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의 역사는 무수히 많은 의사결정들 속에 이루어진 선택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청년 히틀러가 미술학교 입시에서 좌절하고 독한 마음을 품게 된 것부터,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떠있던 비행사가 상부의 명령을 받들게 된 것까지. 매순간이 어떤 선택에 의해 이루어져왔다. 하물며 인류를 구성 하는 우리 인간 한 개체에게 그 인생의 의사결정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잔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보통 만 12세까지의 사람을 어린이라고 부른다. 어린이들은 말 그대로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보통 많은 의사결정을 보호자에게 위임하곤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나, 그리고 이 글을 보는 당신. 연령은 다양하겠지만 일촌목록을 보거니와 만 16세에서 만19세의 수많은 당신들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을 지언정 많은 의사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있다. 나, 그리고 당신, 우리는 어린이가 아니다. 본인의 의사를 스스로 결정할만큼의 사고 판단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암묵적으로 인정을 받은 '청년'이라고 불리는 단계를 밟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의사결정 권한의 대부분의 본인에게로 위임된 지금 이 시기는 또한 중요한 의사결정과 수많은 선택이 개개인을 둘러싼 시기이기도 하다. 어린이들이 하는 오늘 일기 내용에 대한 의사결정보다는 훨씬 중요한, 학업, 진로, 이성교제 ,교우관계 등, 많은 골치아픈 문제들이 우리의 주변에 난립한다.
물론 디지몬의 완전체에 해당하는 성인이 되기 위한 과도기의 성격을 띤 청년기이기에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선택을 지금 할 필요는 없지만, 그 선택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는 자그마하지만 중요한 선택들을 올바르게 해나갈 시기이다.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야 우리가 청년기에 미뤄두었던 의사결정을 하려면 이미 늦다. 지금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인생의 청사진을 그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고 있을까?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우리는 보통 다수의 의견을 따르곤 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언제부터인가 본말전도의 양상을 띄고 있다.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남들 하는 대로 하면 옳은 것이겠지하고 자기 자신의 제대로 된 선택도 없이 그냥 넘어가기 일수다. 문제는 다수의 선택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 자신의 선택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따라가는 다수의 선택은 치명적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사실 위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사회는 꼭 특정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중 대표적인 것이 다수에 대한 맹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떠한 의사결정을 할 때 그 의사결정의 결과가 찬반 양론이 되었든, 여러가지로 나뉘어 졌든 간에 의사결정 주체의 다수가 선택한 것을 옳다고 판단하는 것은 단지 다수의 선택이 옳은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수의 선택을 '인간의 사고와 판단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한 최선의 선택'이 아닌 불변의 진리,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오래된 법전처럼 여기고 있다. 단지 확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은 뒷전에 두고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수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이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떠한 의사결정에 있어서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며 발전해 온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오히려 다수의 선택이 많은 실패들을 불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칫하면 이 글이 다수결의 원리를 부정하는 글로 해석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수는 언제나 소수의 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고 정의이다. 이 글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수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것을 의사결정 과정의 주(主)로 하되, 다수의 선택의 전적으로 옳다는, 다수결의 오류에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능력에 대한 신뢰를 통해 다수의 선택은 맹신하면서, 왜 인간인 자기 자신의 판단 능력은 뒷전에 두는가?
이는 상대적으로 개개인의 개성 뚜렷하지 못하고, 심지어 개성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 속의 우리나라에서 더 심각하게 이야기 되어진다. 다수의 선택에 대한 맹신이 자기 자신의 의사결정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자신의 의사가 다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맞춰가거나, 심지어 자신의 의사를 생각해볼 틈도 없이 그저 다수의 의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국가가 되었다. 개성없는 일률적인 모습 자체가 한국의 개성으로 드러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바로 우리 옆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성 없는 미래, 막연한 꿈을 꾸는 청년을 양산하는 공장. 학교, 그리고 입시 제도에서 우리는 무개성의 극치, 그리고 다수에 대한 끔찍한 맹신을 찾아볼 수 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콘돔조차도 어떤 것은 구멍이 나있고 어떤 것은 여성배려차원인지 몰라도 딸기향을 풍기게 만들기도 한다던데, 이 나라 이 사회는 어찌된 일인지 딸기고 수박이고 바나나고 모두 같은 바구니에 담아 같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쉽게 말해, 노래에 재능이 있는 청년과 축구에 소질이 있는 청년, 그리고 공부에 비상한 능력이 있는 청년을 모두 다 공부라는 똑같은 잣대로 판단하고 '학생'으로 대우해버리는 세상. 기득권층인 어른들은 주장한다. 다 너희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이 공부 이외의 다른 것에 대해 여유있게 생각하고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탐색해볼 기회는 준 적이 있을까?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시대가 바뀔 때마다 이름 모를 위인들이 입술이 닳도록 얘기하고 주장하고 호소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배움이라는 개념을 공부라는 단어와 100% 동일시 하고 있다.
이 글은 각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겠지만,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는 우리들은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생각해보아야 한다. 공부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며 공부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과연 타인의 어떠한 간섭도 없이 나 스스로 자신의 꿈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말이다. 남들과 다르게 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정말 내가 되고자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일단 공부 먼저 해야지, 이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겠지라고 자위하며 맹목적으로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공부만을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차피 환상적인 꿈이나 미래는 지금 이 현실에서도 꾸지 못하니 아쉬울 것도 없지 않은가? 신새벽에 컴퓨터 앞에 앉아 특정한 역할이나 목적 없이 애시당초 괜히 무한한 가능성만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또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의사결정이 난무했을 것임을 추측해봄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사람도 하나 둘 늘어난다.
올렸던 글입니다만, 좀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음 해서 올리는 글입니다.
고딩이라 아직 허접하지만, 그냥 지나가다 웃으며 읽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