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기독교계에는 새로운 필터링의 조짐이 보인다. 현대 기독교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도구는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신앙서적이다. 그런데 특별히 복음주의 개신교 내에 무방비하게 수용되었던 요소들의 심각성이 점차 드러나면서 사상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이다.(비진리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측과 순수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측) 사실 이런 조짐이 최근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같은 부류의 책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나 이미 이런 지적은 10년, 20년 전에도 있어왔고(실제로 그런 책들을 보며 얼마나 저자들이 통찰력 있었는가에 놀라곤 한다. 특별히 [기독교 속의 미혹](데이브 헌트)같은 책들은 놀랍기 그지없다) 좀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종교개혁을 뛰어넘어 교회의 탄생과 함께 있어왔다. 적절한 비진리를 진리와 함께 섞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전에도 몇 차례 해왔으므로 나는 최근의 변화 속에서 한 가지 우려되는 사항을 나누려 한다. 복음주의 개신교 안에 섞여 있는 비진리는 심리학이나 긍정적 고백운동(PCA;Positive Confession movement-라고도 부른다), 혹은 좀 더 나아가 뉴에이지 무브먼트(이에대해 기독교인들은 의외로 놀랍도록 잘 인식을 못 한다)나 강신술, 심지어 에큐메니컬 무브먼트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점차 넓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부류의 책을 읽다보면 진리를 수호하고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불타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특별히 젊은 혈기의 청년들은 이런 비진리와 타협하는 복음주의 개혁교회의 모습을 보며 교회를 비판적인 태도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쉽게 말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 교회에 가게 된다)
복음주의의 흐름 속에서 진리를 보존하자는 움직임은 분명 운동력 있는 바른 외침이다. 나 역시 이런 계열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고 심지어 나를 2년간 가르치셨던 순장님은 백금산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예수 가족 교회에서 거의 전도사급으로 사역을 하셨던 분이시다.(현재 시카고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나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순수한 복음과 인간의 전적 타락이 분명 교회에서 빛과 같이 비춰져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 지역교회에 다니고 있는 청년들의 태도가 자신의 교회를 향해 막연한 비판의식만을 가지고 교회를 개조의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진리에 대한 배타성에서 시작된 에너지가 교회를 무조건 비판하는 쪽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교회내의 여전히 존재하는 로마 카톨릭적 관습과 비진리의 오만함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진리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에너지와 정의를 향한 열정을 교회 비판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성경과 신학이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책 중에 김태한 목사님의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영화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순수한 복음과 대중문화 속에 흐르는 아우라(aura, 원작을 휘감고 있는 특별한 기운)와 사상에 대한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김태한 목사님은 이 책을 통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좌파적 기독교’... ‘사회 친화적인 기독교’가 그들의 목표이다. 그들의 신앙에선 어떠한 종류의 싸움도 볼 수 없다. 지켜야 할 진리와 신앙에선 어떠한 종류의 싸움도 볼 수 없다. 지켜야 할 진리와 믿어야 할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
좌파적 기독교 역시 사실 하나의 현상이다 그 근본은 결국 복음을 희석시키려는 시도에 있다. 그런데 그는 이 시대를 향해 “지켜야 할 진리와 믿어야 할 교리가 없는”세대라고 말한다.
문제의식을 가진 청년들은 결코 학생운동 하듯이 교회를 향해 메스를 들이대는 태도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나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여기서 내가 말하는 개혁은 복음을 보존함을 의미함이지 새로운 시도나 사상의 도입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찌보면 개혁교회라는 정체성 안에 있는 그대로의 의미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시대초월적인 것으로 개혁의 대상이 아니다) 비진리는 반드시 걸러내야 한다. 그러나 청년을 비롯한 신도들은 그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성경을 바로 아는 것에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학생이 아니더라도 정통신학과 교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실 이런 움직임도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바른 신학과 더 작게는 교리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바른 안목을 기르는 일에 그 에너지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불붙은 지푸라기처럼 여기저기 가볍게 휘날리기만 했다. 하지만 올 해 1월부터 교회에서 소그룹을 만들어 사모님께 신학과 교리, 그리고 성경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사모님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정통-신학교는 백석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셨다) 내가 전에 성경공부를 안 해본 사람이 아니다. 나도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인지라 배운경험 이상으로 가르치기도 많이 해봤다.(지금도 역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그런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바른 신학이 없으면 현실의 문제에서 성경을 왜곡하여 사용한다.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무엇이 성경적인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볼 수 있는 바른 렌즈가 필요하다.
우리의 비판의식이라는 메스는 사실 교회가 아닌 우리 각자에게 들이대야 한다. “성경을 알아야지 교회가 변질되었다.”고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은 얼마나 바른 신학과 교리 안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단순히 많이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고 있는가?” 젊은이들에게 완숙을 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비판적 에너지를 성경을 알아가는 곳에 사용하고 바른 신학적 체계 안으로 자신을 끌어가려는 것에 사용해야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언변과 알량한 지식에 대답조차 못하는 지식수준을 가지고 외치는 것은 그저 듣기 싫은 꽹과리 소리가 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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