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고양이였을 뿐.
written by polamara
그는 언제나 우울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꼭 우울하지 않더라도, 차분하고 조용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그는 즐겨 들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은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는 언제나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지독히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는 우울한 음악만을 들었다.
사람들은 항상 말하곤 한다. 너의 정신 상태가 이상한건 아니니, 혹은 심각한 걱정거리가 있니. 그렇지만 그의 대답은 항상 부정적이다. 그의 정신 상태는 지독히도 정상이었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심한 정도의 걱정 근심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우울한 음악만을 들었다.
이게 내가 본 그의 전부이다. 그다지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를 봐왔지만, 내가 그에 대해서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게 다이다. 도무지 그는 자기 속내를 내비치지 않았다. 외부에 대해 철저하게 봉쇄된 그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로서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암호 같은 수수께끼였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그런 식으로 아슬아슬한 자기표현을 하고 남들이 그것을 해독해내지 못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심지어)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게 폐쇄적이던 그가 나에게 의외로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내가 어느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홀짝이고 있던 때였다. 나는 여느 때처럼 에스프레소의 향기와 달콤함을 즐기면서, 비의 장막이 드리워진 창 밖 풍경을 보며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고 있었고, 그도 여느 때처럼 우울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을 하얀색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이어폰을 뽑으며 내 앞자리에 앉은 그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너는 슈뢰딩거라는 유명한 심리학자를 알고 있니. 아니, 그 사람은 물리학자잖아. 누구나 그렇게들 말하곤 하지. 그래도 그 사람은 심리학자야. 그와 하게 될 슈뢰딩거 이야기는 꽤나 흥미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번에도 그의 심리를 아슬아슬한 경계선 까지 끌어당겨 슈뢰딩거라는 키워드를 이용해 암호화한 다음 나에게 흘릴 생각이다. 비록 완전하게 해독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그런 암호들을 듣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집에서 한 마리 작은 고양이를 기르고 있어. 털이 하얀, 새하얀 예쁜 고양이야. 말도 잘 듣고 재롱도 잘 피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애의 몸 상태가 나빠졌어. 동물 병원에 데려갔더니 희귀한 병에 걸려서 이제 말기래. 치료해줄 수가 없다는 거야. 나는 너무 슬퍼졌어. 내 표정을 읽었는지, 수의사가 말했어. 그래도 살 확률이 오십 퍼센트 정도는 있습니다. 나는 내 주위에서 다른 생명체가 죽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아. 어렸을 때 키우던 햄스터나 병아리들이 죽으면 그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며칠 동안을 그 애들 생각만 한 적도 있거든. 그래서 더 이상 죽음을 보기가 싫었어.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큰 상자를 준비해서, 고양이를 거기에 넣어버렸어. 내 앞에서 초롱초롱 눈 뜨고 재롱부리던 녀석이 갑자기 쓰러져버리면 너무 마음 아플 것 같아서. 그래도 의사가 오십 퍼센트의 확률은 있다고 했으니까. 그게 3일쯤 전이야. 그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결국 그가 한 말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 실험의 한 변형이었다. 그게 단지 사고 실험의 변형이었는지, 진짜였는지는 그 당시에는 몰랐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그건 슈뢰딩거의 얘기라고 말해주었다. 아주 유명한 양자역학의 패러독스가 아닌가하고. 그는 아주 잠깐 슬픈 표정을 짓더니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래. 이건 슈뢰딩거의 이야기야. 내 이야기이기도 해. 그런데 이 이야기가 반드시 양자역학의 이야기일 이유는 없거든. 내 생각으로는 이건 아주 훌륭한 심리이론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 그래서 슈뢰딩거는 불행하지. 이제 그 사람은 교양과학 서적에 실린 몇 점의 고정된 사진과 진부한 수식어 몇 개의 조합으로 표현되는 데에 그쳐버릴 테니까. 왜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건 정말 신선한 해석인걸. 어떤 면에서 그게 심리이론이라는 건지 설명해 줄 수 있어?
“심리학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이론이잖아. 고양이가 죽어있는지 살아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양자역학적 관점에 따르면, 상자를 열어서 직접 보기 전에는 그 애는 반은 죽었고 반은 살아있는, 수학적인 확률함수의 공간적 분포일 뿐이라는 거잖아. ‘관찰’이라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작은 행위 하나가 그 애의 운명을 결정해버리는 거야. 이해하겠어? 그러니까 내말은, 누가 그 ‘관찰’을 하느냐에 따라 그 애의 생사여부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거야. 확률함수를 붕괴시키는 방법은 사람마다 일치할 수 없을 테니 말이야. 결국, 고양이의 시간 흐름을 결정해주는 건 우리가 된다는 거지.”
그것 참 흥미로운 이야기인걸.
“결국 그 불쌍한 고양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순전히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거야. 우리는 마음껏 잔인해질 수도 있고 원하는 만큼 선하게 될 수도 있어. 내 말을 이해하겠어?”
이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조금은 알 듯 했다. 그건 정말 신선한, 내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양자역학의 해석이었다. 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누구나 다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이론은 표면적으로는 그런 심리학적 다양성을 보장하지만, 그 스스로 치명적인 자기모순을 안고 있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건 어차피 개인의 마음에 달려있지만, 그 미래를 가장 먼저 만든 사람의 생각에 다른 모든 이들이 동조해야 하거든. 그 수의사가 갑자기 내 집으로 달려와서는 상자를 열어보고 고양이가 죽었다고 해버리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야. 내가 비록 그 고양이를 살리고 싶었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그 순간, 그의 표정에서 그가 즐겨 듣는 음악의 리듬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고양이는 죽었어?
“아니, 아직 몰라. 지금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이야. 물론 난 그 애를 살리고 싶어.”
그걸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던 대화였지만, 끝내고 나니 뭔가 기분이 그다지 상쾌하진 않았다. 나도 갑자기 우울한 음악을 듣고 싶어졌으니까. 그래서 결국 그 짤막한 대화 한 토막은 그만의, 이 세상에서 가장 침울한 유언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고양이는 불행히도 죽었고, 가엾은 그도 죽었다.
그가 죽은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는 획일화된 틀에 끼워져서 공장에서 하나하나 찍어내는 공산품이 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단 한 사람 혹은 단 한 무리의 생각에 동조해야 하는 그의 처지, 세상이 싫었던 것이다. 그의 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그의 직접적인 투영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가 말한 대로, 고양이의 운명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 있을 뿐이다. 수의사는 아마 그의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을 테고, 박스를 열어 고양이를 죽인 것은 그의 생각인 것이다. 어찌 보면, 스스로 택한, 스스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가혹한 일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였던 거다. 그렇지만, 결국 그 죽은 고양이를 택한 것은 그의 생각이니,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문제가 되는 거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에서, 양자역학의 온갖 법칙에 모순 되지 않으면서, 고양이의 운명에 대해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고양이 스스로는 자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고 있다는 거다. 이건 어떤 물리법칙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우리도,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준다는 점에서는, 그의 새하얀 작은 고양이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어떻게 보건 간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지고 존재를 자각한다. 이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전제로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에 대한 굉장한 무례일 것이다.
이게 그와 나의 이야기의 전부이다. 가끔씩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면서 감상에 잠기노라면, 불행하고 가엾은 그가 기억의 저편에서 아련히 떠오른다. 어차피 한낱 고양이였을 뿐이다. 난 다만,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혹은, 그의 말처럼, 동조해주고) 그가 좋은 곳으로 떠났기를 빌어줄 수 있을 뿐이다. 하얀빛 회색의 하늘에서는, 음울한 음악이 잔잔히 들려온다. ¶
한낱 고양이였을 뿐 written by polar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