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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nt)

유상은 |2008.02.06 18:30
조회 41 |추천 1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이 책을 읽으며 몇 페이지 쯤에서 가슴을 치며 동감을 하게 되는지를 보면,

 

내가 사랑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점점 그것을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라는 구절에 줄을 쳐 놓았지만,  

 

나 자신은 그 단계가 아니라고 인정하고 넘어간 것 처럼. 그 단계를 확인하며 읽어나간다.

 

그러나 그것이 독서의 즐거움으로 연결되기보다는 가슴 아팠던 것은 앨리스가 나 자신 같았기 때문이랄까. 

 

 

여자는 모두 기본적으로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그런 케이스인건지-  

 

'로맨티스트'로 묘사된 앨리스의 대사는 모두 내 일기장에 한 번은 적혔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 로맨틱함은 행복에서 비롯한 핑크빛이라기보다는

 

자기연민에서 발생된 칙칙하고도 끈적한 느낌이랄까. 예를 들면,

 

[불평을 하는 것은 결국, 행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같은.

 

 

핑크빛으로 가득한, 그리고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했던 한 때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무슨 사랑을 이렇게 복잡하게 기술해 놓았냐며 코웃음 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역시, 나는 지금 행복하고 싶은 단계.

 

 

 

당신은 날 많이 사랑하지 않아라는 억압된 두려움과

내가 말도 안되는 걱정으로 당신을 괴롭히면 안되는데라는 타고난 심리적 규범이

폭발적으로 뒤섞여 상호작용하는 것이 애인의 편집증을 낳는 마법이다.

- 그런데 아무리 이성을 찾고 성숙해지려 노력해도, 나는 조금씩 미쳐가................

 

 

 

[쿨하다]라는 말의 정의가 무엇일까.

 

누군가를 나만큼, 혹은 나 이상으로 신경쓰고 있다면 어떻게 사람이 쿨해질 수 있을까, 싶다.

 

쿨하다-는 순간 이미 이전보다 차가워진 자신을 발견한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느냐, 표현하지 않느냐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혹은, 얼마나 자기정제를 하느냐의 차이 정도.

 

여기에는 상대방을 얼마나 믿느냐. 그리고 상대가 나에게 얼만큼의 믿음을 줬느냐가 포함된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죠? 에

나도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죠? 라고 대답하는 상황에 악의는 없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엄청난 불균형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이전에, 그랬다.

 

어차피 사랑에는 완벽한 균형이 있을 수 없고, 남자가 여자를 조금 더 사랑하는 관계가 더 오래 지속된다고.

 

그래. 균형이 생길 수 없는 관계지. 그러나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괴로울 뿐인거다.

 

이것은 또, 믿는다는 것과는 별개로 관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그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쏟는 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냐는 문제니까.

 

그리고 이것들이 더해져서 '욕구'가 생긴다. 

 

 

 

내가 겁을 먹어도, 고민이 있어도, 신경이 날카로워도 날 사랑해줘요.

내가 잘하지 못해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해줘요..

나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래서 결국 나의 본모습을 알게 해 주는 사람에게 신뢰가 생긴다.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알리고 싶고, 이해 받고 싶다는 욕구.

 

[무조건 내 편]인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이것이 나의 약한 면임과 동시에 강한 면이라는 것을, 누군가는 알아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일방향이 성립될 수 없는 관계.

 

나는 알리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만큼, 당신에 대해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지만-

 

당신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내가 깨달아가는 나의 단계다.

 

 

 

그런 것들은 그의 진정한 본모습이 아니라,

내가 나의 입맛에 맞게 지금까지 상상한 모습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리면, 타인들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냉소적인 사람은 너무 많이 바라고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을 뜻했다.

 

자기존중심이 어느 수준까지 커지자, 앨리스는 종교적인 사랑의 속성인 굴욕감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정답. 근 2년간 내게는 자기존중심이 빠져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과 배타적인 것이라고 믿는걸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함께 하는 시간보다 그저 믿고 지켜봐 주는 것이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저 하늘 아래, 나를 묵묵히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는 행복이 된다는 것을 믿는 내가 너무 순진한걸까.

 

나는 그것이 곧, 나의 믿음과 생각에 대한 신뢰이며

 

그가 발전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행복이며

 

나 자신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나의 자기존중심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역시 나 혼자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결국 앨리스는 수지로부터 들은 말을 내 귀에 속삭인다.

 

"니가 그리워 하는건 사랑이야"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인걸.

 

 

여기에서 생기는, 어쩐지 이가 맞지 않는 감정의 괴리. 

 

그리고 나는 지금,

 

자기존중감을 찾아가는 단계.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그리워하는 앨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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