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 3주... 그리고 2일 (4 Months, 3 Weeks & 2 Days, 4 Luni, 3 Saptamini Si 2 Zile, 2007)
감독 : 크리스티안 문쥬
낙태를 경험한 24시간의 고통, 그 실재하는 현실
시네큐브에서 를 볼 때였던가, 이 영화 예고편을 보여주었다. 우선 낙태 문제를 다룬 영화라 관심이 갔다. 낙태 이야기를 영화로 만난 건 아주아주 오래 전 영화 밖에 없는 것 같다. 그걸 봤을 때도 충격과 분노 때문에 함께 본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눈물을 나누었는데, 과연 이 영화는 어떨까 궁금했다.
낙태가 워낙 여성계 이슈 중 뜨거운 감자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최근에도 정부가 모자보건법상의 인공임신중절(낙태) 허용범위를 확대하려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의미로, 혹은 낳아봤자 키울 수 없는 현실을 이유로 낙태를 찬성하는 쪽이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낙태를 반대하는 쪽이나, 어느 한쪽도 물러설 기미 없이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이슈가 바로 낙태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영화는 우리나라 영화도 아니고, 2000년대 후반 현재를 다룬 영화도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철권통치가 인민들의 일상까지 옥죄고 있던 루마니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과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영화를 보면 안다. 화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는 먼 나라의 오래 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의 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제발 그만 좀 해!
영화 첫 장면. 갈색 머리, 갈색 눈의 소녀는 카메라를 향해 조그맣게 속삭인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건지, 누구에게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고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뿐이다.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 안절부절하고, 다시 카메라를 향해 담배를 찾는다.
이미 낙태를 다룬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직감했다. 저 불안하게 흔들리는 갈색눈동자, 계속해서 담배를 찾아 더듬거리는 떨리는 손짓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그러나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 뻔한, 낙태시술을 앞두고 있는 소녀의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불안한 눈동자의 갈색머리 소녀 '가비타(로라 바실리우)'가 아니라, 그녀가 고맙다고 했던 바로 그 룸메이트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의 시선으로 끔찍한 낙태의 경험을 그려낸다. 오틸리아의 등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카메라는 아무런 연출도 각색도 없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듯 무심하기만 하다. 그 무심한 카메라를 통해 오틸리아를 바라보는 관객은 눈 앞에 펼쳐지는 화면이 창작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그녀의 불안과 공포와 분노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고통스럽다.
물론, 이전에 을 보면서도 고통스럽긴 했다. 그러나 을 보면서 고통을 느낄 때는 적어도 '이것은 영화야'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을 볼 때는 그런 자각이 없다. 바로 내 눈 앞에서 나의 친구가 낙태를 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도울 수밖에 없는 오틸리아다.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천천히, 아무런 감정도 기교도 없이 오틸리아를 따라다니는 감독의 무심한 카메라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차피 결론은 뻔하잖아. 제발 그만 좀 끝내!" 소리쳐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는 왜 오틸리아일 수밖에 없는가?
정작 낙태 당사자인 가비타는 소심하고 의존적이며 비겁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낙태를 결심하고 친구의 소개로 그나마 값이 저렴한 야메 시술사를 섭외한 것이 전부다. (영화의 배경인 1987년 루마니아는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말년으로, 차우셰스쿠는 1968년부터 피임과 낙태를 법으로 금지시켰고, 낙태를 한 여성과 낙태시술자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정작 불법 낙태시술을 할 장소인 호텔을 예약하고, 야메 중절수술 의사를 만나 데려오고, 그 의사와 몸을 매개로 한 협상을 벌이며, 끝내 자궁에서 떨어져 나온 가비타의 태아를 유기하는 일은 가비타의 임신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룸메이트 오틸리아다.
처음엔 참 의리있는 친구구나, 생각했다. 이 영화가 낙태라는 소재를 빌어 자매애를 다룬 건가, 잠시 추측해 보기도 했다. 학생 신분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비타의 불법 중절시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애인에게 돈을 빌리고, 불안해하는 친구를 위해 대신 호텔을 예약하고, 심지어 야메 시술사를 만나 호텔까지 안내할 때까지는 친구의 고통을 자신의 것인 양 발 벗고 나서는 오틸리아의 의리에 감동까지 먹었다.
그러나 시술비가 부족한 가난한 학생들을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협박하는 냉혈한 야메 시술사에게 결국 (생리 중임에도 불구하고) 돈 대신 몸을 내주는 오틸리아 앞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친구가 지금 당장 낙태시술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라지만, 저렇게까지 해야 해? 화가 치밀었다. 남자의 욕정으로 생긴 태아를 없애는 것으로 돈을 버는 낙태 시술자, 벼랑 끝에 서 있는 소녀들을 협박해 자신의 욕정을 채우는 낙태시술자 베베, 그에게 화를 내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도 오틸리아를 붙잡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가비타의 자궁에 푸로브가 들어간 뒤(이 영화의 야메 시술자가 하는 낙태 방식은 자궁 속 태아를 긁어내는 게 아니라 자궁에 가는 호스를 삽입해 약물을 투입, 태아가 저절로 자궁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는 방식이다) 가비타를 호텔에 두고 애인 아디의 집을 방문한 오틸리아를 보며 깨달았다. 아, 나 역시 오틸리아일 수밖에 없겠구나.
아디의 어머니 생일파티. 물론 이전부터 어머니 나이만큼의 글라디올러스를 사가지고 방문하기로 했던 약속이었지만, 룸메이트가 불법 낙태시술을 하고 그 때문에 자신의 몸까지 거래해야 했던 오틸리아가 애인의 어머니 생일파티에 가고 싶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약속이기에 꾸역꾸역 찾아갔다. 애인 아디는 약속시간보다 한참 늦은 데다가 꽃도 사오지 않은 오틸리아에게 짜증부터 낸다. 오틸리아는 아디에게 가비타의 낙태수술에 대해 털어놓고 연인들은 한바탕 말다툼을 벌인다.
"내가 임신하면 어떻게 할지 생각이라도 해봤어?"
"넌 임신 안 했잖아. 임신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넌 섹스 할 때만 좋지? 지난 번에도 밖에다 사정하랬는데 들은 척도 안 했잖아!"
오틸리아와 아디의 말다툼을 듣다 보니 알겠다. 왜 오틸리아가 마치 제 일인 양 가비타의 중절수술에 발 벗고 나섰는지. 이제야 알겠다. 가비타는 정작 아이의 아빠와 이 문제를 해결해볼 생각은 않고 (이 영화에서 가비타 뱃속 아이의 아빠는 누구인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룸메이트 오틸리아만 붙들고 늘어지는지.
가비타의 임신은 가비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틸리아 역시, 아니 가비타와 오틸리아의 기숙사 여자친구들 모두 일상적으로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렇게 임신과 낙태 문제가 생길 때면 그녀들은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 이 사회도, 임신의 또 다른 당사자인 남자친구도, 그녀들의 고민(불법 시술로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을 들을 생각이 없다. 그녀들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그녀들뿐이다.
눈을 가린다고 없어지지 않는 가혹한 현실
진정 이 영화가 고통스러운 것은, 가비타와 오틸리아의 불안과 공포, 참담함과 분노가 1987년 루마니아 차우쳬스쿠 독재시절에만 국한된 특별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으로 엄하게 금하고 있었고,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낙태가 존재할 수 없었던 1987년 루마니아에도 낙태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2008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내게, 나의 친구들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실재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모두들 눈 가리고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하는, 실재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다.
그렇게 태아의 아버지와 이 사회가 실재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이, 여성들은 비위생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시술을 생명을 내맡기고 오틸리아의 사례에서 보듯 또 다른 폭력에 노출된다. 형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빨간 핏덩이 태아는 낯선 주택의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낙태는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찬성과 반대를 분명하게 주장하기 힘든, 복잡한 이슈다. 그러나 생명 존중이나 신의 섭리 운운하며 낙태금지를 요구하는 쪽이나, 장애아면 낙태시키는 게 당연하지 않냐는 논리를 펴는 메가바이트같은 선택적 낙태찬성론자들이나,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처한 현실은 철저히 두 눈을 가린 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입장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낙태의 합법과 불법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고작 영화인데도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고통에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으로부터 낙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P.S. 1 _오틸리아, 널 잊지 않을 게
요즘 루마니아 영화의 약진을 두고 넥스트 아시아, 넥스트 코리아라는 말이 돈다고 한다. 에 이어 루마니아 영화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영화 보는 눈은 없지만, 내게도 루마니아 영화는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형식적인 면이나 연출에 대해서는 뭐라 떠들 능력이 안 되니 넘어가더라도, 배우들의 연기만큼은 칭찬이 아깝지 않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 오틸리아 역의 아나마리아 마린차와 가비타 역의 로라 바실리우, 그리고 냉혈한 야메 시술자 베베 역의 블라드 이바노브의 연기는 연기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섬세하다. 특히 관객이 오틸리아에게 완전 감정이입해서 꼼짝없이 고통스러운 러닝타임을 보내게 만든 아나마리아 마린차는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다시는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말자"던 오틸리아의 마지막 대사대로, 나는 오늘 이후 다시는 오틸리아의 끔찍했던 하루를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틸리아, 너만은, 아나마리아 마린차, 당신만은 잊지 않겠다.
P.S. 2 _언제까지 나의 성을 통제할 건데?
영화를 보면서 의아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 내가 알기로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낙태를 합법화한 것이었다. 독재이든 뭐든 루마니아 차우쳬스쿠 정권은 사회주의 정권이었는데, 왜 차우쳬스쿠 시절 루마니아는 어느 나라보다 엄하게 낙태와 피임까지도 금지했던 것일까?
영화를 본 뒤 이곳저곳 뒤져보니, 1966년 집권한 차우쳬스쿠는 "인력이 곧 국력"이라며 1968년부터 피임과 낙태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다시 말해 인구증가 정책의 하나였던 셈이다. 낙태를 하다가 발각되면 산모와 수술한 의사를 감옥에 가뒀다. 덕분에(?) 루마니아의 출산율은 급격히 증가했단다.
하지만 대책 없이 늘어난 인구는 극심한 식량 부족을 야기했다.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불법 낙태 시술소를 찾게 됐다. 여성들은 비위생적인 공간에서 마취도 없이 전문 의사가 아닌 불법 시술자들로부터 수술을 받았고, 약 50만 명의 여성들이 불법 낙태를 시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때문에 1989년 차우셰스쿠가 처형되고 난 뒤 가장 먼저 변한 것이 바로 낙태합법화였다. 그러나 국가가 낙태를 합법화하자 임신중절을 행하는 여성의 수가 첫해에는 무려 100만 명이나 늘어났다. 오늘날까지 루마니아에서 임신중절은 피임의 한 방법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매년 3만 명 이상이 수술을 받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푸코가 말했다. 권력(국가)은 경제·정치적 문제인 인구를 관리하기 위해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이 요구에 합당한 논리를 제공하는 담론들을 생산 유포한다고. 차우쳬스쿠의 낙태금지는 아마도 권력(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통제할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루마니아의 과거와 현재는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루마니아에는 차우셰스쿠의 인구 증가 정책으로 태어나 생활고를 못 견딘 부모에 의해 거리에 내버려진, 소위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현재 수도 부쿠레슈티에만 500여 명의 아이들이 방치돼 있는데, 제대로 성교육을 받지 못한 많은 거리의 소녀들이 위험한 임신과 낙태를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 FILM2.0 기사 등 요약 인용)
출산율 저하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내 어린 시절 "둘도 많다"던 국가는 이제 "결혼 1년내 임신해서 2명을 낳아 30세 전에 건강하게 잘 기르자"는 '1·2·3 출산운동'을 이야기한다. 차우쳬스쿠처럼 철권정치시대는 아니지만, 여성의 현실은 외면한 채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통제하려는 국가의 시도는 "인력이 곧 국력"이라던 차우쳬스쿠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