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역사, 종교, 그리고 전쟁
정리 : 염창근
1. 아프가니스탄 개괄 : 지정학적, 민족적, 종교적, 언어적 상황
(1) 지정학적 상황
- 중동과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들 사이에 위치해 있음. 특히 이란(서쪽)-중앙아시아․러시아(북쪽)-인도․파키스탄(동쪽/남쪽)과 역사적으로 운명을 공유해왔음.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다양한 종족의 이동과 침략이 계속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음. - 18~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간을 내정 간섭하며 이 나라를 완충국으로 두기로 합의함. 완충국은 서로가 거리를 두면서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자신들과 적대적 관계에 놓일 수 있는 각 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적합한 체제였음. 때문에 아프간은 필연적으로 외세의 무기와 화폐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고 외세의 손에 처지가 좌우되게 됨. 그러나 곧잘 균형을 깨고 자기 이익을 위해 침략하고 전쟁을 벌임.
-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그리고 주변국이 아프간을 간섭함. 이로 인해 주요 부족들이 어떤 외세와는 결탁하거나 어떤 외세에는 저항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전통이 생겨남. 이런 식으로 아프간은 국가의 체계가 있음에도 서로 너무 다르고, 다양한 부족과 문화로 구성되어 늘 불안한 상황 속에 놓임. 영국 침공, 소련의 침공, 미국의 침공 등으로 이마저 균형이 깨지면서 대립이 극심해짐.
- 1979년 소련의 침공은 소련 확장을 우려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가져왔고, 미국은 친소 정부 대신 친미 정권을 세우기 위해 무자히딘 및 탈리반을 지원함(무기, 물품, 돈 등). 미국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지원은 냉전 시기 미국의 반소련 세계 전략의 일환이었고 반소련 이슬람 세력이 정치세력화한다면 소련에 대항하는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봤음. 결국 소련이 1991년 몰락하자 이러한 전략이 승리한 것으로 여김.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은 아프간에 전쟁, 내전, 난민(당시 600만, 인구의 1/3), 폐허, 갈등, 학살, 무기, 마약 등을 낳았음. 소련이 몰락한 후 현재는 미국을 중심으로 아프간에 개입하고 있고 탈리반을 타킷으로 진행 중임.
- 아프간은 국가라는 개념이 최근에야 발달하였고 여전히 국가를 사회의 외부로 여겨지고 있음. 20세기 초 이전까지만 해도 아프간 사람들은 스스로를 국가의 국민이 아니라 외세 제국과 이란 사이에 끼어 있는 수니 무슬림의 일부분으로 인식했음. 다양한 아프간 사람들에게서 유일한 공통점은 이슬람이라고 할 수 있음.
(2) 지리적 상황과 경제 상황
- 면적은 65만평방미터(한국은 약 10만평방미터), 화폐는 아프가니.
- 산이 많은 사막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 고산지대가 많아 고립적․분산적인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 중앙에는 힌두쿠시 산맥이, 북쪽으로는 평원이 시작되고 남쪽으로는 황량한 사막이 있음. 힌두쿠시 산악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밀과 보리를 재배했고 양과 염소를 방목한 유목 문화가 있었음.
- 농업 : 경제는 자급적 농업에 거의 의존하고 있으며 관개농으로 재배하는 밀이 주곡임. 변경 지역에서는 밀과 보리를 재배함. 그러나 오랜 전쟁으로 농업은 거의 파탄났고 많은 기구들이 복구 지원을 해왔으나 여전히 어려운 상황. 잘랄라바드 주변 지역, 헬만드 등에서는 양귀비를 대량 생산하고 있으며 고도로 조직된 밀수 조직의 중심부가 되고 있음. 세계 아편 주요 생산지로 헤로인 생산 과정에 연루되어 있음.
- 도시 경제 :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도시로 이동하면서 도시 중심부는 매우 인구밀도가 높으며, 소련이 지원할 때는 상당히 흥성하였으나 전쟁으로 계속 쇠락해졌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빈곤 상태에 놓여있음. 도시 경제는 소규모 작업장과 노점상이 중심이지만 매우 불안정하며 침입받을 위험도 많음.
- 중앙아시아 가스와 석유의 수송관(송유관) 설치 장소로 주목받고 있으며 밀수에 매우 깊이 관련되어 있음. 주변 국가와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지리적으로 감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밀수의 최적지가 되었음. 사람들은 격리와 방어에 익숙하며 외부인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떨쳐 버리기도 함.
(3) 민족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
- 세력이 강한 민족 집단은 ‘파슈톤 족’이며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전 지역에 걸쳐 있지만 주로 남쪽에 거주하고 있음. 파슈톤 족은 강한 부계사회와 대가족제를 유지하고 있음. 파키스탄의 북서변경주에도 많은 파슈툰 족이 있음. 18세기부터 파슈톤 족이 아프간을 통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내부 부족 간 다툼도 많았음.
- 다음으로 ‘타지크 족’이 있으며 인구의 25%를 이루고 있음. 세 번째로는 ‘하자라 족’이고 인구의 10%를 이루고 있음. 그 외 우즈베크 족(9%), 투르코만 족, 키르키즈족, 아이마크 족, 발루치 족, 누리스탄 족, 판즈시르 족 등이 있음.
- 북쪽으로는 세 개의 주요 민족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연결되어 있음. 투르코만 족은 투르크메니스탄과, 우즈베크 족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크 족은 타지키스탄과 관계를 맺고 있음.
- 중부의 시아파 하자라 족은 매우 보수적이나 파슈툰 족보다는 덜 경직되어 있음. 상당히 위계적이나 개인적이며 대가족 체계보다 핵가족이 많음.
- 부족들은 지역적으로 분립되어 있고 매우 전통적이며 외부 부족민들과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규준들을 가지고 있음. 특히 최대 부족인 파슈톤 족은 아프가니스탄의 특징인 합의제를 잘 보여줌. ‘지르가’라는 지역 기구는 사회 조직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고 있고 ‘파슈툰왈리’라는 불문법을 지키고 있음.(파슈툰왈리의 핵심은 복수, 손님 환대, 집단보호임)
- 헤라트나 마자르는 남쪽의 전통적 성향과는 달리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고 유대감이 약하며 개인적임. 하지만 덜 보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관계로 인해 적대 관계의 파벌로 분열되기 쉬움.
- 카불은 서로 상반된 정권이 자리했던 수도였던 만큼, 근대주의와 전통주의 사이에서 매우 다른 정책들이 집행되어왔음. 인민민주당 정부, 무자히딘 정부, 탈리반 정부, 친미 카르자이 정부의 변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한편 전쟁이 지속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도 많아졌음.
- 종교적으로는 시아파인 하자라 족과 이스마일 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니파 이슬람임.
- 아프간은 여러 가지 문화적 복합성과 이질성으로 인해 갈등이 지속되어 왔고 그 속의 충돌로 인구의 1/3(1989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550만명이라고 발표함)이 넘는 사람들이 아프간을 떠나 난민이 되었음. 난민은 대부분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갔고 일부는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로 갔음. 또한 그만큼의 사람들이 국내 다른 지역으로 떠남. 보수성이 강한 아프간 사람들은 웬만해선 살던 지역을 떠나지 않지만 난민이 된 것은 얼마나 문제가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임. 이 속에서 사람들은 외부에 대한 방어벽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임. 또한 같은 민족끼리도 내부 부족들 및 지역마다 성격이 다르며 전반적으로 지리적 조건에 따라 독립성이 강하고 가족․부족 중심의 생활전통을 유지하고 있음.
- 평균 수명 43세. 15세 미만 인구가 43%를 차지하고 있음.
(4) 언어적 상황
- 크게 파슈토와 다리어라는 2가지 언어를 사용하며 이는 민족별 사용언어의 분포와 같음.
- 파슈톤 족은 ‘파슈토’라는 언어를 사용하며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페르시아어(이란어) 방언인 ‘다리어’(타지크 족, 하자라 족)와는 매우 이질적임.
- 그 외 우즈베크 족은 우즈베크어를, 투르코만 족과 키르기즈 족은 터키어, 발루치 족은 발루치어를 사용하는 등 소수 부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
2. 아프가니스탄 역사 이해
[고대 ~ 1747년] : 제국의 지배 속
- 조로아스트교, 간다라 미술의 발흥지.
- 서기 전 522~330년, 다리우스 대제 이래 아케메네스 제국에 속함. 부족들을 복속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음.
- 서기 전 330~327년,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아프가니스탄 정복.
- 64~220년, 쿠샨 조(쿠샨 제국)에 속함. 실크로드 무역 발달. 주요 도시들은 무역로의 거점.
- 224~651년, 사산 조 페르시아와 에프탈 훈 족의 제국에 속함.
- 699~700년, 이슬람을 받아들임. 인도의 샤 조가 다마스쿠스에 근거를 둔 움마야드 갈리프의 제후로서 통치.
- 977~1186년, 투르크 족이 아프간에 들어와 가즈니에 근거를 둔 가즈나 조를 세움(수도는 가즈니). 이스파한에서부터 북서부 인도까지 걸치는 제국을 형성. 이때 북서쪽 인도의 많은 힌두교 주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
- 1155~1227년, 칭기스 칸이 중앙아시아를 비롯해 아프간을 정복.
- 1307~1506년, 투르크-몽골계 후손인 티무르 제국에 속함(수도는 헤라트). 많은 예술적 건축물들을 지음. 시와 예술이 번창함.
- 1506~1747년, 티무르 제국 소멸 후 무굴 제국과 사파비 제국에 분열되어 속함. 두 제국은 영토를 놓고 각축전을 벌였고 지역 부족들의 반란도 지속적으로 마주했음. 칸다하르의 미르 마흐무드가 세력을 넓히며 각축전에 뛰어듬. 그러나 누구도 아프간 전체를 통치하지는 못함.
[1747년 ~ 1919년] : 파슈톤 족의 권력 장악, 영국의 간섭과 전쟁
- 1747~1772년, 아흐메드 샤가 칸다하르에서 아프가니스탄 장악(1793년까지 통치, 수도는 칸다하르). 부하라의 아미르(이슬람 군 사령관)와 북쪽 영토 경계를 아무다리야 강 경계로 구분 합의. 이때 아미르는 아흐메드 샤에게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투를 선물하고 아흐메드 샤는 이를 보관하기 위해 칸다하르에 사원을 건축함(탈리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는 칸다하르에서 이 외투를 군중들 앞에 들어 과시하기도 했음). 아흐메드 샤 사망 후 아들 티무르 샤가 즉위. 그러나 파슈툰 족과의 갈등이 커지며서 수도를 카불로 옮김. 점점 지배력을 상실함. 티무르 샤 사망 후 오랜 분열의 시대가 시작됨. 이때 영국 제국과 러시아가 아프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에 돌입했고 첩보원을 보내 군대를 주둔하려고 함.
- 1809년, 영국이 아프간의 샤 슈자(티무르 샤의 아들)와 함께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항하는 상호방위 조약을 체결. 영국이 영향력이 높아짐.
- 1837년, 영국 총독 오클랜드 경이 당시 카불의 새 지배자인 도스트 무함마드에게 서로 세력다툼을 하던 시크교와 평화협정을 독려하는 사이 러시아 장교의 후원을 받던 페르시아 군대가 헤라트를 공격. 러시아도 도스트 무함마드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영국과 인도가 긴장하며 대응함.
- 1839~1842년, 영국 침공 및 전쟁(1차). 영국은 상호방위 조약 당사자인 샤 슈자를 복위시키기 위해 정벌군을 아프간에 파견했고 점령함. 영국은 인도식 식민지 생활양식을 도입함. 2년 후 아프간 대중들은 이에 반발 무장봉기가 일어남. 그러자 영국은 다시 도스트 무함마드를 복위시키는 조약을 체결하고 철수함.
- 1843~1878년, 영국군 철수 후 도스트 무함마드는 아프간 장악. 사망(1863년) 후 아들 쉐르 알리 칸이 79년까지 통치함. 러시아는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 여러 곳을 장악했으나 아프간 북쪽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에 대해 영국과 합의함. 그러나 러시아가 밀고 들어올 것에 불안해 한 쉐르 알리 칸은 러시아 침공 시 영국으로부터 원조를 확실히 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영국이 사절단을 보내기로 제안함. 그러나 쉐르 알리 칸은 사절단 파견은 거절함. 러시아도 사절단을 보낼 것이라는 이유 때문. 러시아가 먼저 사절단을 보내자 영국도 사절단을 보내게 됨. 그러나 영국 사절단이 저지당하자 영국은 아프간을 침공함.
- 1878~1880년, 영국 침공 및 전쟁(2차). 쉐르 알리 칸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가려했으나 거절당하고 사망함(1979년). 그의 아들 야큐브 칸은 영국의 요구를 못 견디며 1879년 간다마크 조약을 체결,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외교권을 행사하게 됨. 영국군 사령관이 아프간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됨.
- 1880~1901년, 망명 중이던 압두르 라흐만(쉐르 알리 칸의 사촌)이 아프간 북부에서 세를 규합하여 영국군을 몰아냄. 영국은 다시 대규모 군대로 진격해 승리하지만 주둔하지는 않음. 당시 영국의 새로운 자유당 정부는 아프간 개입에 큰 야욕이 없었음. 대신 압두르 라흐만을 재정적․군사적으로 원조함. 이를 바탕으로 압두르 라흐만이 아프가니스탄 완전 정복을 선포하고 북부지역에 파슈툰 족을 정착시킴. 그는 영국의 영향력을 받으면서도 종교적 기반과 충돌하지 않도록 조심함. 영국과 러시아와의 갈등과 몇 차례 국제 협정을 거쳐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국경이 정해짐(두란드 라인으로 영국령 인도와 나누어지고 이에 파슈툰 족은 국경 사이에서 반으로 갈라짐).
- 1901~1919년, 하비불라(압두르 라흐만의 장자) 왕 통치 시기. 선대에 비해 종교지도자에 대한 통제를 하지 않고 그들을 정책 결정에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함. 동시에 변화를 위한 개혁운동을 제시하고 1차 세계대전 와중에 영국과 러시아 모두를 저지하면서 독립과 중립을 지키는데 성공함. 1919년에 암살당함.
[1919년 ~ 1978년] :‘개혁운동’과 ‘전통’사이의 충돌
- 1919~1929년, 아마눌라(하비불라 아들) 왕 통치 시기. 영국이 전쟁에서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국에 전쟁을 선포, 승리하지는 못하나 영국이 물러남. 1919년 라왈핀디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교권을 회복함. 이후 러시아와 접촉을 강화해 1921년에 친선조약을 체결, 미국과 유럽에도 사절단을 보냄. 이로서 아프간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에 대해 무적의 자긍심을 갖는 원천으로 작용함. 또한 인도 내 파슈툰 부족 관할권을 되찾으려 했으나 이루지 못함. 소련은 군사적 원조와 함께 주요 도시 전화선 연결을 원조함. 내부적으로 ‘개혁과 근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개혁운동 시도하지만 파슈툰 족의 반발 및 종교지도자와 전통 지도자들에게 큰 반발을 삼. 아마눌라는 아프간이 유럽에 비해 뒤쳐져 있다는 것에 대해 나라를 강화하는 길은 종교 문화적 차원에서 근대화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음. 1928년에 7개월 간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서양식 복장 규정과 남녀공학을 시도했음. 이것으로 그에 대한 반발이 격화됨. 군대를 크게 양성하지 않았던 아마눌라는 반군의 무장봉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망명함.
- 1929년, 타지크 족 바차-이-삭카오가 권력을 찬탈하고 카불을 통치함(1~10월).
- 1929~1933년, 나디르 칸 왕 통치 시기. 파슈툰 족 무함마드 나디르 칸이 바차-이-삭카오를 대체하여 권좌에 오름. 나드르 칸은 아마눌라 정부의 군 사령관 출신으로 급진적 변화에 크게 반발했었음. 개혁프로그램에서 강력한 군대 보유와 농촌사회의 보수주의를 염두하지 않고서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음. 그는 종교지도자와 부족지도자들의 명을 받을어 통치함. 부족․종교 지도자 회의인 ‘로야 지르가’를 소집해 그곳에서 왕 칭호를 부여받음. 수니 이슬람의 하나피 샤리아를 실제 법으로 선포함. 한편 1931년 헌법에서 종교법과 세속법이 동일한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하면서 큰 혼란을 야기시킴.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샤리아에 규정된 가혹한 처벌은 드물어짐. 1933년에 암살당함. 19세 아들 자히르 샤가 왕위 계승.
- 1933~1973년, 자히르 샤(니디르 칸의 아들) 왕 통치 시기. 그는 사촌 다우드 총리와 숙부들의 지도 아래 통치. 2차 세계대전 때 중립국의 위치를 지켰으며 전쟁 후 인도 독립 시기에 인도의 파슈툰 족 지역인 북서변경주에 대한 소유권을 제기했으나(이미 이 지역은 준독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아프간이 포함하려고 했음) 1947년 파키스탄이 이 지역을 포함한 채 독립함. 이 지역 파슈툰 족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켰으나 파키스탄은 무력으로 진압함. 파키스탄은 아프간 마을까지 공습했고 아프간도 경계에 대한 모든 조약을 취소한다고 발표, 나아가 파키스탄 쪽 지역까지 묶어 ‘파슈투니스탄’ 회의체를 제기함. 이에 파키스탄이 원유공급을 중단하자 1950년 아프간은 소련 정부와 협정을 맺고 소련으로부터 원유를 비롯한 물품을 제공받음. 소련은 그 대가로 원모와 원면을 받고 북부 아프가니스탄 석유 탐사 작업도 시작함. 1955년에는 1억 달러 차관을 비롯 무기 원조를 받고 북부에 공군 기지 개발도 원조받음. 미국은 헬만드 강에 두 개의 댐을 축조하고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공사를 해 줌. 다우드 총리는 아프간의 소련과 미국의 친교는 다우드 총리에 의해 가속화됨. 또한 1959년부터 아마눌라의 몰락 이후 시들어간 개혁 작업을 다시 시작함. 1959년 8월에는 다우드 총리와 정부 고위 관료들은 자신의 아내와 딸들을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대중 연단에 세웠음. 종교지도자들은 반발했으나 군대를 동원해 모조리 진압함. 소련과의 원조를 더욱 강화하면서 여성들을 도시의 노동력으로 편입시켜감. 반발이 심해 학교나 대중탕 및 극장을 다니는 여성을 공격 목표가 되기도 함. 1963년에 다우드 총리가 사임하면서 자히르 샤 왕은 직접 통치에 나섬. 1964년 헌법에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평등함을 천명함. 이 헌법은 세속법 체계가 샤리아법에 우선한다고 규정하면서 1931년 헌법을 뒤집음. ‘이슬람은 아프가니스탄의 성스러운 종교다’라는 규정은 헌법 어디에도 없었으며 세속법 적용이 어려울 경우에만 샤리아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규정까지 세움. 또한 선출직 의회 구성을 명문화하면서 1965년 첫 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 216명 의원 중 4명의 여성의원도 포함됨. 정치적 소요가 시작되고 급진주의가 성장함. 특히 카불대학교에서 급진적 운동이 시작되었고 일부는 더욱 빠른 속도의 개혁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에 희망을 걸었고 일부는 기존 개혁에 반대하며 이슬람 가치로 되돌아가기 위해 투쟁하기 시작함.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결성되었고 샤리아법을 기반하는 이슬람 국가 세우기 정치운동이 시작됨. 여기에 타지크 족과 우즈베크 족이 적극적으로 참여함. 이들은 소련 정부의 박해를 피해 북부 아프가니스탄으로 피난온 사람들임. 이후 사회주의 정당들과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성장과 함께 상당한 불안이 지속됨. 그리고 1969년부터 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의 기근은 정부의 능력을 의심케했음.
- 1973년 7월, 자히르 샤가 소련의 원조를 받은 다우드 전 총리의 군사 쿠데타로 실각함. 다우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해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선포함. 지식인층과 중산층 사회주의 세력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인민민주당 분당 정파 중 온건파 쪽과 군대에 눈을 돌리는 한편, 인민민주당 당원들을 내각 일부에 포진시킴. 토지 개혁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면서 반발을 의식해 신중하게 진행함. 그러나 파슈툰 우대정책을 유지했고 이슬람 약화를 시도하면서 비파슈툰 족과 이슬람 세력의 거센 저항을 불어왔음. 인민민주당 당원들도 내각에서 제거함. 반발하는 모든 이슬람주의 정당들을 파키스탄으로 몰아냈고 서양과의 교섭을 늘려감. 이란과의 관계도 더욱 강화하면서 소련의 의존도를 줄이고자 했음.
[1978년 ~ 1996년] : 인민민주당의 집권과 소련의 점령과 급진적 정책, 이에 맞선 무자히딘의 집권, 이에 맞선 탈리반의 등장과 내전
- 1978년 4월,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로 다우드를 살해하고 집권함(대통령은 누르 무함마드 카라키). 인민민주당 정부는 더욱 급진적 정책을 펴고 반대 세력을 숙청함. 많은 전문가 집단이 해외로 떠남. 반이슬람주의, 중앙집권화, 급진적 근대화정책, 전통문화 무시로 일관함. 인민민주당은 토지 소유 제한, 농촌 부채 탕감, 결혼 적령기 하한선 규정 등의 조치를 취함. 남녀노소 모두에게 문맹 퇴치 캠페인을 진행.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점진적 개혁을 시도하지 않음. 그러나 농촌의 복잡성을 무시한다든지, 여성 교육에 남성 교사를 채용한다든지, 연장자 교육을 어린 교사가 한다든지 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반발이 일어남. 또한 무력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적․종교적 민간한 부분들을 무시했고 특히 농촌 지역에서 대중적으로 반발하기 시작. 주민들은 ‘지하드’를 외치면서 폭발했고 정부는 무력으로 대응함. 반발은 중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일어났고 파슈툰 족은 정부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정부를 믿고 있었기에 소련 침공 전까지는 반발하지 않았음. 1978년 12월에 소련과 군사원조 협상이 체결됨. 79년에는 이란 혁명이 일어남. 인민민주당은 내부 권력투쟁으로 1979년에 전복되고 대통령 암살당함. 하피줄라 아민이 새 대통령에 취임하나 소련의 명령을 따르지 않음.
- 1979년 12월, 소련군이 인민민주당의 복귀를 위해 침공하고 점령함(10년 동안). 침공 이유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으나 미국이 이슬람을 지원해 남쪽에서 포위될 것을 두려워했다는 이유가 주요함. 하피줄라 아민 대통령 침공으로 사망. 인민민주당 복위. 바브라크 카르말이 대통령 직위를 계승함. 곧바로 무자히딘의 저항이 격렬해짐. 1985년에는 이슬람주의 반군들이 연합해 ‘이슬람동맹저항운동(7당동맹)’ 결성해 게릴라전투를 진행. 소련군은 1986년 철군 결정 후 1988년에 서면으로 즈네브 협약을 맺어 철군을 명시하고 철군 시작함. 철군의 이유는 무자헤딘의 저항 뿐만 아니라 소련 경제가 심각히 위축되어 해외 전쟁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음. 또한 1985년 권력을 잡은 고르바초프는 여러 사정으로 소련의 군사적 개입을 종식하기를 원했음. 86년에 교조적 색체가 덜하도록 대통령을 무함마드 나지불라로 교체함.
- 1989년 2월, 소련군이 완전 철수함. 이 계기를 시작으로 1991년 소련 자체의 몰락으로 이어짐. 그러나 인민민주당(나지불라 정권)은 92년까지 정권 유지함. 이에 무자히딘 7당동맹은 임시정부를 구성해 대항함. 그러나 점점 통일성은 약화되었고 파벌들로 분열함.
- 1992년 4월, 무자히딘이 나지불라 정권을 축출하고 카불에서 집권함.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 선포. 라바니(타지크 족)를 대통령으로 한 정부를 구성함.(그러나 집권 2개월 전 미국과 파키스탄의 집중 지원을 받던 헤크마티야르가 권력을 장악할 것을 우려해 도스탐은 북부지역 군벌들 및 세력들과 북부동맹을 결성해 헤크마티야르의 권력 장악을 막고자 했음). 헤크마티야르가 권력 배분에 불만을 품고 카불에서 격렬한 시가전을 벌임. 다른 이슬람 정파들도 분열해 내전에 돌입함. 카불은 한동안 법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세력들 다툼 속에서 학살들이 계속 저질러짐. 내전은 참혹한 방식으로 벌어져 이슬람 내부에서도 종파와 민족․부족 그룹들을 분열시킴.
- 1994년 11월, 탈리반이 칸다하르를 장악함. 1995년 9월에는 헤라트를 장악함(헤라트는 아프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중 하나였음). 하자라 학살 자행.
[1996년 ~ ] 탈리반 정부와 미국의 침공, 충돌
- 1996년 9월, 탈리반이 잘랄라바드와 카불을 장악함. 나지불라 대통령과 형제들이 광장에서 교수형 당함. 탈리반의 징벌 정책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
- 1997년, 탈리반이 아프가니스탄 유일 정부로 선포. 국명을 아프가니스탄이슬람에미레이트로 바꿈. 파키스탄과 사우디,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은 재빨리 탈리반 정부가 아프간 합법 정부임을 승인함.
- 1997년 5월, 탈리반이 도스탐 세력 지역인 마자르-이-샤리프를 장악함. 하자라 족 및 우즈베크 족 학살.
- 1998년, 유엔과 OIC(이슬람회의기구) 중재로 탈리반과 이슬람 연합전선 간 평화회담 진행. 미국이 나이로비(케냐)와 다르에스살람(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 테러에 책임을 물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함. 미국의 태도가 돌변함.
- 1999년 탈리반과 연합전선 간 연립정부 구성을 합의하고 울레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함. 그러나 곧 무력충돌은 진행되지 못함. 10월에 유엔 안보리가 탈리반에 대한 제재 조치를 발표함(11월 단행).
- 2000년 9월, 탈리반이 북동부의 탈로칸을 장악함. 유엔 안보리는 12월부터 탈리반에 대한 제재 조치를 취함.
- 2001년 9월, 9․11 사태 발생(세계무역센터와 미 국방부 건물이 공격받음). 미국은 즉시 오사마 빈 라덴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탈리반에 인도를 요청. 탈리반 이를 거부.
- 2001년 10월, 미국은 영국 등 나토군의 지원을 받아 침공. 12월 카르자이 임시 정부 출범. 북부동맹 출신 군벌과 로마그룹이 주축.
- 2002년~, 카르자이 친미 정권 탄생. 카르자이는 미국 석유회사인 유노칼의 컨설턴트로 활동한 바 있음. 2005년에는 중단된 석유사업들 재추진을 합의했음. 아프간에서 반미-반외세-반정부 시위가 결합되어 격화되는 가운데, 탈레반도 다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 현재 미군 주둔 병력 1만 8천, 영국군 6천, 국제안보유지군(나토군 추축) 1만 5천이 있음. 2002년 당시 국제적 엔지오 1천여개가 활동했음.
3. 이슬람 전통
-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이전의 신앙, 부족의 규범, 이슬람이 뒤섞인 형태.
-- 아프간 사람들은 무슬림으로서의 우선적인 정체성이 강하며 예술과 시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덜 엄격했음. 동시에 지극히 보수적인 사회로 외부의 영향에 아주 민감했음. 이슬람은 기독교, 힌두교, 불교와 경쟁해야 했고 이들 종교의 영향력을 소멸시키는데 관심이 많았음.
- 특히 이슬람은 영국과 영국령 인도, 소련 등 아프간을 장악하려는 외세들에 대응하여 수많은 저항운동의 집합신호가 되었음. 여기에 북서변경 지역의 파슈툰 족은 준비된 인력을 제공하는 식. 여기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인도 북동 지방에서 온 사이야드 아흐메드 바렐르비(1763~1831)임. 그는 인도아대륙을 여행하며 하나의 운동을 만들어냈고 북서변경주를 영국 공격의 근거지로 결정함. 그는 부족장을 무시하고 울레마를 운동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고 인민들에게 영국에 대항해 지하드를 수행할 것을 촉구함. 이것이 아프간에서 이슬람에 기반을 둔 정당의 초기 형태가 됨.
- 이후 1867년 인도 델리 근교 데오반드에서 모함마드 카심 나나우라위, 라쉬드 아흐메드 간고히가 이슬람 학부의 설립을 계획하기 시작함. 이들은 교육으로 이슬람 개혁운동을 주창했고 마드라사를 건립해감. 이를 통해 생긴 학파가 ‘데오반디즘’ 학파로 하나피 학파의 분파임. 내용에 여성 역할을 제한하고 시아파를 거부하는 것이 있음. 당시 아프간 정부는 국영 신학교 건립을 목표로 데오반드파에 협력을 구했고 많은 아프간 종교학자(울레마)들이 여기서 수학하고 돌아옴. 울레마들은 다시 부족 전통(파슈툰왈리)을 토대로 이슬람을 재해석했고 이를 토대로 아프간 내 종교를 운영함. 또한 법을 집행하고 사안을 논의하고 정부에 자문하며 법원과 학교에 통제권을 가졌으며 공공/민간 영역 전반에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음. 정부는 이들에게 급여를 지급했음. 울레마는 물라(지방의 신도 교육자?)와는 달리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슈라에 집단적으로 참석해 주요 의사를 결정할 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
- 데오반드 이슬람 학부는 아프간에 오래동안 있었던 수피학파 전통을 원용했으며 이슬람 해석에 매우 정통적인 입장을 취했고 범이슬람 사상을 견지했음. 여기서 수학했던 이들이 파키스탄에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설립․운영하며 아프간에 울레마를 대거 배출했음. 이후에는 와하브주의자나 다른 이슬람주의자들도 마드라사를 설립-운영했음.
- 울레마는 아프간 정부의 성격을 더욱더 순수한 이슬람에 근접하도록 하려고 했고, 외세의 압력은 이런 울레마의 결의를 더욱 강화시켜오게 했음. 또한 아프간 왕조들도 대체로 샤리아 율법이 지배와 결합을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보았음. 하지만 부족 및 촌락공동체들은 국가 관리에는 크게 호응하지 않았고 대개 대항했음. 울레마는 근대화-개혁운동을 전개하는 정권에 일관되게 반기를 들었고, 모든 정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일 정도로 확실한 힘이 있었음. 특히 1929년 나디르 칸 통치 시기 울레마 집단이 모든 법과 규율을 통제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됨. 1930~40년대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 유지함.
- 1944년부터 샤리아 율법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하고 이는 1950년에 카불대학 신학부 설립으로 발전함. 이전의 울리마들은 데오반드나 카이로에 있는 알 아자르에서 교육을 받아왔지만 이제 스스로 학교에서 교육을 시행할 수 있게 됨. 그리고 파키스탄 신학자인 압둘 알라 마우두디 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음. 마우두디는 사회변화를 추진할 때 권력자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최고 엘리트주의자였음. 이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추구한 무슬림형제단과는 정책이 다름. 또한 그는 상황 변화에 따른 적절한 해석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샤리아법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옹호했음. 이런 마우두디의 영향력은 아프간의 울레마를 비롯해 이후 탈리반에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 탈리반의 정책과 집행은 이와 매우 유사함.
- 이후 소련의 침공은 이슬람 저항운동을 촉발시키고 결집시키게 했음. 무자히딘 정당들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모두 나름의 재해석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주장했음. 즉, 무자히딘 정당들은 대부분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된 것임. 소위 전통주의 정당들은 울레마, 물라, 부족장, 부족원로들의 지지를 유도하려고 했음. 그러나 이러한 세력들 간에는 상당한 이견과 스펙트럼이 있었고 쿠란과 하디스의 재해석한 정치 이념들은 전통적 규범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많았음. 소련 점령 시기에는 소련식 혁명운동 구조를 차용하기도 하며 고도로 조직된 조직원네트워크를 갖추기도 했음. 그럼에도 울레마의 지역․부족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음.
- 탈리반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정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슬람주의 무자히딘 정당들과 차이를 가졌음. 오직 국가 통치를 위해 샤리아법을 유일한 원천으로 삼고 울레마의 지침을 기대했음.
- 인민민주당과 소련 점령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통치자는 상대적 차이는 있으나 울레마 집단의 지도를 존중하거나 따랐음. 울레마는 시민사회를 운영하는 수준임.
4. 무자히딘과 이슬람 운동
* 무자히딘 또는 무자헤딘 : 전사 또는 투쟁하는 사람들, 육욕과 싸운다는 ‘무자하다’에서 나온 말.
- 1979년 소련의 침공은 분쟁을 매우 극심하게 만들었고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더욱 커지고 단결시키게 했음.
- “이슬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이슬람의 일상 경험, 즉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해석된 이슬람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통찰력이다.”(Roy)
- “무자히딘은 언뜻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복합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피터 마스던)
(1) 무자히딘 운동의 성격
- 여러 언론 매체들은 무자히딘을 산꼭대기에서 로켓과 포탄을 발사하는 아프간 전사로 똑같이 형상화하면서 매우 단순한 이미지로 포장하지만 이 운동을 대표하는 여러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실제 어느 정도로 이 운동을 대표하는지 살펴보아야 함.
- 무자히딘을 정확히 말하자면, 소련군과 인민민주당에 대항해 무장을 하고 스스로를 지하드(성전에 참여하는 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임.
- 이 전사들은 지역 차원에서 각기 다른 지도자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몇몇이 실질적 실력자로 등장했음. 이 운동은 직접 인민민주당을 상대하기 위해 소련군이 떠나도록 하고 인민민주당의 군대 이탈자를 규합해 세를 확보했음. 또한 아프간이 세속 세력에 훼손되어 더 이상 이슬람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주민들이 이웃 이슬람 국가로 탈주하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했고 그로 인해 무자히딘 운동 당시 320만 명이 파키스탄으로, 290만 명이 이란으로 피난을 가는 난민이 발생함. 이 난민들을 국경 주변 난민 캠프에 수용, 식량배급을 비롯 교육 시설(이슬람학교)을 제공받았음. 이들 난민들은 훈련을 받고 다시 아프간으로 들어가기도 함. 무자히딘은 이들 모두를 포함함. 이들은 조직적 집단과 연계되어 있기도 하고, 농촌이나 부족 공동체의 일부로 행동하기도 함.
- 70년대 중반 다우드 정부에 의해 파키스탄으로 쫒겨난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지도자들은 저항운동을 위해 지하드를 선포했는데, 이들을 열렬히 환영한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부토 대통령은 페샤와르에 이들의 사무실을 내도록 허용했고 군대 조직을 위한 자금지원을 아끼지 않았음. 부토 정권을 전복한 지아는 파키스탄이 조종할 수 있는 아프간 정부를 세우려는 야망이 있었고, 파슈툰 족에 대해서 경계가 있어 적절한 동맹 세력으로 이슬람주의 정당들을 택함. 또한 미국 역시 1979년부터 이들을 지원했고 86년부터는 무기 제공을 비롯해 공개적으로 대규모로 지원했음. 이를 통해 이전에는 미미한 존재였던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대폭 지위가 격상되었고 아프간 내 지도부는 이에 반발했음. 수많은 새로운 조직들이 생겨났고 파키스탄 정부는 군사지원을 했는데, 80년대 말 파키스탄 정부는 이 중 7개 정당만을 인정하며 나머지는 이들 세력과 제휴를 맺어 지원받으라고 발표함. 4개는 이슬람주의 정당이고 3개는 아프간 내 전통주의자 세력임. 이들은 수니파 이슬람이며 ‘자미아트 이 이슬라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슈툰 족임.
(2) 무자히딘 정당들
○ 자미아트 이 이슬라미(이슬람회) : 지도자는 라바니, 마수드
- 1972년에 형성된 최초의 이슬람주의 정당. 지도자 부르한누딘 라바니(타지크 족, 북동부 지역 출신)는 카불대학에서 이슬람 신학을 가르쳤음. 라바니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는 것에 깊은 감화를 받고 이슬람 원칙에 맞는 사회 재구성 작업을 구상함. 그러나 합의에 따른 의사 결정 전통과 관행을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 1976년에 당내 견해 차이로 인해 당이 갈라지고 새로운 당(히스브 이 이슬라미)이 출현함. 권력 쟁취를 착수하기 이전에 광범위한 대중적 운동을 구축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보다 급진적인 조치를 원했음.
- 아흐메드 샤 마수드(타지크 족)는 카불대학교 공대 학생 시절에 합류했으며 소련 점령기에 큰 전공들을 세웠음. 판즈시르 계곡에서 카불의 북동부 지역에 걸친 저항 세력을 이끌었고 이 지역 행정 체계를 지도했음. 무자히딘 집권 시기에는 수도의 치안과 방어 책임을 맡았고 2001년까지 탈리반의 북부 진격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 2001년 9월에 암살당함.
- 자미아트는 북부에 있는 소수 부족인 타지크 족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자리잡음.
○ 히스브 이 이슬라미(이슬람당) : 지도자는 헤크마티야르
- 1979년에 자미아트 이 이슬라미가 분당하며 생겨남. 지도자인 헤크마티야르(파슈툰 족, 쿤두즈 출신)는 카불대에서 공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고 소련식 조직 모델을 채택해 피라미드 형태 권위 구조를 가진 세포조직 기반의 운동을 만들어냈음. 헤크마티야르는 현존하는 전통과 구조를 모두 타파하고 보다 순수한 이슬람 국가를 창조하길 원했음. 주로 난민들을 중심으로 전사들을 모아 활동했고 교육을 중시해 파키스탄에서 많은 학교를 운영했음.
○ 히스브 이 이슬라미(할리스) : 지도자는 할리스
- 1979년 히스브 이 이슬라미의 팍티아 주 부족 지도자 출신인 유니스 할리스가 독자적인 길을 주장하며 분열해 나옴. 할리스는 인도 델리에 있는 데오반드 이슬람 신학교에서 훈련받음. 데오반드 신학교는 수세기에 걸쳐 아프가니스탄 율법학자를 배출한 곳. 부족 사회의 가부장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 탈리반의 지도자 물라 오마르가 이 때 여기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따라서 탈리반의 신념은 데오반디즘의 일종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며 이는 파슈툰 족이 많이 따르고 있는 하나피 학파의 샤리아법이기도 함.
○ 이티하드 이 이슬라미(이슬람 단결) : 지도자는 사이야프
- 카불대 교수이자 라바니의 부관을 역임한 바 있는 압둘 라술 사이야프가 조직했음. 인민민주당 정권에 구금된 바 있고 파키스탄에서 독자적 이슬람 정당을 세웠음. 그러나 카불에 머물러 있었고 항상 사우디아라비아와 밀착관계를 유지했으며 많은 지원을 받았음. 사우디의 와하브주의와 많은 유사성이 있음.
○ 아프가니스탄국민해방전선 : 지도자는 무자디디
- 1980년에 결성했고 특정 이념 없이 농촌 사회에 기반을 둔 전통주의자 당 하나. 파튜슌 족 집안 출신으로 전대 왕가와도 연관이 있음. 자히르 샤 왕의 복귀를 강력하게 옹호했고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과도 접촉했음. 남부 지역의 지지를 받았음. 흐루시초프 소련 대통령 방문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수감된 적이 있지만 군사력은 크지 않았음.
○ 하라카트 이 인칼라브 이 이슬라미(이슬람 혁명운동) : 지도자는 무함마디
- 1980년에 이슬람 학자인 나비 무함마디가 조직함. 당권을 여러 울레마와 농촌의 물라에 기초함. 남부 지역에서 지지를 받음. 물라는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울레마에게 수학하던 학생과 함께 인민민주당에 대항한 자들이며, 등장하자마자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음. 그러나 조직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지들은 자미아트나 할리스로 옮겨감. 이슬람 율법의 철저한 적용 이외에는 특별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
○ 마하즈 이 밀리 이 이슬라미(이슬람 국가회) : 지도자는 가일라니
- 수피 운동과 연관되어 있음. 지도자 피르 가일라니는 남부의 파슈툰 족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칸다하르에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 자히르 샤 전왕을 옹호했음. 가일라니는 온건 자유주의자로 다른 무자히딘에 비해 식자층 전문가 계급에 경사되어 있었음.
○ 그 외 시아파 정당
- 시아파 정당 중 가장 큰 정당은 히스브 이 와다트(통일당)이며, 이란 정부가 지원했음. 압둘 알리 마자리의 지도 아래 아프간 중앙 하자라자트 지역을 차지함.
- 다른 시아파 정당인 하라카트 이 이슬라미(이슬람운동)는 쉐이크 아세프 무시니가 이끌었으며 추종자들은 주로 도시에서 교육받은 시아파였음.
(3) 무자히딘의 성장배경과 분열
- 파키스탄 정부는 난민을 통제하기 위해 무자히딘 정당들이 난민 캠프에서 사무소를 열게 함. 난민들은 배급품을 받기 위해서 어떤 정당이든지 간에 특정 정당의 소속원이 될 수밖에 없음. 즉, 무자히딘 정당들은 징집과 기지로서 난민캠프를 활용함. 그 결과 정당들은 빠르게 거대 세력이 됨. 이 가운데 헤크마티야르의 ‘히스브 이 이슬라미’가 가장 각별한 지원을 받음.
- 무자히딘은 소련 침공 전까지만 해도 큰 세력이라 할 수 없었으나 소련 침공이 계기가 되어 또 파키스탄과 미국의 대규모 지원에 힘입어 큰 세력으로 자라난 것임. 그러나 무자히딘의 통일성은 소련군 철수 이후 근거를 잃어버림. 연대는 깨졌고 싸움이 지역화되면서 내부 집단 사이 투쟁이 전개되고 나아가 촌락끼리, 이웃끼리, 형제끼리 싸우는 골육상쟁으로 격화됨. 촌락의 장로 중재도 실패할 정도. 페샤와르 상황도 마찬가지 상황이 전개됨. 실제로 각 세력들은 정치권력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향한 내전이 이어진 것임.
- 당시 내전에는 크게 4가지 세력이 있었으며, 타지크 족 라바니와 마수드가 이끈 세력, 파슈툰 족 헤크마티야르가 이끈 세력, 시아파 하자라족이 이끈 세력, 북부 군벌인 도스탐 세력임. 북부 군부 지도자 라시드 도스탐(소련군 사령관 출신, 우즈베크 지역 출신)은 북부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였는데, 나지불라 정부 시절에는 정부를 도와 무자히딘과 싸웠으나 1992년에 마수드와의 거래하여 무자히딘의 카불 진입을 도왔음. 이를 통해 카불을 장악하고 인민민주당 정권을 몰아냄. 도스탐은 긴 머리와 종아리까지 닿는 바지로 유명한데 약탈과 강간으로 그 흉포함이 자자했음.
- 이들 세력들은 권력 분점을 두고 서로 연합하거나 적대하면서 내전을 벌였고 이런 내전은 탈리반을 등장시키는 배경이 됨. 각 지역들에서 각자의 점령들이 일어남. 한 세력이 한 지역을 통제할 때는 다소 안정을 찾았으나 한 지역을 두고 여러 세력이 각축을 벌일 때는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음. 무자히딘 정부는 7개 정당의 연합 정부였을 뿐임. 이마저 권력 싸움으로 안정된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음. 탈리반에게 축출된 후에는 무자히딘 세력들은 의미있는 세력이 되지 못함.
- 결국 소수파 정권이었던 인민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소수파 정부였을 뿐임. 쉴새없이 권력투쟁에만 몰두함으로써 대중들을 크게 낙담시켰고 지지를 받는 데 실패했음.
5. 탈리반과 이슬람 운동
* 탈리반 또는 탈레반 : 학생들(신학생), 구도자.
-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은 영역에서 탈리반과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음. 따라서 탈리반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봐야함. 그러나 이미 이미지화된 부정적 고정관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함.
- 분명한 신념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을 지도할 이론가는 없음. 파슈툰 부족의 관습과 관행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종교 사상에는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무자히딘 정당들의 이념은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다른 이슬람 주요 이론가들로부터는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음.
- 카불 등 일부 지역에서는 전혀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많은 점령지에 대중적 지지를 받았음. 이는 내전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정을 희구하는 민중들의 지지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음. 특히 약탈과 강간을 일삼았던 무자히딘 정당들과는 달랐기 때문에 등장 초기 지지는 순식간에 급상승했음. 그리고 탈레반을 배출해오던 2500개 마드라사의 통계를 따르면 상당히 많은 고아들이 모여들었음. 따라서 노골적인 비난과 관계의 단절은 불가능함. 그러므로 매우 불확실하지만 탈리반의 정책이 형성되고 그것이 실현되는데 미친 여러 가지 문화적 종교적 영향들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음.
-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세계의 무지가 부끄러워서 쓰러진 것이다. 불상의 위대함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마흐말바프)
(1) 탈리반 운동의 특징
- 1994년 초 칸다하르의 작은 자발적 집단(오마르는 칸다하르 서쪽 신게사르 마을에서 작은 마드라사를 운영)에서 출발한 것으로 파악됨. 그 구성원들은 무자히딘이 도시에서 오로지 권력투쟁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에 분노하여 무자히딘의 해동을 타락한 것으로 간주, 이를 종식시키고자 행동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짐.
- 외부 세력들이 자기들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만한 잠재 세력으로 탈리반을 주목했고 후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음. 파키스탄, 미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원했음.
- 아프간 청년들의 자발적 참여가 상당한 힘이 되었음. 주로 농촌 지역과 파키스탄 국경 난민캠프에서 참여함. 특히 난민캠프에서 급진주의 이슬람을 추종한 사람들이 탈리반 운동을 확장시키는 데 공헌을 함.
- 또한 탈리반 운동 지지자의 절대 다수는 파슈툰 족임. 그러나 이것이 파슈툰 족의 운동인지는 많은 논쟁이 있음. 탈리반은 이 운동이 모든 민족 집단에 열려있다고 공언하고 있고 몇몇 주요 지도자가 파슈툰 족이 아닌 것은 사실임. 그러나 탈리반 운동은 절대적으로 수니파에 속하고 시아파를 포용하지 않는 것은 사실임.
- 탈리반 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파슈톤 족)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 그는 칸다하르 슈라를 통솔하는 것으로 다른 지역들을 슈라를 통치하고 있음. 이처럼 탈리반 내에서의 의사 결정은 합의제로 이루어짐. 오마르는 반소 투쟁(할레스)에서 이름을 날렸으며 이 때 한쪽 눈을 잃음. 공적 자리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외부 세계와 관련된 업무는 모두 부관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군사를 조직하는 데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또한 매우 경건하고 검소한 삶을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 탈리반 운동은 전사들의 자기 헌신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상당수 전사는 순교를 이미 목격한 바 있음. 또한 전사들에게 서구적 가치를 따르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하고 있음.
- 탈리반은 오직 군사 정벌, 부패 일소 그리고 법과 질서의 확립에만 관심을 가졌고 행정 구조를 유지하는 것에는 관심이 크지 않았음. 탈리반은 아프간 문제의 해결을 전국 통일로 바라봤음. 집권 후에는 선행증진악행방지부를 설치해 종교 경찰을 통한 주민 통제 및 정책 집행을 하였음. 그러나 여러 정책들이 모순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 혼란을 일으킴. 이로 인해 내부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계기가 됨.
(2) 탈리반 운동의 과정
- 등장 : 파키스탄 무역 호위대가 북부의 퀘타를 통해 아프간에 들어오자 한 무장 조직이 이를 급습했는데, 그 즉시 다른 조직 하나가 이 무장조직과 싸워 무역 호위대를 구출함. 이들이 탈리반이었음. 탈리반은 곧바로 칸다하르로 향했고 아무런 저항없이 도시를 장악함. 칸다하르는 여러 무장세력들이 충돌하던 곳이었는데, 탈리반이 이곳 무장세력들을 처형하면서 주민들에게 무기 반납 및 새 정권 창출에 협조를 호소함. 주민들은 온전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임.
- 탈리반은 여성들을 납치-강간했다는 남부 군벌을 처형하면서부터 명성이 자자해지기 시작함. 미국과 파키스탄 등 외부세력들은 탈리반의 잠재력을 믿고 집중 지원했음. 사우디 등 아랍국가들도 이란-시아파의 확장을 의식해 지원하기 시작했음. 몇 개월만에 탈리반이 아프간 남부를 장악함.
- 탈리반은 썩은 권력에서 아프간을 구하고 이슬람고 일치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자기들 사명이라고 발표함. 그리고 남녀 복장 규정(남자는 터번을 쓰고 샬와르 카미즈를 입고 턱수염을 길러야 하며, 여자는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를 입어야 한다는 법령),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여성들의 책임(무슬림 양육), 여학생 교육(이슬람 종교학자들이 최적의 이슬람 교육과정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 함), 음악과 놀이 금지, 사람과 동물 형상의 조형물 제작 금지 등에 관한 법령을 반포함.
- 칸다하르에서 질서를 세우는 데 성과를 거둠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기 시작함.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 대한 대중적 신임도 얻게 됨. 이미 타 지역 정벌에 나설 때는 명성이 자자해져 많은 조직들과 도적 집단들을 쉽게 제거하게 됨. 신속하게 무기들을 수거했고 대중들에게 함께 전사가 될 것을 권유하며 병사를 확보함. 4개월만에 아프간의 절반을 차지했고 무자히딘 정부와 북부의 큰 세력들이 있는 곳까지 다다름. 한동안 교착 상태에 놓임. 탈리반이 이스마일 칸이 지배하고 있던 헤라트와 서부지역을 장악하자 북부 세력들과 군벌들은 단결해 탈리반을 저지하려 함. 헤라트에서는 탈리반이 환영받지 못했음. 이미 헤라트는 이스마일 칸에 의해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와 여성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단 점령으로 받아들임. 또한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달랐음. 그로 인해 헤라트 주민들은 이란으로 다시 빠져나갔음.
- 이후 탈리반은 누구도 뚫지 못한다는 사로비 협곡을 돌파하며 치열한 교전을 치른 후 카불에 입성하고 인민민주당 집권 시절 나지불라 대통령과 형제들을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했음. 카불은 이미 오랜 내전으로 처참한 상태였고 주민들은 극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탈리반에 기대를 걸었음. 이를 알고 있던 집권세력인 라바니와 마수드는 탈리반과 싸우지 않고 북부로 도망갔고 이는 탈리반에 또 한번 무적의 이미지를 만들어줌. 탈리반은 곧장 북부로 향했고 살랑 고개에서 도스탐과, 판즈시르 계곡에서 마수드 군대와 마주침. 도스탐과 마수드는 내전 때의 적대감을 버리고 동맹을 형성함. 이 동맹은 탈리반이 카불 북쪽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저지했고 교착 상태가 지속됨. 이 지역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난민이 됨.
- 시간이 지나면서 탈리반의 강압적 규제와 공포 정치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함. 새로 발생한 난민들을 위한 캠프가 파키스탄에 마련됨. 점점 행정 능력이 있는 숙련 전문인들이 고갈되어 감. 또한 급격한 팽창으로 앞뒤가 다른 발표가 잇따랐고 일부 군인들은 명령체계 없이 움직임.
- 탈리반은 초기의 과도한 통치의 과오를 인정했으며 오마르는 탈리반에 주민들을 좀 더 따뜻하게 대하도록 호소하기도 함. 그러나 탈리반은 여전히 전국을 장악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난민의 문제와 삶의 문제들을 등한시했음. 많은 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져있었으나 북부동맹의 지역 사령관들이 속속 탈리반으로 옮기면서 교착 상태가 조금씩 깨짐. 하지만 이란이 시아파를 탄압하는 탈리반 확장에 긴장해 북부동맹을 지원하자 교착상태가 다시 지속됨. 또한 탈리반은 점점 징집이 어려워졌고 남부에서도 반대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함. 탈리반은 2001년 9월 초 마수드 암살에 성공해 북동부 나머지 지역을 장악할 기회가 생겼으나 9․11 테러는 탈리반이 더욱 시급한 문제로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함.
- 어쨌든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고, 파키스탄 난민 캠프에서도 큰 지지를 받았음. 헤라트와 카불 등에서 엄격주의 가치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동안에도 지원자 충원에 어려움이 없었음. 남부 전역에서 부족과 촌락 장로들의 굳건한 지원도 계속되었음. 또한 나라 밖 아프간 사람들에게서도 2001년 2월 바미얀 불상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동조를 받았음. 왜냐하면 탈리반이 적어도 이전에 있었던 자들보다는 나은 자들이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
(3) 탈리반의 신조와 강령
- 도대체 왜 이 종교적이고 정치적 운동이 출현했고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으로 지지를 받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음. 여기에는 사회 개선의 전망을 제시한 것과 원칙들과 윤리적 규약들이 포함될 것임.
- 다른 종교처럼 이슬람 역시 타락에 맞서는 부흥 운동이 있으나 한편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타협이 가능한가에 대한 관점의 차이도 필연적으로 존재함. 그러나 이 운동들은 엄격주의 형태를 띠었고 사회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했음. 종교지도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사회가 종교적 믿음을 상실한 채 세속의 물결에 빠져드는 것이며 서양의 세계 지배는 이슬람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변화할 것을 자극하기도 했음. 그 가운데 일부는 이슬람 세계가 서양에 비해 우월하다는 관점을 고수하면서 서양의 좋은 점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으며, 다른 일부는 이슬람 세계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고 환경을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서양적 가치 전부를 거부하여 제거하고 이슬람의 핵심 요소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음. 특히 서양의 영향을 경험한 가난한 무슬림 주민들은 불이익과 소외에 대한 대응으로 급진 이슬람을 택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샤리아 해석 학파 중 일부가 철저한 비타협 노선을 취했음.
- 탈리반은 카불 장악 후 자신들을 설명할 때, ‘처음에는 무자히딘을 믿었으나 부패와 범죄로 일관하며 여성들을 공격하고 강간해서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봉기를 결의했다’고 밝혔음.
- 탈리반의 목표는 오직 아프간의 정화이며, 아프간 경계를 넘지 않으려 했음. 외교 문제는 국내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 때 시행한다고 밝히기도 했음. 고통과 압제에서 벗어나고 아프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무기를 모으고 봉건 권력을 청산해 아프간에 강력한 이슬람 정부를 수립하겠다고 밝혔음. 이는 국경을 전제하지 않는 다른 이슬람 운동과 차이를 보임.
- 샤리아 후두드(처벌규정)에 대한 부분이나 복장과 예절의 부분(특히 여성의 히잡 수준)에서 탈리반의 신조를 읽을 수 있음. 동시에 탈리반은 외래 문화와 이념의 모든 자취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음. 이전 개혁운동 시기나 소련 점령기 등을 거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망을 각인시키기 위해 노력했음. 그러나 탈리반 내부에서도 성의 문제나 서양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 등에서 다른 입장들이 있었음.
- 탈리반은 전통 합의 도출 방식에 의존했음은 분명함. 지르가를 확실히 보장했으며 그 의견을 많이 따랐음. 또한 울레마의 의견에도 크게 의지했으며 9․11 테러로 빈 라덴을 미국에 넘겨야 할지를 결정할 때도 울레마는 탈리반을 호출했었음.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파슈툰 족 사회의 관행에 의존하고 있느냐는 분명치 않음.
(4) 이슬람주의의 영향
- 탈리반은 여러 이슬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임. 주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브운동,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압둘 알리 마우두디) 등. 그외 이란 혁명과도 유사점이 있음. 어떤 특정한 운동에 완전히 영감을 받아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분명 여러 이슬람 운동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
- 무슬림형제단(이집트)은 세속적 가치들에 저항하며 불의와 퇴폐에 분노하며 대중운동으로 성장함. 사회정의 실현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음. 대표적 이론가는 무함마드 가잘리이며 범이슬람 사상을 가지고 있음. 또한 이슬람 정권이 순수하지 못하다면 무기를 들고 맞설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지하드를 통해 전복한다는 신조가 있음. 이슬람 가치에서 타락한 정권을 전복한다는 점에서 무슬림형제단과 비슷함. 그러나 탈리반과는 샤리아 해석이 다르며 범이슬람 사상도 탈리반에겐 없었음(1988년 미국 공습을 계기로 탈리반도 범이슬람 사상을 걸치게 됨).
- 와하브 운동(사우디)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1703~1787)에 의해 창시됨. 이 운동은 19세기에 사우디에서 권력을 장악함. 이슬람의 의례와 실천이 잘 준수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고 자신들이 진정한 신도라 주장했음. 또한 우상 숭배, 불의, 부패, 간음의 죄에 대한 지하드 착수, 예술과 장신구 착용 금지 등을 주장했음. 이후 20세기 초 압둘 아지즈 이븐 압둘 라흐만 알 사우드에 의해 다시 시작됨. 진정한 이슬람 공동체를 주장하며 비이슬람 행태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음. 또한 울레마와 종교 경찰로 이루어진 ‘선행증진악행방지를 위한 위원회’를 설립해 이슬람 의례를 준수하지 않는 자를 처벌했음. 이후 권력을 장악했고 국경을 넘어 전쟁을 계속함. 그러나 압둘 아지즈는 자신의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고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음. 1932년 자신을 왕으로 하는 이슬람 왕조를 세우고 현재까지 이르고 있음. 탈리반 운동은 이와 많은 유사성이 있음. ‘선행증진악행방지위원회’를 만들어 감시-통제-처벌한 방식이 이와 거의 유사하며 순교에 동원했으며 자신들의 이슬람 해석이 유일하게 옳다고 주장했음. 또한 극단적 엄격주의도 일관되게 같음.
- 파키스탄의 마우두디 사상은 탈리반과 많은 유사상이 있음. 서양의 가치와 타협하지 않고 오히려 서양이 이슬람 가치 체계를 존중하고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음. 이슬람을 해석할 권리과 자신만 옳다는 주장 역시 같음. 여성의 사회적 격리 또한 비슷함.
- 데오반드 이슬람 학부, 파키스탄 이슬람주의 정당 등은 파키스탄에 마드라사(이슬람 학교)를 운영하며 아프간에 울레마를 배출했음. 와하브주의자나 다른 이슬람주의자들도 마드라사를 설립-운영했음.
- 탈리반이 이슬람주의 무자히딘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들이 2가지 있음. 하나는 무자히딘의 형식적 이슬람주의와는 달리 실제로 샤리아법을 행동지침으로 삼았으며 무자히딘보다 훨씬 경직되었다는 점임. 다른 하나는 파슈툰왈리(파슈툰 족의 전통규범. 복수, 환대, 보호 등)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