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팀 버튼
일요일, 뒤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태안 기름방제작업을 다녀왔다. 전에 온 자원봉사자들이 기름을 닦아낸 돌에 효소 바르는 작업을 했다. 바위 틈은 여전히 검은 기름찌꺼기가 지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그 덕에 효소액은 몇 번씩 면걸레질을 해도 바위에 스며들 생각을 안 했다. 몇 시간 안 되는 작업이었지만, 오염된 바다를 살리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열심히 일했다. 공을 들여 걸레질을 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한민국 1등기업이라는 삼성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은 채 국민들의 자발적 노력에만 기대고 있는 수습과정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벌써 세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 두 분이 방제작업 중 사고로 돌아가셨다. 원체 입이 걸기도 했지만, 욕이 절로 나왔다. 방제활동을 모두 마친 후 함께 갔던 고등학생이 평가 겸 소감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일 저질러놓고 책임지지 않는 못난 어른은 되지 않겠다." 태안군 곳곳에 걸린 검은 현수막들은 태안군민들의 참담한 심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어찌됐든 밀물이 들어와 더 이상 작업도 할 수 없고, 식사를 한 뒤 인천으로 향했다. 휴일인데도 서해안고속도로는 전혀 막히지 않았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인천에 도착했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팀 버튼 감독 이야기를 내내 하기도 했고, 해서 우리 일행 몇몇은 자연스럽게 팀 버튼 감독의 를 보기로 결정하고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 상영시간도 딱 맞았다.
팀 버튼 표 유혈낭자 잔혹동화, 스타일 죽이네
뒤에 붙은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는 유혈낭자한 슬래셔무비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 워낙 피튀기는 영화를 즐기지 못하는지라 지금까지 내가 본 영화 중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쉬지 않고 칼질을 해대는 영화는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의 칼질과 의 칼질은 도구가 면도용 칼이라는 것만 같을 뿐 많이 다르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심리수사극이었던 뉴질랜드 영화 는 워낙 피흘리는 장면이 많다 보니 관객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피만 검은 색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어서 끔찍했고 무서웠다. 헌데 이 영화 는 정반대로, 컬러이지만 모노톤 느낌이 강한 전체 화면에 핏빛만 선홍색으로 표현했다. 스위니 토드가 휘두른 분노의 면도칼이 지나간 자리에서 뿜어나오는 선홍빛 액체는, 그래서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다. 실사영화, 게다가 뮤지컬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성들여 삽화를 그려넣은 동화책을 읽는 기분이 든다.
물론 지금까지 팀 버튼의 모든 영화는 동화였고, 판타지였다. 그러나 팀 버튼의 동화는 어딘지 음울하다. 고딕 풍의 그림들, 모노톤의 어두운 배경, 다크서클이 볼의 절반까지 내려온 등장인물은, 동화 하면 떠올리게 되는 총천연색 판타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사실 내가 팀 버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미지 때문이다. 이야기구조가 탄탄한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팀 버튼은 예외다. 그의 영화에는 이야기와 상관 없이 화면 가득 보이는 그림들에 넋이 나가 두 시간 내내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다. 거기다 팀 버튼과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는 배우 조니 뎁은 인간계의 존재가 아닌 것만 같다. 내가 넋이 빠져 보고 있는 그림의 일부이고 내게는 원래부터 동화 속에나 살 법한 가상의 인물이다.
역시 음울하고 매혹적인 그림들의 향연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음울함은 장난스러웠고 귀엽게만 느껴졌는데 이번 영화는 좀 다르다. 이전의 팀 버튼 영화가 가졌던 음울함은 에 이르러 염세의 극치로 치닫는다. 동화의 기본 구도인 선과 악의 대결로 시작되었으나, 분별을 잃은 복수는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문다. 원수, 악인에 대한 앙갚음으로 칼질은 시작되었으나, 어차피 자기들끼리 죽고 죽이는 인간들이니 부자와 가난한 자 구분 없이 착하고 악한 자 구분 없이 닥치는 대로 죽여버리자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만다. 인간들은 서로의 살점을 게걸스럽게 뜯으며 만족해한다. 인간은 본디 악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라고 확신하는 듯한 팀 버튼의 염세주의는 칼질이 쌓이면 쌓일수록, 굴뚝의 검은 연기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처연한 빛깔로 살아난다.
물론 그렇게 처절하게 염세적이면서도 키득거리게 만드는 팀 버튼 특유의 익살스러움은 여전히 살아 있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파이반죽이나 인육파이를 구상하는 스위니와 러빗부인의 듀엣, 이발의자를 시체처리 도구로 만드는 스위니 목공소 씬 등 도무지 웃을 수 없는 더럽고 끔찍한 상황임에도 무릎을 치며 웃게 만드는 기이한 경험은 팀 버튼 영화이기에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다.
팀 버튼과 조니 뎁에 빠진 관객이어서 이렇게 구구절절 그럴듯한 이야기만 읊고 있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이야기는 왕단순하다. 이 한 장의 관계도로 이 영화 스토리는 끝이다. 참으로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는 동화같은 스토리다. 게다가 뮤지컬영화인데도 배우들의 노래가 주는 쾌감은 사실 별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팀 버튼의 영화는 스토리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시각화되어 보여지는가, 스크린에 어떠한 이미지로 펼쳐지는가가 중요하다. 의 한 장면 한 장면은 매혹적인 회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의 조니 뎁은 의상부터 표정, 손짓, 심지어 뮤지컬이라기보다는 장엄한 오페라의 느낌이 더 강한 (그러나 힘은 딸려보이는 ㅋ) 노래까지도 완벽하게 회화로 각인된다. 지금껏 조니 뎁의 상대역으로 나왔던 여배우들 중 최고의 캐스팅이라 여겨지는 헬레나 본헴 카터는 다크서클이 가장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여배우로 기억될 것이다. 특히, 비극이 절정에 치닫는 마지막 장면은 어느 명화보다도 깊은 인상으로 남을 것이다. (스포일러 때문에 그 장면 스틸은 없나 보다. 오호, 통재라!)
난 앞으로도 팀 버튼의 영화가 개봉하면 쪼르르 극장으로 달려가 스크린에 펼쳐지는 음울한 회화를 감상할 것이다. 아마도 스타일 죽이는 그의 그림 속 조니 뎁을 보며 "쟤는 나이들면서 더 섹시해진다"고 호들갑도 떨겠지. ㅋ 팀 버튼씨! 조니 뎁씨! 앞으로도 계속 좋은 그림 많이 보여줘요~!!
p.s. 우리나라 영화감독 중에도 죽이는 스타일 때문에 꼭 극장을 찾게 만드는 이가 있다. 과한 캐스팅이 부담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번 달 말 을 봐야지 생각하는 건 그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