부함을 거부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의 털털함도 마음에 든다. 요란한 자기 치장도 하지 않는다.
경박하게 급조되어 능력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는 젊은 스타들에 비해,
연기 경력이 쌓일수록 그를 더욱 돋보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그는 다른 세계를 꿈꾸고 있다.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는 열정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어쩌면 감각이 젊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야구 보다는 축구?
▶사실, 축구를 더 좋아하는 편이에요.
거스 히딩크가 감독으로 있는 PSV 에인트호벤팀의 광적인 팬이죠.
이번 영화를 통해서 야구에 더 관심을 갖게 됐고요.
일부 나라에서는 야구 기술 중에 도루라는 것이 있어서
비신사적인 운동으로 보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야구가 얼마나 신사적인 스포츠인데요.
축구 보다는 2% 못하지만 말이에요.(웃음)
1990년 초반 하이틴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로 데뷔한 이래
15년 만에 첫 타이틀 롤을 맡게 된 이범수.
그의 감회는 남다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타이틀 롤인 영화나
이전 영화나 별 차이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오히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단역시절이 더 소중하다고 고백한다.
연기는 인생 그 자체
▶저에게 연기라는 것은 삶이거든요.
인생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거기서 많은 것들을 배웠고 앞으로 내가 작품을 선택할 때도
내 인생에 도움을 되는 작품을 고르고 싶어요.
물론 저에게 의무라는 것은 있죠.
그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되는 것들.
그렇지만 제가 선택하는 것만큼은
내 자리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겠다는 것,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범수는 꿈꾸기에 그치지 않고 준비하는 과정 자체를 믿는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그 사유가 무르익을 때까지 숙성시키며 길게는 1년,
짧게는 6개월 동안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그가 긴 무명생활을 버텨온 저력이다.
그가 영화판에서 다른 배우들과 차별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최고의 학문
▶제가 배우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는 이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물론
우리네 인생살이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연기였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 연기만큼 인간을 탐구하기 좋은 학문은 없어요.
시나리오 상에만 존재했던 인물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낼 때
자동적으로 생기는 희열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고요.
마치 마약과도 같죠.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고나 할까요?
현실에서는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선남선녀의 사랑을 통해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심어주기 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일상사를 통하여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연기는 내 삶의 후원자
▶처음부터 연기의 한계선을 그어 버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배우의 생명력은 거기서 끝나고 말아요.
그래서 연기가 저에겐 아주 소중하고 중요한 직업이었죠.
앞으로도 제 삶의 후원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겠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배우의 꿈이겠지만
평생 동안 이 직업을 벗으로 삼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인간냄새 나는 영화가 좋다
▶제 생각은 남자배우는 서른 이상부터가 시작이라고 보거든요.
나이가 어리면 일단 삶을 잘 모르고 인간을 몰라요.
인생을 그리 오래 살아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제가 하는 직업은 인간을 만들고 표현해내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을 모르고 삶을 모르는데 어떻게 진실된 연기가 나오겠어요.
전 무대체질이에요
▶전 무대체질이에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다닐 때의 일인데요.
제가 연출한 작품을 가지고 무대에 오른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무대 밖이 아닌
무대 위라는 생각이 불현듯 든거예요.
카메라 뷰파인더에 인물을 담는 사람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담기는 사람쪽이 적성에 더 잘 맞았기 때문일까요.(웃음)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관심을 가져볼 수는 있겠지만,
연기의 길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아직은 연출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이범수의 이름에서
일회성 웃음보다는 여운과 페이소스를 먼저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스크린상에서 비쳐진 이범수는
언제나 관객들에게 진한 웃음을 주는 배우였다.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이범수가 맡은 감사용이라는 캐릭터는
그의 그림자가 아닐까 할 정도로 닮은 구석이 많다.
그가 지금까지 했던 역할과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그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변화무쌍한 캐릭터가
감사용 안에 다 담겨져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배우의 몫.
이범수는 자신보다 감사용 역할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스크린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공공의 적, 신인 감독에게는?
▶시나리오 자체에서도 감사용은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탐을 많이 냈을 거예요.
거기에 시나리오보다 더 김종현 감독이 애정을 담아주셨어요.
사실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연배우는 다른 사람이 맡을 수도 있었어요.
이 영화로 데뷔하는 김종현 감독이
감사용 역할에 저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면요.
김종현 감독은 대한민국에서 감사용 역할을
이범수 아니면 제대로 해 낼 사람이 없다면서
제 스케줄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 기다려 주셨어요.
신인이라 빨리 데뷔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작년 추석에 개봉한 <오! 브라더스>의 김용화 감독도
극중 ‘조로증 환자 오봉구’ 역할에 저를 캐스팅하기 위해
1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려 주셨어요.
저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죠.
그 분들은 저를 공공의 적으로 임명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웃음)
대본에 가장 충실하자
▶제 생각에 연기라는 것은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진실을
따라가다 보면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영화 연기는 드라마처럼 대본이 급조되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캐릭터 분석 같은 것이 가능해요.
그래서 저의 기조는 대본에 가장 충실하자 라는 것이에요.
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부담이 됐어요.
생존해 계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담이 될 판국인데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이라 연기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 분한테(감사용)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고요.
쉽지 않은 역할이었고,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했어요.
꿈이 없으면 인생은 끝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잖아요.
저는 그것을 연기로 삼았어요. 그래서 긴 무명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요.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한다면
나중에 내 자신에 대한 후회로 가득할 것 같았고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즐겼어요.
오랜 무명시절 동안 물밀 듯 밀려온 힘든 순간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지금의 배우 이범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겠지요.
저는 그 순간들을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행복이라고 바꾸어 생각하고 대처해 나갔어요.
김종현 감독과의 작업은?
▶전혀 이 작품으로 데뷔하는 감독답지 않았어요.
현장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는 모습을 보다보면
오히려 내 연기 경륜이 무색해질 정도였지요.(웃음)
저는 우선적으로 좋은 영화가 나오려면 시나리오가 받쳐주어야 하겠지만
감독과 배우의 느낌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김종현 감독은 저와 느낌이 잘 맞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서 촬영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저는 배우의 의견은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련다'라는
식으로 연출하는 감독과는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더욱 제가 놀랐던 것은 워낙 준비를 철저하게 한 탓도 있겠지만
백회가 넘는 촬영횟수 동안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이었어요.
감독이 그런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으면
작품에 출연한 배우로서 신뢰가 되거든요.
제가 이 작품을 통해 김종현 감독과 호형호제 할 정도로 친해져서
이런 말까지 하게 되는데요(웃음),
김 감독이 생긴 것은 뚝배기 같아도 섬세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배우가 먼저 요구하기도 전에 들어준 적도 적지 않게 있었어요.
진인사대천명
▶이 세상에 천재가 많을까요, 보통 사람이 많을까요?
당연히 보통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는 이 시대에 감사용 같은 인물이야 말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수호천사라고 생각해요.
남이 인정해주든 안 해주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모습, 보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생기지 않나요.
성실 안에 나 있다
▶저의 삶에서 지키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 성실이에요.
저는 성실 안에 노력, 패기, 지혜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 있다고 봐요.
성실한 사람 하면 꼭 힘없는 사람이나 하는 오기 정도로 비쳐지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성실이란 가만있지 않는 것. 계속 자기를 끌어올리는 것.
제자리에 있게 만들지 말고
자꾸 어떤 지점을 향해 도달하고자 하는 의지예요.
<슈퍼스타 감사용>만의 매력이 있다면?
▶소모적으로 마구 웃기기만 하는 코미디도 아니고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거기에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반복해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인물을 통해 감동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온 몸을 들썩일 정도로 유쾌함까지 선물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