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My Blueberry Nights, 2007)
감독 : 왕가위
왕가위, 헐리우드에서 길을 잃다
왕가위가 만든 왕가위 짝퉁 영화
아무리 복잡한 마음 달래려고 고른 영화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저 허허실실 웃으며 볼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은 해두었지만, 아무런 고민이나 깨달음따위는 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다짐하긴 했지만, 이건 좀 심했다. 그래도 왕가위 영화인데….
영화 보는 내내 가장 많이 내뱉은 말. "이건 좀 심하잖아"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 대한 기대는 없었어도, 왕가위 감독에 대해 가진 기대 혹은 믿음이 꽤 컸던 모양이다. 문득 왕가위 영화가 뭐 어땠길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본 왕가위 영화가 뭐가 있더라? 음,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화양연화, … 뭐, 별로 없으면서 왜 이리 잔소리야?
그래, 사실 난 왕가위 팬이라고 할 수는 없다. 평소 왕가위에 대해 엄청난 기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래도… 는 나처럼 수박 겉 핥듯 왕가위 영화를 띄엄띄엄 본 관객들이 보기에도, 당혹스러울 만큼 실망스럽다.
아주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유통기한 지난 파인애플 통조림을 방안 가득 쌓아놓고 있던 금성무와 젖은 빨래와 대화를 나누던 양조위를 보며 이별의 먹먹함을 느꼈던 , 사랑하면서도 늘 외로웠던 장국영의 연인 양조위에게 깊이 매료됐던 , 배우자의 배신을 지켜보다 사랑하게 된 양조위와 장만옥의 느리고 조용히, 그러나 꽃처럼 빛나던 한때 까지, 내가 만난 왕가위의 전작들은 언제나 화려한 화면과 지극히 감상적인 이야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린 기운이 있었다. 그 시린 느낌 때문에 매 영화마다 상투적이고 감상적인 사랑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음에도 그의 영화가 좋았다.
그런데 왕가위가 헐리우드로 건너가 헐리우드 배우들을 데리고 만든 첫 영화 에는 그 느낌이 없다. 전혀 없다.
물론, 왕가위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 버린 예의 스텝프린팅(인물 하나만 원래 속도로, 배경이 되는 것들은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기법으로 복잡하고 시끄러운 도시 속의 고독한 개인을 그리는 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도발적인 클로즈업은 있다. 검붉은 도시의 빛깔,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조도 있다. 거기에 건조한 음성으로 읊조리는 나레이션도 있다. 왕가위 이전 영화들이 가지고 있던 형식들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왕가위의 스텝프린팅은 홍콩의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뒷골목에나 어울렸던 거다. 손끝의 움직임이 입술의 떨림이 담긴 클로즈업 샷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가 전달됐던 것도, 두 사람이 지나가면 어깨가 부딪힐 것 같은 좁은 통로로 이어진 홍콩에서나 가능했던 거다.
이거, 뻥뻥 뚫린 뉴욕 거리에서 홍콩의 스텝프린팅과 클로즈업이 재현되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낯설기 짝이 없다. 저 자리에 있을 사람은 노라 존슨이 아니라 장만옥이고, 주드 로가 아니라 양조위다. 레이첼 웨이즈가 아니라 임청하다.
이건 뭐, 왕가위를 너무 좋아한 영화감독 지망생이 왕가위 스타일을 그대로 베끼려고 작정하고 만든 것 같다.
사실 문제는 스타일, 형식이 아니다. 내가 왕가위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인데, 사실 이 영화에는 대사가 별로 없다. 뚝뚝 끊기는 마주침과 엇갈림을 이어주는 나레이션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양조위와 장만옥의 마음은 전달되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느낀 '시림'의 정체는 함께 있으나 고독한 인간의 존재, 그저 해피엔딩일 수 없는 관계의 엇갈림, 사랑의 유한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가위 영화에서 그것은 대사보다는 이미지로 전달된다.
그러나 헐리우드에 간 왕가위의 에서는 끝도 없이 대사를 쏟아낸다. 그것도 마치 세계 각국 대사 좋은 드라마 홈페이지를 뒤져 명장면 명대사만 뽑아놓은 것처럼, 숱한 은유로 가득차 있는 대사들을 쉴 새 없이 쏟아붓는다. 거기다 블루베리 케이크, CCTV, 지하철, 열쇠, 금주칩, 담배, 계산서, 도박 등 숱한 사물들이 은유의 소재로 쓰인다. 이건 젖은 빨래,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이 모든 걸 말해주던 과 비슷하다.
그러나 명장면 명대사를 줄줄이 나열해 놓는 것은 도덕교과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뻔하고 지루할 뿐이다. 의미 포과상태인 대사와 사물들들이 어지럽게 떠다니는데 좀처럼 제자리를 잡을 생각을 안 하니 이거 원, 환장할 노릇이다.
이러니 내가, 왕가위 감독 팬도 아니면서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투덜댈 수밖에.
왕가위 감독이 헐리우드에 가서 길을 잃은 건지, 아니면 잠시 쉬려고 대충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이러면 정말 곤란하다. 주드 로의 블루베리 키스가 제아무리 섹시하고 달콤하다 해도, 아닌 건 아니니까. 앞으론 제발 그러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