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 안영학(부산, 29)은 참으로 독특한 존재이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 3세이며, 국적은 한국도 북한도 일본도 아닌 '조선'이다. 일본에서 조선학교(도쿄 조선고)를 나왔으며, 일반 입시로 대학(릿쇼대)에 입학했고, J리그 팀(니가타, 나고야)에서 활약했다. 또한 북한대표팀에서 뛰고 있으며, 2006년부터는 한국 K리그의 부산 아이파크에서 뛰고 있기도 하다.

자, 이만하면 '축구선수 안영학'이 얼마나 독특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접한 안영학은 평범한 축구선수일 뿐이다. 일부에서는 '한국과 북한, 일본'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그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 축구만이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전부이며, 그저 볼을 차는 것이 좋기 때문에 지금까지 축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축구로 인해 그는 평소 꿈꿔왔던 많은 것을 이뤘다. 태어나고 자란 일본에서 '조선인'의 신분으로 일본 최고 선수들만이 뛸 수 있는 J리그 무대를 누비고, 일본인들의 환호와 응원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대표팀'의 일원으로 월드컵예선에 참가하는 영광을 만끽하기도 했으며, 이뤄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프로 선수로 뛰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Part 1. 프롤로그
2001년, 당시 J2리그 소속이었던 알비렉스 니가타에 입단한 뒤, 2003년 팀의 J리그 승격에 일조했던 안영학은 2004년에는 일본의 축구 전문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전기리그 베스트11에 뽑히는 등 기량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J리그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하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2002년부터는 북한대표팀에 선발되었고, 그 해 9월에 열렸던 남북통일축구대회를 시작으로 독일월드컵예선 등에 참가하며 북한대표팀의 중심 미드필더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런 그가 2006년 1월, K리그의 부산 아이파크에 입단하게 됐다는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인 소식이었고, 전례가 없는 이 경우를 두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폭발적인 관심 속에 부산에 입단한 안영학은 그 해에 29게임에 출장해 3골-2도움을 기록했고, 무엇보다 빠르고 날카로운 패스웍과 성실한 움직임으로 부산 미드필드의 중추로 인정을 받았다. K리그 2년차였던 올해에도 30게임에 출장한 안영학은 4골을 기록하면서 여전히 부산의 중원을 책임졌고, 데뷔 연도에 이어 2년 연속 팬투표로 K리그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한국 축구팬들의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안영학의 한국 생활은 지난 9월 22일, 성남과의 경기에서 첫 위기를 맞이했다. 상대 수비수 김영철과 볼 경합을 벌이던 그는 상대의 팔꿈치에 콩팥에 손상을 입었고, 결국 1달이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부상 초기에는 선수생명도 위험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중상을 입었던 안영학은 10월 말에 퇴원을 했고, 다행스럽게도 선수생명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며 재활을 충실히 할 경우 다음 시즌 100%의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알렸다. 가벼운 운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재활을 준비하고 있는 안영학을 11월이 시작되기 얼마 전, 부산에서 만났다. 예의바르고 논리정연하게 질문에 답한 그는 부상에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본, 그리고 북한대표팀, 한국에서의 축구 인생에 대해 털어놨다.
Part 2. '선수생명 위기'라는 말까지 나왔던 부상과 회복
" 축구를 하다가 부상이 나올 수 있다. 서로 열심히 하다보니까 그런 것이고, 프로페셔널로서 경기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이다. 그러나 가끔은 서로를 보호한다기보다는 고의성이 있는 파울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완전히 늦은 타이밍에서의 태클 같은 것은 자제했으면 좋겠다. 함께 K리그에서 뛰는 동료로서 서로를 조금씩은 보호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 만나서 반갑다. 먼저 지금 몸 상태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어떤 상태인가?
현재는 80~90% 정도 회복됐다. 조금씩 걸으면서 가벼운 운동도 하고 있는 단계이다. 병원에서 최종적으로 CT 촬영을 했을 때 콩팥이 1/3 정도 터지고 출혈이 있었다고 했다. 가벼운 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을 하지 않아도 회복이 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1달 정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약도 먹으면서 치료를 받았다. 지금은 거의 나은 것 같다. 초기에는 언론에서 선수생명이 위험하다는 말까지 나왔는데, 그건 좀 오버된 보도였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웃음)
- 부상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나도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데, 볼 경합 상황이 끝난 직후에 상대의 팔이 옆구리를 쳤다. 그것 때문에 많이 아팠지만 경기를 계속 뛰었는데,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교체되었다. 맞았을 당시에도 충격이 느껴졌는데, 운이 없었는지 위험한 부위에 부딪쳐서 크게 다친 것 같다. 일부에서는 그 정도의 부상이라면 그 경기 이전에 콩팥이나 신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도 하는데, 그건 아니다. 전혀 문제가 없었다.
- 그 경기의 비디오를 본 사람들에 따르면 상대 선수의 고의성이 보였다고도 하던데.
나도 자세하게 본 것이 아니고, 나중에 비디오로 봤을 때도 화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100% 고의였다고는 판단하기 힘들고, 개인적으로는 고의성이 없었기를 바라고 있다.
- 사고를 당한 후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셨다고 들었다. 상대 선수나 팀에서 공식적인 사과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말이 많고...
어머니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아들이 크게 다쳤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화도 많이 났다. 그러나 100% 고의였다고 할 수도 없고, 아마도 그렇지 않았겠느냐는 정도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지금은 납득하고 있다. 다치지 말고 내가 피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식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은 몸도 많이 회복됐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구단이 알아서 할 테니까 나는 가만히 있자는 생각이다. 이번 일로 팬들도 많이 걱정하고, 분노도 많이 표시한 것으로 안다. 팬들에게 미안하다.
- 혹시 이전에도 상대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로 인해 위험스런 상황을 만난 적이 있었나?
몇 번의 위험한 상황이 있긴 했다. 경기하면서 적당한 타이밍으로 터프한 플레이를 하는 것은 당연히 괜찮은데, 문제는 한 템포 늦은 후에 시도하는 태클 등이다. 그런 부분이 K리그에 많이 있어서 힘들었다. 특히 작년에 처음 왔을 때는 그 부분을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다.
- 진단 결과는 좋게 나왔지만, 그럼에도 '과연 내가 100% 정상적인 몸으로 복귀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있었을 것 같다.
두려움은 조금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아예 움직일 수도 없었고, 크게 다쳤다는 진단도 있었으니까...그래도 많은 선수들이 큰 부상 후에도 강한 의지로 재활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기 때문에 나 역시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었다.
- 1달여 동안 병원에서만 생활했다. 정말 갑갑했을 것 같다.(웃음)
그렇다. 이렇게 장기간 병원에 입원했던 적은 처음이어서 정말 심심했다.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 했다.(웃음) 그래도 그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다. 이렇게까지 긴 시간에 걸쳐 나의 인생과 축구 등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없었다. 한번쯤 나의 축구와 인생을 돌이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다만 운동을 전혀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던 점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말 답답했다.(웃음)
- 이제 병원에서 퇴원을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몸을 만들어나갈 계획인지.
조금씩 조금씩 페이스를 올릴 것이다. 우선 걷는 훈련부터 하고 있다. 병원에도 가끔 들러서 진단도 받고, 회복단계를 확인하면서 서서히 훈련 강도를 올려 나가야할 것 같다. 병원에서는 한 달 안에 러닝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잘해줬고, 간호도 세심히 해줘서 회복이 빨랐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부상 관련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겠다. 마지막으로 K리그의 동료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축구를 하다가 부상이 나올 수 있다. 서로 열심히 하다보니까 그런 것이고, 프로페셔널로서 경기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이다. 그러나 가끔은 서로를 보호한다기보다는 고의성이 있는 파울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앞에서도 말했듯이 완전히 늦은 타이밍에서의 태클 같은 것은 자제했으면 좋겠다. 함께 K리그에서 뛰는 동료로서 서로를 조금씩은 보호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Part 3. 일본에서의 안영학
" 고교를 졸업한 뒤 1년간 재수를 했는데, 그 기간에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때 내가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역시 축구를 하고 싶다.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프로축구선수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축구를 대하게 됐다. "
- 이제 예전 이야기들을 해보자.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축구 선수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고 들었다.
당시에 나는 도쿄 조선고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재일교포들이 참가하는 대회에는 나갔었지만, 큰 규모의 대회는 참가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축구를 즐기면서, 축구가 좋아서 열심히 했던 시절이다. 그 당시에는 뚜렷하게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막연하게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냥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축구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 처음 축구를 시작할 무렵에 축구 만화인 '캡틴 쯔바사'를 즐겨봤다고 들었다. 이것이 축구선수를 하기로 결심하는데 영향을 미쳤나?
그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세대의 선수들은 모두 그 만화를 즐겨봤고, 그 만화를 보면서 축구의 즐거움 등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만화와 실제의 축구는 차이가 있다. 만화는 현실에서 나오기 힘든 더 화려한 플레이들이 펼쳐진다. 그렇지만 축구의 즐거움은 똑같은 것 같다.
- 1996년부터는 고교대회 참가가 허락됐다고 들었다.
고교 2학년 때부터 인터하이(전일본 전국고교체육대회) 참가 자격을 얻었고, 3학년 때부터는 전국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전력이 약해서 본선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는데, 예선에서 경기를 치르면서도 많이 떨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그런 무대는 처음이었고, 우리에게는 너무 큰 무대이기도 해서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 대학도 일반입시로 들어갔다. 당시에는 축구선수로서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축구로서는 스카웃을 받지 못했다. 큰 대회에 참가한 적도 없었고, 내가 고교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뛰어난 선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갔다. 고교를 졸업한 뒤 1년간 재수를 했는데, 그 기간에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 때 내가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은 '역시 축구를 하고 싶다.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그 때 처음으로 프로축구선수가 되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축구를 대하게 됐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엄청 늦은 타이밍에 목표를 잡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재수 시절에도 축구를 정말 열심히 했고, 대학에서의 4년간 오직 축구만을 생각하며 엄청나게 훈련을 했던 기억이 난다. 
" 니가타는 엄청난 팬들을 자랑한다. 매 경기마다 4만명이 넘는 서포터들이 경기장을 찾아서 응원해줬다. 그런 팬들의 열광적인 후원이 내가 더 열심히 축구를 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니가타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 선수로서는 정말 행복했던 기억이다. "
- 릿쇼대를 마치고 2001년에 알비렉스 니가타에 입단하게 된다. 프로팀에서 제의가 왔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내가 다니던 릿쇼대의 축구 수준은 2부나 3부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에 들어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대학 3학년 때였는데, 당시 4학년 주장 형을 보러 니가타의 강화부장이 왔었다. 그 때 내가 좋은 플레이를 했는지 니가타 훈련에 한번 참가하러 오라고 제의하셨다. 그래서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니가타와 계약을 했을 때에는 정말 기뻤다. 꿈만 같았다. 더군다나 어머니도 내가 축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셨었다. 아무래도 불안정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축구선수로서 프로 계약을 맺게 되니까 응원하시겠다며 기뻐해주셨다.
- 처음 접해본 프로의 세계는 어땠는가?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를 하고 들어갔음에도 결코 쉽지 않았다. 선수들 수준 등 모든 면에서 한 단계씩 높았다. 주위 환경이나 생활적인 면에서는 거의 문제가 없었지만, 경기장 위에서는 내가 생각해도 문제가 많았었다. 반면 책임감도 많이 생겼다. 학생시절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제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였기에 책임감이 더욱 강해졌다. 운동장 안에서도, 그리고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로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가슴에 새기고 운동을 했다.
- 니가타에서의 안영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니가타에서는 다른 것 없이 열심히, 악착같이 경기를 했다. 화려한 플레이는 없었고 그냥 열심히 했을 뿐이다. 축구를 좋아하고, 프로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뛰었던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니가타에서 오랜 기간 프로 생활을 했던 선배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고, 그 선배들을 보면서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또 이런 점도 있었다. 알다시피 니가타는 엄청난 팬들을 자랑한다. 매 경기마다 4만명이 넘는 서포터들이 경기장을 찾아서 응원해줬다. 그런 팬들의 열광적인 후원이 내가 더 열심히 축구를 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니가타에서 축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축구 선수로서는 정말 행복했던 기억이다.
- 2003년에 니가타가 드디어 1부리그로 올라갔다. 그리고 2004년에는 사커 다이제스트에서 선정한 전기리그 베스트11에도 뽑히는 등 상승세가 이어졌는데.
승격에 성공해 1부리그에서 뛸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뻤다. 그리고 2004년에 전기리그 베스트11에 뽑혔을 때는 직접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잡지에서 선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잘 몰랐다. 소식을 듣고는 기쁘고 영광스러웠다. 일본에서 사커 다이제스트는 사커 매거진과 함께 가장 유명한 축구잡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해에 내가 항상 주전으로 뛰었던 것은 아니고, 항상 경쟁을 하고 있었다. 경기에 선발로 나서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있었던 적도 있고, 부상으로 인해 아예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매 순간마다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 같고, 그것이 인정받은 것 같다.
- 니가타에서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이던 중에 2005년에 나고야로 이적하게 됐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2004년에 조선 대표팀의 일원으로 독일월드컵예선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한 단계 높은 팀으로 가서 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고야 그램퍼스와 이야기가 되어 이적하게 됐다. 당시 나고야가 니가타보다 전체적인 수준이 조금 높았고, 명문이었다. 또한 일본 대표 선수들도 있었고...그런 환경에서 나를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는 심정으로 옮겼다.
- 나고야에서 1년간 뛰었는데.
처음에는 좋았다. 경쟁을 통해 주전 자리를 잡았고, 개막전부터 선발 출장했다. 초반 팀 성적도 좋아 2-3위권을 유지했었다. 그런데 내가 대표팀과 팀을 병행하면서 피로골절이 왔고, 그것으로 인해 3-4개월 정도를 쉬어야 했다. 관리를 좀 더 철저히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내 책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나고야에서 더 보여줄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지금 돌이켜봐도 많이 아쉽다.
Part 4. 안영학, 북한대표팀의 일원으로도 자리잡다.
“대표팀의 일원으로 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기회였다. 더군다나 한국 대표팀과 경기를 치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당시 니가타에서 뛰면서 2002월드컵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한국이 4강에 갔을 때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목청껏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런 팀과, 조선대표팀 선수로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 이제 대표팀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2002년에 처음으로 합류한 것으로 안다. 당시 이야기를 해본다면.
당시 니가타에 입단해서 뛰고 있을 때였는데, 2002월드컵이 끝난 뒤 9월에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있었다. 그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합류 요청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뻤고, 영광이었다. 대표팀의 일원으로 뛸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기회였다. 더군다나 한국 대표팀과 경기를 치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 당시 니가타에서 뛰면서 2002월드컵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한국이 4강에 갔을 때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너무나 기뻐서 목청껏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런 팀과, 조선대표팀 선수로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웃음)
-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대표팀에 합류하는 것이 일본 현지에서는 환영받지 못할 결정이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런 것은 없었다. 오히려 니가타 팬들은 갔다 오라고 축하해줬다. 평양으로 떠나기 전에 있었던 니가타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경기 후 팬들이 내 응원가를 불러주면서 축하해줬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 없이 평양으로 갈 수 있었고, 그런 팬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처음에 소집되어 평양으로 갔을 때는 아무래도 팀 동료들과 조금 서먹서먹한 면도 있었을 것 같다. 당시를 회상해본다면.
처음에 내가 초청을 받았을 때, 원래 도착 날짜보다 조금 늦게 가게 됐다. 리그가 한창 막바지였고, 1부리그로 승격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경기를 빠질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겨 며칠 늦게 평양으로 가게 됐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멤버가 다 정해져있었고, 왜 지금 왔느냐는 꾸중도 들었다. 중간에 늦어지는 것에 대한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문제가 조금 생긴 상태였다. 그래서 결국 처음 2~3일 동안은 팀 훈련에 합류하지 못하고, 나와 인솔 선생님 둘이서 운동을 하고 그랬다.(웃음) 그 이후에 슛이나 패스 등에 대해 테스트 형식으로 훈련을 받으면서 조금씩 합류하게 되었고, 체력 테스트도 다른 선수들과 같이 받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인정을 받으면서 한국에서 열린 남북통일축구대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경기는 5분 정도밖에 뛰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웃음)
- 당시 일본에서 온 선수는 리한재와 안영학 선수 둘 뿐이었다고 들었다. 서로 의지가 됐을 것 같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것보다는 한재가 있었기 때문에 의지가 되었다. 서로 이야기도 나누면서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은 있었다. 밥을 먹을 때 보통 4명씩 앉아서 먹는데, 나와 한재가 항상 같이 있으면 다른 선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한재에게 다른 테이블에서 먹으라고 이야기하는 등 일부러 따로 앉아 먹곤 했다. 모든 선수들과 빨리 친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면 남북통일축구대회를 통해 대표팀에서도 하나가 됐다는 느낌을 받은 것인가?
솔직히 그 때까지는 아직 하나가 됐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여러 차이가 있었으니까... 정말 하나가 됐다고 느꼈던 것은 2004년에 있었던 독일월드컵예선 태국과의 경기에서였다. 당시 내가 골을 넣었는데, 모든 동료들이 몰려와 나를 축하해주고, 같이 기뻐해줬다. 감독 선생님도 인정해주셨고...처음으로 ‘내가 대표 선수가 됐구나’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 때부터 ‘조선대표팀 선수’라는 인식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 북한 대표팀의 일원으로 한국이나 일본과 경기를 뛸 때의 감회도 남달랐을 것 같다.
사실 남북통일축구대회 때는 거의 뛰지 못했기 때문에 특별히 감회를 느끼지는 못했고, 솔직히 불만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니가타에서 중요한 경기를 빠지고 대표팀에 왔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내 자신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해야할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순간이었다. 독일월드컵예선에서 일본과 경기할 때는 정말 감회가 남달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일본에서 조국의 유니폼을 입고 국가를 들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축구를 통해 경기를 한다는 것이 벅찼다. 더군다나 당시 경기장에는 5천명이 넘는 교포들이 와서 응원을 해줬다. 그 때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Part 5. 할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새로운 시작
“언젠가 한번쯤은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만 막연히 했을 뿐이다. 설마 실제로 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제의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나이나 타이밍 등을 감안하니까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놓치면 한국에서 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가기로 결정했다.”
- 나고야에서 1년을 뛴 다음에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행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고야에서 뛰던 2005년 가을 쯤에 한국의 프로팀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한국에서 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냥 언젠가 한번쯤은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만 막연히 했을 뿐이다. 설마 실제로 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제의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나이나 타이밍 등을 감안하니까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놓치면 한국에서 뛸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가기로 결정했다.
- 북한 대표팀 선수가 한국에서 뛰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입단 과정이 매우 복잡했다고 들었다. 한국행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은데.
한국행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어려운 일들은 조금 겪었다. 제일 큰 문제는 역시 조선대표 문제였다. 재일본조선인축구협회를 통해 한국에 가면 대표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선대표로는 꼭 나가고 싶었다. 할아버지 고향도 전라도라 한국에서는 꼭 뛰어보고 싶었고, 조선대표로도 계속 뛰고 싶었고...상당히 힘든 시기였다. 그렇지만 주위 분들이 잘 도와주셔서 그런 문제가 잘 해결됐다. 모두들 잘 이해해주셔서 한국까지 올 수 있었다.
- 부산에 처음 합류했을 때 축구 외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축구선수로서 그 점에 대해 부담스럽기도 했을 것 같다.
그렇다. 처음에는 나도 놀랐다. 이렇게까지 크게 보도하고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래도 내가 처음이고, 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다면 다음에 오는 후배들은 좀 더 쉽게 한국에서 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견뎌낼 수 있었다.
- 부산의 팀 동료들도 조심스럽게 접근했을 것 같은데.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다. 그런데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선수들과 만날 때 항상 느끼는 그런 부분이었다. 내가 나고야에 처음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서로 볼을 차고, 축구를 통해서 마음이 오고가면서 금방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또 부산에는 착한 선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적응이 더욱 쉬웠던 것 같다.(웃음) 특히 이장관 선수가 많은 도움을 주셨다. 형들 모두가 잘 챙겨줬지만, 그 중에서도 이장관 선수는 처음에 말을 걸어주시면서 “영학아, 어려운 일 있으면 형에게 편하게 말해라”고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강진이가 일본에서 같이 온 것도 도움이 됐다. 강진이도 나와 같은 에이전트와 계약하고 있어서 일본에서부터 잘 알고 있었고, 또 강진이가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뛰어봤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한국의 문화 등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가르쳐줬다.

- J리그에서 뛰다가 K리그로 왔는데, 아무래도 다른 스타일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또한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일본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 같은데.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같은 리그라도 팀마다 수준이 다르고 팀 컬러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원이나 성남 같은 팀과 하위권 팀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J리그가 좀 더 아기자기하고 패스 위주의 플레이를 하고, K리그는 좀 더 강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력이 돋보이는 특징이 있긴 하다. 무엇보다 한국에 와서 가장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은 태클에 대한 부분이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타이밍이 어긋난 상황에서의 태클 등으로 인해 잦은 부상도 입는 등 1년째는 조금 힘들었다. 그래도 K리그에서 꾸준히 뛰다보니까 조금씩 익숙해지고, 몸이 스스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2년차였던 올해에는 그런 태클로 인한 부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환경적인 면에서는 내가 부산에서 2년간 뛰었는데, 클럽하우스나 기타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 등에서 J리그의 1부리그 팀들과 비교해도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다만 리그 운영이나 체계 면에서는 J리그가 잘 갖춰져 있다. 또한 선수협회가 있어서 가끔씩 정기적으로 선수들과 심판, 협회, 변호사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 나누고, 개선방향을 찾아간다. 그런 모습이 J리그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 예전부터 계속해서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뛰고 있는데, 일본과 한국에서 요구하는 역할이 다른가?
그것은 나라보다도 감독에 따라 전부 다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모든 감독들이 많이 뛰고, 수비에 가담해주고, 공격으로 나아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기를 요구했다.
- 그 위치는 수비적인 역할이 매우 중시된다. 조금 마른 체구여서 선수들과의 경합이나 몸싸움 등에서 밀리는 느낌은 없는가?
특별히 그런 것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몸싸움에서도 약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태클도 많이 하는 편이다. 수비에 대한 부담은 없다. 다만 어려웠던 것이 있다면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들에게 대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경합이나 몸싸움 등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좀 더 공격적인 포지션에서 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혹시 그런 욕심은 없는지?
물론 공격도 하고 싶다. 축구를 하는데 있어 특정한 포지션보다도 공격도 하고 싶고, 수비도 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피치 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싶다.(웃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내가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고, 팀을 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도 특별히 공격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판단해서 좋은 타이밍에 공격에 가담하곤 한다. 상황을 봐서 치고 올라가거나 뒷 공간을 노리는 등의 플레이를 스스로 판단해서 앞으로도 계속 해나갈 것이다.

“니가타는 말할 것도 없고, 나고야 역시 홈경기에서 항상 1만명 이상이 운집하곤 했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경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관중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응원하러 모이는 분들이 보였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항상 ‘최강 부산’이라고 소리질러주시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0-3, 0-4로 지고 있더라도 90분 휘슬이 울릴 때까지 전력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 한국에 온 지도 2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세월 동안 즐거웠던 순간이나 슬펐던 순간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축구 중심의 생활을 하다 보니까 즐거웠던 순간이나 슬펐던 순간 모두 축구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역시 경기에서 승리한 순간이다. 경기에 이기고 동료들과 같이 기뻐하고, 팬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순간들이 즐겁다. 또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축구로 맺어진 분들 외에도 많은 분들이 나를 응원해주셨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위의 식당 분들도 그렇고 여러 주위 분들이 진심으로 나를 아껴줬다. 그런 순간을 접할 때마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슬펐던 순간은 역시 경기에서 패했을 때이다.(웃음)
- 그렇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어떤 경기인가?
부산에서 승리한 적이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긴 경기들은 거의 기억하고 있다.(웃음)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작년 4월에 있었던 수원과의 경기이다. 원정 경기였지만, 부산의 좋은 점이 다 나온 한판이었고, 결국 4-1로 대승을 거뒀다. 나 자신도 경기 전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대로 플레이가 그대로 나와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 방금 부산에서 승리한 적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팀 전체가 패배의식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나?
항상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고, 비기거나 지고 그러다보니까 선수들 분위기도 처졌던 것은 분명하다. 분위기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성적이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다음날 운동장에 오면 선수들이 다시 한번 잘해보자고, 집중하자면서 임하는 분위기는 괜찮았던 것 같다.
- 혹시 J리그를 떠나 K리그로 온 것에 대해 후회했던 적은 없는가?
한국에 와서 축구를 하는 동안에는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이런 것은 있다. 내가 일본에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현역에서 은퇴할 때는 프로축구선수로 출발했던 니가타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다.
- 니가타나 나고야에서는 엄청난 서포터들 속에서 경기를 뛰었다. 아무래도 부산에서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많이 아쉬웠던 것이 사실이다. 니가타는 말할 것도 없고, 나고야 역시 홈경기에서 항상 1만명 이상이 운집하곤 했었다. 그 시절과 비교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경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관중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항상 응원하러 모이는 분들이 보였다. 그리고 썰렁한 경기장에서, 성적도 좋지 않은 부산을 계속 응원해주는 팬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관중도 별로 없고, 성적도 좋지 않은 팀을 응원하겠냐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니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항상 ‘최강 부산’이라고 소리질러주시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나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0-3, 0-4로 지고 있더라도 90분 휘슬이 울릴 때까지 전력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경기에 임할 수 있었다.
- 부산 경기를 보면 가끔 안영학 선수를 응원하는 일본 팬들도 볼 수 있다.
가끔씩 니가타나 나고야에서 응원하러 오신 팬들이 계시다. 시간이 되면 경기 후에 같이 식사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내가 팬 입장이어도 한국까지는 못 올 것 같은데, 직장도 있고, 가정도 있는 분들이 그렇게 와주시는 것을 보면 항상 고마울 따름이다. 그 분들은 내가 축구선수로서 갖고 있는 꿈이 있는데, 그 꿈을 실현할 때까지 응원해주겠다고 약속하신 분들이다. 나도 그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전력을 다한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 한국에서 뛰면서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선수가 있다면.
올해는 단연 까보레인 것 같다. 정말 대단한 선수이다. 마치 티에리 앙리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유연하고 빠르고 결정력도 있다. 미드필더 중에서는 김남일 선수를 꼽고 싶다. 수원 경기가 있으면 항상 챙겨 보면서 김남일 선수의 플레이를 보고 뭔가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플레이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경기의 포인트를 잡고 있고, 여유도 있다. 그리고 김두현 선수 역시 공격력이 있는 미드필더로 아주 인상적이다. 역시 대표 선수들이 잘하는 것 같다.

- 2년 연속 K리그 올스타에 팬 투표로 선정된 것도 대단한 일이다. 어떤 느낌이었나?
올스타 역시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2년 연속 팬 투표로 뽑혔는데, 부산이 인기팀이 아님에도 그렇게 투표해주신 것에 대해 정말 기뻤다. 그리고 K리그의 스타 선수들과 같이 즐겁게 경기를 뛸 수 있었기 때문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올스타전이 열렸을 때는 일본에서 가족들도 모두 와주셨고, 내가 스타 선수들과 함께 뛰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 인터뷰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축구선수로서 가까운 목표와 멀리 내다본 목표가 있다면.
우선 가까운 목표는 몸을 빨리 단련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회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상 이전보다 더 성장한 모습으로 경기장에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멀리 내다본 목표는 역시 축구선수로서 최고 무대인 월드컵에서 뛰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 무대에서 뛰는 것 역시 꿈이다. 큰 무대에서 뛰는 것이 내 꿈이고, 앞에서도 이 꿈을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서라도 항상 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열심히 할 생각이다. 사실은 이번 겨울에 유럽으로 테스트를 받으러갈 계획도 갖고 있었다. 아직은 안영학이라는 축구선수는 기다리고 있으면 유럽에서 알아서 제의가 올 만한 선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테스트도 받으러 갈 계획도 있었다. 약간 늦춰지는 것이지만, 도전은 계속 할 생각이다. 실패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꿈을 위해서 도전은 계속 할 것이다.
- 긴 인터뷰 감사하다. 빨리 100%의 몸 상태로 피치에 복귀하기를 바란다. 내년 시즌을 기대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