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자아의 불일치]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어떤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고,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써야겠구나, 하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일단 이 덴마크 영화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었고, 올해 메가박스 유럽영화제에서 다시 한번 선보이고 있는 형편이라, 영화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워낙이 유쾌하면서도 예술론에 대한 진지함이 곁들여진 작품이기에, 실제로 관람을 한 관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영화라서 관객수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다양한 컨텐츠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는 우리 나라에서 이런 좋은 영화가 많은 수의 대중에게 사랑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덴마크 영화.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과연 '덴마크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겠는가.
물론, 특정의 관심층은 열광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실제로 작년 부산영화제에서도, 올해 유럽영화제에서도 이 영화의 좌석 점유율은 꽤 높은 편이었고,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영화의 원제인 (폭발적인 폭탄)처럼 말이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 영화가 지루한 예술영화를 비꼬는 식의 전개이기 때문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도발적인 소재를(결코 주제라고 말하진 않겠다.) 고차원의 유머로 포장해냈으니, 좋아할 만도 하다. [자아의 불일치]에 관련된 글중에서 이러한 견지를 갖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감상평이 엇비슷하다.
나는 그 점이 아쉬웠고, 그래서 이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 영화는 단순하게 예술영화의 지루함을 유머로 비트는 영화만은 아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적은 상당수가 이 점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의 단순치 않은 결말과 성찰에 대해 그 누구도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기에, 이 글에서 다뤄보려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제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원제는 미리 말했듯, (폭발적인 폭탄)이다. 이 제목은 영화 속에서 예술영화에 사기당했다고 생각하는 주인공 토니가 직접 만드는 화끈한 액션 영화의 제목이다. 영화 속의 가상의 영화 제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원제가 훨씬 더 낫다고 하는데,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한국판 제목인 [자아의 불일치]에 주목해본다. 이 제목은 누가 지었는지 기가 막힌다. 개인적으론 한국어 제목쪽이 훨씬 근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이 글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분명 대중을 무시하며 고리타분한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감독 '볼터'가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걸작은 가족들이 보기 편한 영화라고 단정짓고, 그러므로 볼터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주인공 '토니'도 옳지 않다. 오히려 자신만의 기준에서 볼때의 걸작인 '해리포터'의 예매를 꼼꼼히 챙기지 않은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자기만의 기준'이 낳는 폐착은 볼터에게서뿐 아니라, 토니에게서도 오롯이 발견되는 것이다. 만드는 쪽에서도, 감상하는 쪽에서도 한가지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우다간 오류에 빠지기 쉬운 법이란 점을 말하는 영화인 것이다. 예술이란 상호적인 이해관계 안에서 꽃피우는 것이다. 이런 폐착은 두 자아가 '불일치'하는 것에서 기인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 영화는 한쪽(토니)이 공격하고, 한쪽(볼터)이 일방적으로 까발려지는 식의 단순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토니의 공격은 볼터에게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흠을 낸다. 결과적으로 볼 때, 토니의 모험은 실패로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영화의 결말이 입증해준다. (볼터의 이름이 빠진 채)만든 토니의 영화는 걸작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볼터의 악의적인 편집이 없었더라도 충분히 졸작이다. 콘티도, 촬영도, 대사도, 내용도 조악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남들을 떠나서 자신이나 자기 아이들이 보기에도 형편 없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그의 자아에 타격을 준다. 자신이 사기라고 칭했던 예술영화에 반해서 만들었던 자신만의 걸작,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도 결코 걸작이 아니었다는 실패의 경험. 열렬한 비판의 '감상'이 늘 좋은 결과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는 교훈. 토니의 자아는 영화를 만들어갈 수록 점점 혼돈에 빠지게 된다는 일침. 이것이 [자아의 불일치]가 말하려는 바라고 생각한다.
이 유머러스한 영화에서 발견되는 최고의 조소는 토니의 아들, 구스타프의 감상평에 있다. 보기 힘들었다는 여동생과는 달리 구스타프는 의외로 볼만했다고 말을 한다. 고래가 나오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고 말하는데, 이 고래는 말할 것도 없이 (토니가 아닌) 볼터의 창조물이다. 관객들은 그저 웃고 넘겼을지도 모르는 이 경이로운 장면. 이쯤이면 토니 또한 영화를 만드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관객의 호불호를 예측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를 본다면, 두 (관념적인) 주인공의 행보는 매우 흥미롭다. 볼터의 경우, 그는 영화의 초반 '자아의 불일치'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만족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과 관객이 흥미로워하는 영화에 대한 열망. 그러나 토니를 만나 일련의 모험을 겪으면서 그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에 사기꾼이라고 돈 물어내라던 토니에게 450 크로네만 쥐어주면서 다 갚지 못했다고 미안하다 말하는 볼터는 (나의 예상이지만) 불일치하던 두 자아의 일치 콘트롤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 분명하다. 나머지 몇 푼 안되는 못 갚은 돈을 영화로 갚을 것이라 생각한다.
토니는 어떠한가. 그는 하품나는 예술영화를 뒤집어 엎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계속될수록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언급했듯, 영화의 실패는 토니에게 자아를 찾는 귀중한 경험이 된다.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아이들과 연인을 사랑하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임을 깨닫는다. 동물이 나오는 영화를 보려다 여의치 않자, 동물원에 가서 아이들과 즐기는 토니의 담백한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듯, 영화의 봉합은 예술과 삶에 대한 진지한 교훈으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예술을 표방하는 것도, 상업을 표방하는 것도 다 옳다. 그 둘을 구분짓는 것도, 구분이 없다 하는 것도 (현 시점에선) 다 옳다. 그러기에 일방적이고 성급한 결론은 오류를 낳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이런 담론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웃기면서 예술영화를 씹어대는 식의 전개만은 아니기에 더욱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되고, 이런 진지한 성찰은 비평이나 창조에 있어서 참고해야 할 하나의 의견이 될수 있음은 너무도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