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 이야기의 저자의 부친 요시오 가와시마는 만주 목단강 철도 건설사무소의 하위직 고원이었습니다.!
세간의 의혹이었던 일본 731부대 고위간부나 만주철도의 고위관리는 아니었습니다.
본건과 관련된 상세한 증거자료는 속초 일본 731조선인 마루타 희생자 박물관에서 확인 하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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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요코이야기의 역사왜곡으로 인한 반한 감정의 심화에 대하여 듣고 진상조사에 착수한 이래 많은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척이 없어 일본에 출장조사한 결과를 보고 드리고 져합니다.
1. 이시이 시로와의 연관성을 조사코져 확인 하였음.
먼저 이시이 시로의 근무지인 일본 육군병원 근처에 살던 주택을 방문하여 탐문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시이가 일본으로 귀환후 거주하던 집으로 현재 맨션으로 개축되어 있었습니다.
번지는 신쥬쿠 와카마스가 22-30번지 였습니다. 맨션의 이름은 사마리아 맨션입니다. 악마의 포식의 출판으로 사회문제가 되기전에는 이시이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합니다. 아직도 동201호에는 이시이 이름의 인척이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일본에서 이시이는 군신으로 추앙받고 있어 이름을 감추거나 개명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추가로 동주택의 등기부등본을 요청 의뢰하였습니다.호적등본에 대해서는 유명인사라 법률적부담을 느끼는바 고액의 비용을 지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뒤 이시이 시로의 무덤이있는 근처 월계사를 방문하였으나 무덤의 진입을 거절한바 부득이 몰래 월경을 하여 무덤을 확인한바 이시이가 부인 청자와함께 조촐하게 개축돤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비석을 확인한바 이시이는 소화34년10월9일 67세 사망 다음 소화46년11월23일 이시이공이 35세 차남 사망 소화55년8월3일 이시이의 처 청자 75세 사망 평성4년5월20일 3남 성일 61세 사망이 확인되었으며 본 가족묘는 소화48년 11월 이시이의 처 청자와 3남 이시이 성일 에 의해 당초 목조이던 묘가 방화로 불에 타버린뒤 개축건립되었습니다. 또한 석정 하루미 및 석정지자 , 석정화자의 명복을 비는 축원 팻말을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추가로 이시이의 가족관계를 조사의뢰를 하였습니다만 많은 부담을 느껴 다소간의 시간이 소요될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코 가와시마가 호적을 변조하거나 박영민씨가 의혹을 제기하는 이시이와의 재혼등은 연대를 추정한바 무리일것 같고 연관성은 발견할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2.요시오 가와시마의 조사.
일본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단체를 통하여 후생성에 비공식적으로 1950년대의 귀환자를 확인하고 있으나 근 50만명이상으로 많은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또한 전국의 각 수용소에서 요시오 가와시마의 노동확인 기록을 추적중에 있습니다.
중국 또한 요녕성 문서 보관소에서 기록확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허나 일본에서 확인조사의 경우 다수의 만철등 민간인 들도 러시아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시베리아로 강제이송한 사실을 확인하였고 만철귀환자 친목단체도 결성되어 있으나 요시오가와시마를 아는 사람은 발견 할수없었고 단체가 확보하고 있는 귀환자 명단에서는 발견할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후생성에서 귀환자확인 요청을 비공식적으로 가족관계를 최종확인 중에 있습니다.
3. 요시오 가와시마의 확인.
먼저 일본 시베리아 억류자 단체및 기타 만철 관계자의 협조를 얻어 약 24만명의 1940년 남만주 철도주식회사의 직원록을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일본에서 약20시간 정도 본인이 직접 대조조사 확인 한바 2007년 3월10일 새벽5시에 드디어 요시오 가와시마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결과 요시오 가와시마는 만철의 고위간부나 정식 직원이 아닌 고원으로 목단강철도건설사무소의 하위직 고원으로 근무하였음이 판명 되었습니다.
당시 일반역의 역장이나 조역등도 아닌 역무원 수준의 하위직인 고원입니다.
목단강 철도건설사무소의 조직은 소장은 과장급인 참사 1명 부소장 참사 1명 서무장 부참사 1명 경리장 부참사 1명 차무장 부참사 1명 제1선로장 부참사 1명 제2선로장 부참사 1명 건축장 부참사 1명 전기장 부참사 1명 합계 간부 9명으로 구성 되어있고,
직원 128명 고원90명 용원183명이 사무소에 근무하였으며 기타 기술직 별로 산하에 약 1000명의 직원 고원 용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4.요시오 가와시마에 대한 확인의 의미.
따라서 요시오 가와시마를 모종의 임무룰 가지고 만주에 파견된 정부의 관리로 보기에는 정식직원이 아닌 하위직인 고원으로는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동경대를 나오고 옥스포드에 유학 까지하고 조선총독과 면담하고 외교관 운운 등은 저자 요코 가와시마가 미국에서 주위를 의식하여 자신의 가문에 대한 신분을 높히기위해 다소 과장된 의도가 있었다고 사료됩니다.
따라서 요코가와시마가 소설의 내용에 은연 중 부친의 지위와 인격을 를 높히기위한 과장된 표현과 하위직인 부친의 신분을 공개하기가 부담된 부분이 더욱 한국인의 입장에서 역사왜곡의 개연성으로 큰 의혹을 만들어 낸것으로 사료 됩니다.
또한 요시오 가와시마가 동경대를 졸업하고 옥스포드에 유학가고 1933년에 만철에 입사하여 경제조사부도 아닌 목단강 철도건설사무소에서 7년이 지났지만 단순히 고원으로 근무하면서도 풍족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를 하여 생활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인일 경우 단순히 목단강 철도건설사무소의 일개 고원임에도 자식들을 과외도 하고 일본인으로 풍족한 삶을 조선의 나남에서 살았던것에 대해 당시 억압받고 처절하고 비참한 고통의 역사를 안고있는 우리의 시각에서는 비판과 의문을 가지는 것에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혹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여 미국이나 어린학생들에게 왜곡되게 느낄수 있는 사실을 바로 잡아 역사를 재인식시키고 피해자의 입장에서나 객관적 시각에서 소설의 표현을 느낄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5. 요코 이야기에 대한 본인의 의혹.
먼저 요코의 저자가 기억하는 날짜는 7월29일이 아닌 소련의 선전포고 이후 입니다.
히데오가 보았다는 그들을 많이 도와주며 죽었다는 김씨부부에대해 그렇게 착한 사람을 죽이다니 등의 연민의 정을 표현한 부분에 대하여 김씨부부 스스로 일본의 패망과 함께 본인들의 악행에 대한 보복이 두려워 자살하거나 , 소련의 침공으로 전투중에 희생되었는지 확인이 안되는 상황에 무조건 우리 조선인이 그들을 살해한것으로 간주하여 무고한 사람의 죽임에 대한 한국인에대한 비난을 미국인이나 어린 독자에게 야기시킨것은 큰 오류이며 당연히 교재채택 금지의 사유가 될것입니다.
또한 우리 조선 땅에서 발생된 소련의 침공에 따라 일본과 소련과의 전투중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고 오히려 소련군의 비행기 기총소사에 같은 소련 항일 연군 소속88연대 부대원 조선인들이 희생된것입니다.따라서 그들이 본 많은 시체들은 일본인병사의 시체 들이거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소련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일 것입니다.
또 소설에서 요코가 본 사실이라며 표현한 강간등의 묘사는 당시 일본인들의 경우 일부731부대가족의 피난의 경우 지레 겁을 먹고 열차안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거나 스스로 자결한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과잉반응 이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의 판단은 요코 가와시마가 본 소설의 표현을 부친에 대한 과장된 묘사와 같이 피해부분도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흥미를 집중시키려 하지 않았나 사료됩니다.
결론적으로 요코 가와시마가 평화를 수호하는 거룩한 성녀인 양 하며 은연중에 허위와 과장된 표현으로 한국인에 대한 비난과 모독의 표현은 자신의 위선이라 고 판단 됩니다.
이것은 부친의 행적에 대해 하위직 고원이라는 치부를 감추기 위해 밝히지 않은 행동과 같이 본인의 이기심에서 나온 본인의 가면과 같은 행동으로 밖에 볼수 없습니다.
6.이후
추가로 계속 조사되어 확인되는 사항를 통지하여 드릴것이며 관계되는 사진이나 문서 기록이 필요하면 송부해드리겠습니다.
731조선인 피해자 진상규명위 김창권 2007.3.12
2007-03-12 11:27:00
731조선인 피해자 진상규명위 김창권 2007.3.12
2007-03-12 11:2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