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인' 안중근의 꿈
"조국에 묻어다오" 아직 못이뤄
유해 발굴에 국민적 관심을…
조국 땅에 반장(返葬)해다오."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 교수대 형장에서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유언했다. 정확히 98년 전 오늘의 일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꿈은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해방되고 6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올해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 그가 삭풍의 중국 땅 감옥 묘역에 묻혀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김영광 안중근의사숭모회 부이사장
이토 저격한 이유 묻자 "15가지 죄"
안중근 의사는…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哈爾濱)역 하늘에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68세 노회한 정객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역사(驛舍) 안에 크게 울려 퍼지던 러시아 의장대의 군악 소리, 환영인파의 함성도 일순 사라졌다.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이토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의 회담을 위해 특별열차를 타고 도착한 길이었다.
거사의 주인공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安重根)! 그의 총탄 첫 세 발에 이토는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배에 관통상을 입고 30분 후 사망했다. 안중근은 이어 이토를 수행하던 가와카미(川上) 하얼빈총영사 등 일본인 일행을 향해 4발을 더 발사했다. 모두 7발이었다. 그리고 권총을 머리 위로 내던진 뒤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를 세 번 힘차게 외쳤다.
현장에서 스스로 체포된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는 개인 자격으로 한 일이 아니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장(敵將)을 포살(砲殺)한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자신은 일본 법정에서 일본 법에 따라 재판을 받을 수 없으며, 만국공법(萬國公法·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의 안중근 의사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묻는 일본 검찰관에게 그의 15가지 죄를 조목조목 말했다.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다.
안중근이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한국 강점의 원흉 이토를 저격한 의사(義士)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1908년 독립군 '대한의군'을 조직한 안중근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인 4명을 사로잡았다.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면서 이들을 석방했다. 그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안중근의 사상은 뤼순(旅順) 옥중에서 집필한 두 종류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와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이다. 이 중 '동양평화론'은 거사 다섯 달 만에 서둘러 진행된 사형집행으로 미완의 저작이 되고 말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이 동양 평화를 실현하고 자존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중국에 대한 야욕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한중일 삼국이 독립을 유지하는 가운데 협력해야만 동양 평화가 실현된다는 그의 사상은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아시아공동체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안중근은 형장으로 가기 직전 큰 붓을 들어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고 썼다. "나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 일이니 내가 죽은 뒤에라도 한·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주기를 바란다."
만 31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달리한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그는 민족국가의 탄생을 꿈꾼 인물이면서 한편으로 동양 평화를 주창한 탈(脫)민족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