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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레이크 디스트릭스

김윤지 |2008.01.03 16:21
조회 102 |추천 2
[유럽을 걷다]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上)-워스워드의 고향을 찾아서
여기는 영국. 나라 전체가 거대한 트레일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도보여행의 천국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런 영국에서도 ‘도보여행자들의 고향’을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호수 지방이라고 답한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깊은 계곡,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산빛과 물빛이 고운 그 미색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걷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워스워드나 요절한 시인 키츠와 셸리, 러스킨 등의 시인과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산길과 호숫길, 능선길, 계곡길, 마을길들이 전방위로 펼쳐져 소요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뜨린다.

오전 11시에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을 출발한 버스는 이곳 저곳을 경유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앰블사이드(Ambleside)에 나를 내려놓았다. 앞으로 1주일간 트레킹을 위해 내가 머물 마을이다. 미리 예약해 놓은 비앤비(Bed and Breakfast)로 가니 주인 케이트가 환한 미소로 맞아준다. 영국의 비앤비는 방 4~5개를 넘지 않는 작은 규모와 아침식사가 제공되는 점이 상업적 숙소라기보다는 가정집이라는 느낌을 준다.

다음날 아침 관광안내소로 가 엽서 몇 장과 오늘 걸을 페어필드산(873m)의 지도를 구입했다. A591도로를 따라 앰블사이드를 빠져나온다. 10월 말의 영국 날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빛이 아름답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가고, 햇살이 투명하게 빛난다. 들판에서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30분쯤 도로를 따라 걷다가 라이달 홀(Rydal Hall)로 향하는 길로 들어선다. 길가에 ‘Action for Blind People’이라고 적힌 차가 서 있다. 차 옆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몇 마리의 맹도견이 얌전히 앉아 있고,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이들도 있다. 오늘 산책을 나온 저 맹인들도 보진 못해도 느낄 수는 있겠지. 알싸한 공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눈가에 감기는 햇살의 따사로움, 발밑의 부드러운 흙을. 나는 괜히 마음이 흐뭇해져 싱글거리며 라이달 마운트(Rydal Mount)로 들어선다.

이 곳은 워스워드가 181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37년을 살았던 곳이다. 매물로 나온 이 집을 워스워드의 고손녀가 구입한 게 1969년. 그 이후 워스워드가 쓰던 가구와 유품으로 집을 꾸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회칠을 한 흰 건물은 16세기에 지어진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770년에 태어나 1850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죽은 지 150여년이 지났는데 그가 쓰던 침대와 옷장 같은 가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심지어 그의 여권과 작은 소풍가방이며 스케이트도!). 사소한 것, 낡은 것도 버리지 않고 보존해 관광자원으로 삼는 데 영국 사람들만큼 뛰어난 이들이 또 있을까. 워스워드가 시를 쓰곤 했다는 작은 방의 창문으로는 푸른 호수의 끝자리와 정원의 나무들이 가득 담겨온다. 열성적인 정원 설계자였던 워스워드는 5000평이나 되는 이 정원의 모든 나무와 꽃들을 세심하게 심고 가꾸었다고 한다.

정원을 잠시 거닐다 집을 나와 페어필드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페어필드는 워스워드가 무수히 오르내렸던 산으로 오늘 나는 한쪽 능선을 타고 페어필드산 정상으로 간 후 반대편 계곡의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페어필드 호스슈(Fairfield Horseshoe) 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길은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올라갈수록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져 걸음이 늦어진다. 앰블사이드와 윈더미어 호수와 주변 숲이 그림처럼 늘어선 모습에 감동해 사진을 찍고 있자니 지나가던 할아버지들이 말을 걸어온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지?” 30년 도보여행 친구라는 이안과 헤럴드 할아버지다. 헤럴드 할아버지는 국립공원 자원봉사자로 쓰레기를 주우며 걷고 있다. 이 지역의 예측불가능한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순간,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얼음 우박이 쏟아진다. “이게 바로 윈터 샤워(winter shower)야”라며 웃는 헤럴드 할아버지. 변덕스러운 날씨가 증명된 데 대해 뿌듯해 하시는 표정이다.

할아버지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 정상에 도착한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금세 추위가 몰려온다. 파카를 꺼내 입고 돌무덤 사이에서 할아버지들과 점심을 먹는다. 헤럴드 할아버지는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과 김일성의 이름을 기억한다.

지도 위에 내 이름을 영어와 한글로 써달라고 하셔서 추위에 곱은 손으로 써드렸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안 할아버지께는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이안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말한다. “이 맑은 공기 좀 마셔봐. 깊이 숨을 들이마셔보라고.” 할아버지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과 상기된 볼로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 같다. 비 그친 동편 하늘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이안 할아버지가 짧은 감탄사를 뱉으며 말한다. “저기 무지개 좀 봐. 얼마나 어여쁜지!” 천진한 감수성이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가슴 뛰노나니 나 어렸을 적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니….’ 워스워드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스콘과 사과 한 알, 초코바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할아버지들과 작별하고 돌아선다. 할아버지들은 계속 산을 넘어 반대편으로 내려가고, 나는 돌무덤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 반대편 능선으로 하산을 시작한다. 호수를 넘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가을햇살이 어깨에 내려앉는 오후다. 물빛은 곱고 산세는 넉넉하다. 돌담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호수를 바라보며 줄곧 내려온다. 눈부신 날씨만큼이나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다음날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개었다. 오늘은 앰블사이드에서 러프릭 테라스(Loughrigg Terrace)를 거쳐 그라스미어 호수로 갔다가 그곳에서 코핀 루트(coffin route)를 지나 앰블사이드로 돌아오는 4시간의 여정이다. 시내에서 공원을 지나 호젓한 길을 따라가면 라이달 워터(Rydal Water)가 나온다. 이 지역의 호수들 중 가장 작아서 ‘스케이트 연못’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지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품고 있는 호수다.

라이달 동굴을 거쳐 러프릭 테라스에 이르면 그라스미어 호수와 주변 산들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우리의 호반도시 풍경과 비교한다면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로 단아하다. 전통적인 잉글랜드 양식으로 지어진 오래된 돌집들과 돌담, 돌다리들이 풍경에 무게와 역사감을 더한다. 조화를 깨며 제멋대로 지은 집이라고는 한 채도 없다.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도 없애고, 낡은 것은 뒤처지는 거라며 무조건 새것을 선호하며 살아온 우리와 어쩌면 이렇게 다른지.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빼어난 풍경에 감탄하며 한가로이 호수를 따라 걸으니 그라스미어 마을이다.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지만 이곳 역시 단정한 얼굴을 잃지 않고 있다. 성 오스왈드 교회의 뜰로 가 워스워드와 가족들의 묘를 둘러본다. 이 마을에도 워스워드가 살던 집이 있다. 그가 1799년부터 1808년까지 살았던 도브 코티지(Dove Cottage). 워스워드는 이 마을을 산책하다가 여관이던 이 집이 매물로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다. 그는 이 곳에서 정신적, 시적 반려자인 누이동생 도로시와 함께 살면서 그의 생애에서 가장 훌륭한 시로 꼽히는 ‘서정소곡집’ ‘서곡’ 등을 썼다. 또 개인적으로도 누이의 친구인 메어리 허친슨과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는 등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지금은 이 집 앞으로 다른 집들이 늘어서 시야가 가려졌지만 워스워드가 살던 당시에는 이 집에서 그라스미어가 한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 집은 그의 생존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벽난로의 장작이 활활 타오르는 거실이 어두우면서도 안온한 분위기를 풍긴다. 부엌이나 식당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그 시절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좋다. 집 옆의 박물관에는 그의 육필 원고들과 옷과 양말, 우산 같은 소지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계도도 그려져 있고, 워스워드의 초상화와 조각들, 그의 시를 낭송해주고 설명해주는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까지 갖춰져 있다.

도브 코티지의 티 룸에서 뜨거운 박하차를 시켜놓고 잠시 쉰다. 영국을 여행하는 일의 즐거움은 작은 마을에서도 이렇게 ‘티 룸’이라고 이름 붙은 카페를 만난다는 점이다. 카페는 편안하고 아늑하다. 박하차 한 잔에 얼었던 몸이 녹는다. 오전의 눈부신 햇살은 사라지고 빗방울이 조금씩 들고 있다. 날이 저물고 있다. 10월의 하루가 저물 때면 한 해가 저무는 듯한 상실감이 든다. 워스워드의 ‘초원의 빛’을 떠올려본다.

‘초원의 빛이여 / 꽃의 영광이여 // 다시는 그것이 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러워 말지니 /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찾으소서.’

오늘 내가 누린 이 날이 다시는 돌려지지 않는 한 순간이라 해도 서러워 말자. 지나간 것은 지나간 그대로 아름다웠다고, 그것으로 충분한 거라고, 긍정하자. 나는 계절의 절정에서 오늘을 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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