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비도시>를 본 뒤 쓴 리뷰 끝에 <우생순>마저 실망시키는 영화가 된다면 정말 펑펑 울어버릴 것 같다고 썼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래도 믿는다. 임감독님이니까..."그 믿음의 이유는 사실 별 거 없다. 임순례 감독은 직접 만난 몇 안 되는(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군. 변영주 감독과 임순례 감독밖에 없으니. 아, FTA반대 집회현장에서 스치듯 마주친 장준환 감독도 있군. ㅋ) 감독이고, 직접 눈빛을 보았을 때 신뢰가 갔고, 무엇보다도 그이의 전작들(<세 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 <여섯 개의 시선> 중 <그녀의 무게>)에서 보여준 마이너적 감수성, 그 중에서도 <그녀의 무게> 마지막 장면에 보너스 컷처럼 집어넣었던 "아줌마" 장면 때문이었다.
사실 그 장면은 보너스 컷이라기보다는 영화의 주제를 응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영화촬영을 한창 하고 있는 임순례 감독과 스텝들에게 웬 껄렁껄렁한 아저씨가 다가와 신기한 듯 "영화 찍는 거냐?"고 물어보며 시비를 걸다가, 다른 남자 스텝이 아니라 정말 외모도 순도 100% 아줌마인 임순례 감독이 감독이란 걸 알고는 "이 아줌마가 감독이야?" 하며 어이없어하면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여자가 감독이라는 것, 그것도 그냥 여자가 아니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세련된 커리어우먼이 아니라, 몸매 펑퍼짐한 아줌마가 감독이라는 것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믿고 싶지 않는, 현실에서는 실재하기 어려운 대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던 짧은 장면이었다.
그리고 <우생순>을 보면서 울었다. 실망스러워서가 아니라, 별것 아닌 내 믿음에 답해준 임순례 감독에게 고마워서, 아줌마 감독에 대한 아줌마(?) 관객의 믿음에 아줌마들의 연대로 대답해 주어서.
*이 영화는 앞으로 많은 분들이 보실 것이 예상되므로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쓰기 위해 노력하기는 하겠으나, 뜻대로 안 될 수도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혹여 스포일러 가 영화관람에 방해가 되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을 패스해주시는 센스!
아줌마의 힘, 마이너들의 연대, 세상을 울리다
나야 스포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사람들이 그런다. 스포츠영화란 게 뻔하단다. 긴장 만빵인 경쟁구도, 스펙터클 만빵인 경기장면, 주인공의 감동 만빵인 고난극복 스토리.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뽑을 수 있단다. 그런데 그걸 뽑으려면 장면도 장면이고 배우도 배우인지라 돈이 많이 든단다. 그래서 <우생순>은 기적같은 영화란다. 제작비 35억으로는 원래 스포츠영화 못 만든단다.
스포츠영화란 승부의 영화다. 하기에 경쟁구도와 경기장면, 고난극복 스토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러나 <우생순>은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영화가 아니다. 여기서 승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라이벌 간의 경쟁보다는 공감과 연대가 중심 줄거리이고 고난은 극복되지 않은 채 여전히 계속된다. 경기결과 역시 이미 지난 아테네 올림픽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우생순>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빼어난 인물의 고군분투가 아니라, 남편이 진 빚 갚느라 비정규직 노동자로 하루하루 노동해야 하든 올림픽 끝나면 당장에 실업자가 되든 남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성질 부리며 공 대신 밥공기를 던져야 하든 이래저래 퇴출당한, 혹은 앞으로 퇴출당할 것이 뻔한 인간들의 "관계 맺기"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 주인공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주인공이 없다. 물론 포스터에는 문소리, 김정은, 엄태웅 트라이앵글 구도로 찍은 사진이 떡, 하니 박혀 있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 세 사람은 주인공이 아니다. 굳이 주인공을 꼽자면 미숙, 혜경, 감독, 정란, 수희, 보람, 진주, 현자 등 국가대표팀과 이들을 키웠던 송감독, 미숙의 아들과 남편, 정란의 남편과 설렁탕집 종업원, 핸드볼협회의 간부들, 심지어 마지막 덴마크전 중계를 했던 최승돈 아나운서와 카메오 출연이었던 마트의 류승수, 맞선남의 하정우까지, 크레딧에 실렸던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러고 보면 배우 입장에선 이 영화 참 별로인 영화겠다. 영화 한편에 세계스타로 등극하기도 하는데 배우가 전혀 살지 않는 영화이니. ^^)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들이 맺는 관계들이다. 오랜 라이벌이었던 미숙과 혜경이 누구보다도 든든한 동지(!)가 되기까지의 관계맺기, 미숙과 정란, 수희의 친자매와 같은 관계맺기, 이 아줌마 선수들과 보람이, 진주, 현자같은 어린 선수들 사이의 세대를 뛰어넘는 관계맺기, 이들 선수들과 저만 잘난 줄 알던 엘리트 감독과의 관계맺기, 미숙과 남편, 아들의 관계맺기, 이들 세대를 자식처럼 키운 송감독과 이들의 관계맺기, 금슬 좋은 정란 부부의 관계맺기 등 숱한 관계와 관계들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생순>이라는 천을 엮어간다.
선수촌 초기시절 국대씩이나 돼서 고딩들에게 패한 뒤 코치가 연거푸 실책을 거듭한 선수를 타박할 때, 감독대행에서 선수로 전락한 혜경이 말하지 않았던가. "핸드볼은 팀경기다. 핸드볼에서 누구 때문에 지고, 누구 때문에 이기는 게 어디 있냐?"
그렇다. 이 영화는 특정한 선수 개인, 혹은 지도자 개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팀워크에 관한 영화다.
하기에 앞서 했던 말을 번복해야겠다.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스포츠영화다. 핸드볼을 다루면서 핸드볼의 핵심인 팀워크를, 현미경을 들이댄 듯 섬세하게 그려냈으니, 스포츠영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으나 스포츠 핸드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영화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관계의 최고형태는 입장의 동일함"
물론 팀워크가 필요한 스포츠가 어디 핸드볼뿐이겠는가. 축구도 그렇고 농구도 그렇고 배구도, 야구도, 모든 팀스포츠가 팀워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핸드볼이, 그것도 우리나라 핸드볼이, 그것도 우리나라 여자핸드볼이 가지는 팀워크의 의미는 여타 다른 팀스포츠의 팀워크와는 질이 다르다.
핸드볼이 스포츠계에서 얼마나 찬밥신세인지는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올림픽이 끝날 때마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따고도 그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도 뛰어야 할 팀이 없어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그래서 올림픽이 끝나면 생계 걱정부터 해야 한다. 어릴 적부터 핸드볼밖에 아는 게 없던 선수들이 핸드볼 바깥 세상으로 내던져졌을 때 그들이 감수해야 하는 절망과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그렇게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군상들의 팀워크는 그저 "힘을 합쳐 이기자"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안다. 옆의 경쟁자가 무엇 때문에 절망하는지, 무엇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지, 무엇 때문에 활짝 웃는 미소 뒤에 씁쓸함이 머무는지... 옆사람의 고통은 이미 자신이 겪고 있거나 겪었거나 혹은 앞으로 겪을 고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숙의 퇴촌을 막으려는 혜경에게 감독이 "예전엔 미숙을 질투하지 않았냐"고 비웃듯 말하지만, 혜경은 말한다.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고 살아보니 알겠다"고, "너는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라고. 경쟁자는 경쟁자일 수 없다. 고통의 공유, 상처의 공유만큼 큰 팀워크는 없다.
이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린 장면이 어디 한두장면이겠냐마는 고딩들과의 평가전에서 삽질하던 현자가 생리하는 것을 감춰야 했던 장면에서 처음 울었다. 그리고 그 뒤에 매순간 캐발랄로 일관하던 정란이 정색을 하고 "생리 조절한다고 호르몬제 먹지 마라. 내꼴 난다"고 후배들에게 반협박조로 뇌까릴 때 눈물은 그치지 않고 흘렀다.
신영복 선생님이 <나무야 나무야>에서 말했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여자 핸드볼 국대팀의 팀워크는 입장의 동일함이다. 그것은 경기의 승리라는 목표의 동일함을 뛰어넘는 관계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없다. 그러나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여자 핸드볼 국대팀은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줌마들 때문에 골머리썩다가 그 아줌마들 때문에 결승까지 오른 감독은 덴마크와의 결승전 승부던지기를 앞두고 멋지구리하게 말한다. "설사 경기에서 지더라도 울지 말자. 우리는 이미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내게도 이 경기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그러나 감독에게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준 그 경기가 선수들의 생애에도 최고의 순간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결국 금메달을 따지 못했고, (설사 금메달을 땄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면 실업자가 되든 식당에서 밥을 나르든 마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든 변한 것 하나 없이 여전히 찌질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 순간을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비루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그들에게 너무나 가혹하다.
그러나 그 순간을 만들어낸 국대팀의 팀워크는 우리 생애 최고다. 세상이 무시하는 아줌마, 세상에서 버려진 마이너들의 연대는 세상을 울린다.
아줌마 감독이 만들어서 참 다행이다
임순례 감독이 이렇게 제작부터 배우, 배급, 투자까지 메이저스러운 공간에서 영화 작업을 한 건 처음일 것 같다.
그러나 <우생순>이 요즘 메이저 제작자들이 만들고 있는 그저그런, 구태의연한 영화가 아니라, 스포츠영화 하면 당연스레 떠올리는 승부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이너 감수성으로 똘똘 뭉친 임순례 감독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마이너도 그냥 마이너가 아니라, 세상에서 공인한 "아줌마" 감수성이야말로 이 영화를 새롭게 하는 힘이다.
아마도 이 영화는 진짜 아줌마를 다룬 첫 아줌마 영화로 기록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핸드볼과 아줌마는 참 많이 닮았다.
p.s. 배우이야기
(카메오로 단 한 장면 출연했을 뿐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류승수와 함께 나온 스틸을 올려주는 센스! ㅋ)
물론 김정은은 영화를 본 뒤에도 여전히
내게 썩 좋기만한 느낌을 주는 배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이라는 배우에게 이 영화는 큰 전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취향이 배우의 흐름을 결정짓지는 않으므로.
적어도 이 영화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므로.
몸사리지 않는 솔직한 연기가 좋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도 여전해서 좋았다.
사랑스러운 남편 성지루도 좋았다.
자기 욕심을 드러내지 않는 배우들이 참 좋은 영화였다.
영화 보기 전까지는 국대 감독이 어떤 캐릭터인지 몰랐기에
내가 좋아하는 엄태웅이 그 역을 맡는 것이 좋았다.
주연급 배우임에도 필모그래피에 자신을 부각시키는 영화를 넣지 않는
의도하지야 않았겠지만 그의 겸손함이 더 좋았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니
조금 더 느글느글한 배우를 썼으면 좋았을 걸, 아쉬움이 남는다.
엄태웅의 능글맞음은 <가족의 탄생>의 형철까지가 한계인 듯해서 말이지. ^^;
그리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도
미숙의 남편으로 나온 박원상이 참 좋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때부터 문소리랑 참 잘 어울리는 아저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