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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풍수지리!!

윤종환 |2008.02.14 19:14
조회 158 |추천 2

 

숭례문과 풍수지리


서울이 조선의 도읍지로 정해진 것은 태조 3년인 1394년이었다. 이때부터 경복궁을 착공하고, 동서남북에 4대문을 내고, 4대문을 연결하는 내성(內城)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태조 7년에 1차 완성을 본다.

 

조선왕조는 궁궐이나 도읍을 정할 때 풍수지리를 중시했다. 왕조 창건 때는 궁궐(경복궁)의 위치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한강 남쪽에서 오는 화기를 막으려면 궁을 동향으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중국의 제왕들은 모두 남향으로 궁궐을 세웠다”며 남향을 고집했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바위로 된 악산(관악·인왕·도봉산)에서 발생하는 화기를 막기 위해 풍수적 장치를 곳곳에 해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숭례문이다.

 

 

◇화기 넘어오는 길목=풍수지리학자들은 숭례문이 관악산의 화기가 한강을 넘어오는 기세를 막는 길목에 위치했다고 보고 있다.

숭례문의 현판을 세로로 쓴 것도 정궁인 경복궁과 도성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숭례문(崇禮門)의 한자를 세로로 보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다. ‘불은 불로 막는다’는 풍수 이론에 따랐다고 한다. 또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팠다. 지금 남대문에서 서울역 쪽 방향에 판 조그만 연못인데 역시 화기를 누르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지금은 이 연못 터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는 '이 연못을 장원서(掌苑署)라는 부서에서 관리하였다'는 내용의 표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조선 왕조는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의 길도 직통으로 내지 않았다. 종각과 종로를 거쳐 우회하는 길을 만들었다. 길을 곧게 낼 경우 숭례문을 넘어선 화기가 경복궁에 바로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광화문 앞에 해태상 한 쌍을 세웠다. 물 기운을 몰아온다는 바닷속 상상의 동물인 해태는 관악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불길을 집어삼킬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흥선대원군 역시 무학대사가 강조했던 관악산 화기를 제압하기 위해 해태상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해태상 옮긴 게 화재 원인?=숭례문 화재를 놓고 풍수학계 일각에선 다양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광화문 앞에 놓여 있던 해태상의 이전이다. 이 해태상은 서울의 대화재를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해 왔는데 광화문 복원 공사로 치워지면서 이런 참사가 빚어졌다는 얘기다.<출처 중앙일보>

 

 

관악산은 생긴 형상이 마치 관(冠)처럼 뾰족한 아름다운 바위산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자태로 인해, 예로부터 쳐다보기도 꺼려지는 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왕도남방지화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삼막사가 자리 잡은 바로 옆의 삼성산 또한 같은 취급을 당하였다.

 

조선 초기 도읍 터를 정하는 과정에 있었던 무학(無學)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 대립은 대개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관악산을 정남향으로 바라보고 궁궐을 세우면, 관악산의 살기가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먼저 있었다. 화기는 화재와 병란을 암시한다. 그러자 남쪽에 둘리어진 큰 강물인 한강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아내니,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으로 궁궐을 세워도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대두하였다. 결국, 궁궐은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을 하고 세워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한양에 정도(定都)한 이후로 도성에는 왕자의 난과 화재가 연이었다. 그래서 풍수설에 따라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를 끊는다는 비보책(裨補策)으로, 서울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 연못뿐만이 아니다. 남대문의 현판에 숭례문(崇禮門)이란 글씨도 결국 세로로 쓰여지게 되었다.

 

현액(懸額)의 글씨는 가로로 쓰는 것이 관례이다. 숭례문이란 현액을 세로로 쓴 것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화기가 도성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에서였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이다. 그리고 예(禮)란 글자를 오행(五行)으로 따져보면, 이는 화(火)에 속한다. 화를 오방(五方)으로 따지면 남(南)에 해당한다. 따라서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뜻이 되니, 이는 맞불 작전인 셈이다.

 

그리고 모양으로 보아, 숭례(崇禮)라는 글자를 세로로 써야 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숭례문의 화기로 불산에서 옮겨오는 불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세로로 쓴 숭례문의 현판이 정도전의 솜씨라는 점이다. 결국은 정도전이 무학대사에게 지고만 꼴이 되었다.

(관악산과 풍수지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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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숭례문의 글씨는 태종 때의 명필인 신색의 글씨라고도 하고, 또 중종 때 공조판서를 지낸 유진동의 글씨라고도 하나, 더 많은 사람들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말한다. 한때 이 숭례문의 현판이 행방불명된 적이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청파역 아래 배다리 밑에서 밤이면 이상한 서기가 비치더란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배다리 아래로 내려가 보니 흙탕물 속에서 숭례문의 현판이 서기를 내더라는 것이다. 명필은 땅속에 묻혀도 빛이 난다고 했는데, 숭례문의 현판이 바로 그 예가 아니었는가.

[한양 이야기 (조선왕조 500년의 도읍 한양 읽기)]

 

모양으로 보아, 숭례(崇禮)라는 글자를 세로로 써야 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숭례문의 화기로 불산에서 옮겨오는 불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와 함께 현재 광화문 복원공사로 치워졌지만 경복궁 보호를 위해 광화문 앞에 세워졌던 해태상 역시 관악산 화기를 막는 역할을 위한 것이었다. 해태는 물 기운을 몰아온다는 바닷속 상상의 동물이다.

 

1. 조선은 인의예지의 이념 위에 세워진 국가이고, 숭례문은 그 중 '예'를 상징한다.

2.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숭(崇)과 례(禮)라는 모두 한학에서 불에 해당하는 글자들을 남쪽에 두어, 관악산의 화기에 맞불을 놓아, 국가적으로 좋지 않은 일을 막는다.

3. 현판이 세로로 쓰여진 까닭은, 숭과 례라고 하는 불을 상징하는 글자들이 더욱 더 활활 잘 타오르도록 하여, 2번의 목적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실록에 보면 당시 정도전이 말하였는데..자기가 만든 이 숭레문이 훗날 불타 소실될 날이 올것이니 ..이때는 서울 장안의 모든 백성들은 다른 지방으로 피난을 가야한다고 일럿습니다. 또한, 이 징조는 즉, 서울 한양의 500년 고도의 국운이 다한다고 서산대사가 예언한것과 일치합니다. 무학대사는 북한산을 기준으로 사대문을 만들고 풍수에 따른 많은 한양천도의 예언을 왕(태조 이성계) 에게 알렸는데. 그중 숭례문이 전소되면 이나라 한양의 고도도 끝내 그 운을 다하고 수명이 다했다고 알립니다.즉, 이나라 국운도 곧 쇠퇴한다고 알렸으며 이 이치는 전세계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숭례문 100년전 사진(출처 : 야후블러그 http://kr.blog.yahoo.com/kowg50/40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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