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수행의 대상은 `지금, 여기에 있는, 너의 일로써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살아 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수행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기 싫은일, 나에게 해를 끼쳐 보기 싫은 사람, 성격이 다르고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등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으십시요.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려면 인연법因緣法을 알아야 합니다.
인연이란?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인연이 다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연과 업業(습관;행동의 결과)은 서로 물고 물리는 상관관계입니다.
내가 누구를 때린다면 상대방도 나를 때리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현재의 일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쉬워 인정하기도 쉽지만, 전생(과거)의 일은 확인할 수 없다하여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이치(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를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모든 고통을 그 대상으로 삼습니다.
고통으로서 수행하여 고통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행복, 불행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없으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고통입니다.
궂은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것은 인연 때문에 일어난 거품입니다.
거품은 때가 되면 저절로 없어 집니다.
내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인연임을 알고 그것에 걸리지 않고 궂은 일이 생기면 그것을(경계) 타고 도道(깨달음)에 들어가면 바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끄러우면 공부가 잘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끄러움에 집착하여 그 소리에 걸려 화가나기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시끄러움을 수행의 문으로 삼아서 화를 일으키지 않으면 공부하는데 별 지장을 일으키지 않게 됩니다. 매사가 이와 같습니다.
수행은 인연법을 빨리보고 흔적(業)을 빨리 지우는 것입니다.
수행이 무르익으면 경계가 있어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지워야할 흔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좋은 일과 궂은 일이 반복되는 생활을 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궂은 일이 생기면 화가 납니다.
기뻐할 때는 행복함(만족)을 느끼고 화가 날 때는 불행함(불만족)을 느낌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생활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활하면 행복하게 해 주는 것과 불행하게 하는 대상(경계)에 항상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수행은 선善이라고 해서 취하지도 않고, 악惡이라고 해서 버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중생의 삶에서 도道(禪)의 삶으로 바꾼다는 것은, 기뻐하고 화내고 하는 것을 하고 하지않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중생은 자기와 관련있는 것만을 위해서 기뻐하고 화를내지만 道人은 모두를 위해서 기뻐하고 화를 냅니다.
중생衆生도 도인道人도 꼬집으면 아픔을 느끼는 것은 똑 같습니다.
깨닫기 전에도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깨닫고 나서도 똑같이 합니다.
다만 똑같은 일을 하여도 禪의 생활은 無心으로 하기 때문에 자취(삶의 찌꺼기:業)를 남기지 않습니다.
시끄러운 곳을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아야만 수행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잘 못된 생각입니다.
이미 시끄럽다는 것과 조용하다는 것으로 분별하였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어떠한 분별도 해서는 않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중도中道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