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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하다 #405

김미선 |2008.01.22 20:58
조회 51 |추천 2


저만큼에서 여자가 걸어옵니다

걸어온다기 보다는 차라리 두발로 기어온다는 표현이 맞을만큼

천천히 시선은 한없이 아래로

맞은편에서 걸어가던 남자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춰섭니다

 

기어오듯 걸어오는 그녀를 지켜보며 그 자리에서 기다리죠

남자의 코앞에 와서야 장애물을 발견하듯

이 남자를 알아차린 여자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전혀 안녕하지 않은 안녕을 건냅니다

 

'안녕'

 

남자가 피식거리며 대답하죠

 

'안녕이라, 방금까진 그랬는데

니가 그런 목소리로 물으니까 갑자기 세상이 막 어두워지네

너 뭔일 있구나?'

 

그러자 여자는 좀 망설입니다

사실 누구한테 푸념하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사실 푸념하기에는

너무 아무일도 아니고

우물거리고 쭈볏거리는 여자의 입술을 바라보니

그 마음이 보이는 거 같아 남자는 다시 등을 떠밀어주죠

 

'말해봐 뭔데 응?

너 지금 그 얼굴 거의 주식에 전재산 날린 사람 표정이거든?

혹시 돈 문제냐?'

 

돈 문제일리가 없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남자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여자가 일단 한번 작게 웃고 이야기를 꺼내죠

모기만한 목소리로 질질 끌듯이

 

'아니 오늘은 별로 못봤어'

 

그러니까 오늘은 원래 그 사람을 보는 날이었는데

별로 못봤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겨우 뒤통수나 열심히 쳐다보고 웃긴 이야기도 준비해 갔는데

건내지도 못했다고 그리고 몰래 옆에 가서 친구와 하는 이야기

엿들었더니 뭐 케리비안 어쩌고 하는 영화를 보고

짜증이 났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그 사람의 여자친구가

조니뎁이 멋있다는 이야기만 자꾸해서 그랬다고..

 

'그러니까 .. 그냥 그랬다고..

별일 아니야 신경쓰지마 나 간다 내일봐'

 

할말을 못찾아 가만히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는

혼자서 마무리 지어버리는 여자

그래도 누구에게 털어놓은게 효과가 있었는지

아까보다는 나아진 얼굴로 뒤돌아서는 여자

남자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봅니다

 

'오늘은 별로 못봤어'

 

그녀의 말과 보기에 딱할만큼 실망한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러고보니 오늘은 정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신경을 쓴듯

발목에 매달려있은 은색 발찌를 바라보며

남자는 정말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

그녀가 그 남자 대신 자기를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니가 날 좋아하면 참 좋겠다

난 매일같이 내 얼굴 보여줄 수 있는데

매일 매일 같이 영화를 볼 수도 있는데

 

 

#사랑을 말하다_시경

추천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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