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Manchester United F.C.)은 그레이트 맨체스터에 위치한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을 근거지로 하는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이다. 전세계적으로 3억 3천만 명의 서포터를 가지고 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축구 구단 중 하나이며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1964/65시즌 이래 6번의 시즌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평균 관중 수를 기록했다.1993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창립 멤버였으며 1975년 이래로 잉글랜드 프로 축구 1부 리그에 계속 위치하고 있다. 1878년 랭커셔 요크셔 철도의 뉴튼 히스 지부 실업팀인 뉴튼 히스 LYR F.C.(Newton Heath LYR F.C.)으로 설립되어 1902년 4월 26일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개명되었다.
근 20년 동안 성공적인 성적을 낸 프로 축구단 가운데 하나이고, 18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차지했으며 이는 잉글랜드 클럽 중 가장 좋은 성적이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2006-07시즌 우승으로 현재 챔피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16번의 우승(구 1부 리그 포함)을 차지하였다. 11번의 FA컵을 들어올려 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좋은 FA컵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68년에는 벤피카를 꺾고 유로피언 컵을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최초로 들어 올렸다.
1998/1999년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 리그, 잉글랜드 FA컵 3개의 타이틀을 석권하여 이른바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1990년대 후반 이래로, 가장 부유한 클럽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전세계 축구팀 가운데 최고의 수입 기록을 지속적으로 기록해왔다. 그리고 유럽 프로 축구팀들의 모임인 G-14의 한 멤버이기도 하다. 2007년 포브스의 세계 스포츠 구단 평가에서 14억 5300만 달러의 평가를 받아 전세계 축구 구단 가운데 1위를 기록했다.
초창기(1878년 ~ 194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역사는 1878년 랭커셔 요크셔 철도의 뉴튼 히스 지부 실업팀인 뉴튼 히스 LYR F.C.(Newton Heath LYR F.C.)의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 유니폼은 지금과는 달리 녹색과 노란색을 좌우 대칭으로 넣은 유니폼이었다. 철도 지부와의 관련을 끊고 Newton Heath F.C.로 명칭을 변경, 독립적인 클럽으로 변모하였고 풋볼 리그(The Football League)에도 참가하였다. 1902년 2500 파운드의 부채로 인해 클럽이 위기에 빠졌는데, J. H. 데이비스의 투자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클럽의 주장인 해리 스태포드는 그의 애견 세인트버나드를 기금모금행사에서 자랑했고 데이비스는 개를 사기 위해 스태포드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클럽의 주장은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데이비스가 클럽에 투자하기를 설득했다고 한다. 한편, 클럽의 명칭과 관련하여 Manchester Central과 Manchester Celtic이 제안되기도 했는데, 이탈리아 이민자 Louis Rocca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안했고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1902년 4월 2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의 개명이 확정되었다. [9] 데이비스는 기존 유니폼의 색인 녹색과 금색 대신에 붉은색과 흰색으로 바꾸었다.1902년 9월 28일 제임스 웨스트가 감독직을 사임한 이후 어니스트 만그날이 사무장으로 임명되었고 1부 리그로 팀을 승격시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첫 시도는 디비전 2의 5위로 그쳤다. 만그날은 클럽에 새 얼굴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해리 모거와 딕 덕워스 존 피켄 등을 영입했고 £400을 들여 찰리 로버츠를 데리고 왔다. 결국 2부 리그 1905/06 시즌에서 2위를 차지하여 1부 리그로 마침내 승격하였다. 1908년에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FA컵을 최초로 우승하였다. 1910/11시즌을 우승하였고 그 와중에 올드 트래포드로 홈구장을 이전하였다. 1910년 2월 19일 리버풀 FC을 상대로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첫 경기를 치렀다. 1922년에는 2부리그로 강등되는 일을 겪기도 하였는데 1925년에 1부리그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다시 1931년에는 강등하는 등 요요 클럽(승격과 강등을 반복하는 팀)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8/39시즌에서 14위를 차지한 이래로 1부 리그에 안정적으로 머물기 시작했다.
버즈비 시대(1945년 ~ 1969년)
1945년 매트 버즈비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등장하면서부터 자신의 선수 선발권, 선수 이적, 훈련 방법 등에서의 권한을 요구하였다.(그가 바로 직전에 머물렀던 리버풀에서는 이런 요구가 묵살되고 해임되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에게 권한을 맡기었다. 버즈비가 성사시킨 첫 계약은 선수가 아니라 수석 코치 지미 머피였다. 1947, 48, 49년 2위를 차지하고 1948년에는 FA컵을 우승하는 등 상당한 성적을 거두었다. 버즈비는 클럽이 육성하고 있는 유스 팀 선수들에 주목했고 1956년에 팀 평균 나이가 불과 22세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시즌 103골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어린 선수를 중용하는 정책은 클럽 역사의 전환점을 가져다주었고 이 선수들을 버즈비의 아이들(Busby Babes)라고 불렀다. [10] 버스비는 ‘버스비의 아이들’과 함께 공격축구로 맨체스터의 팬층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11]
1958년 2월 6일 뮌헨 비행기 사고가 터졌다.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준결승행을 확정짓고 귀국하는 도중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중간지 뮌헨에서 연료 공급을 받고 이륙을 하는 도중 이륙실패로 공항의 경계벽과 충돌하였다. 이 사고로 선수 8명과 코칭스태프를 포함해 총 15명이 사망하였다. 2번의 이륙 시도가 이미 있었고 3번째 시도에서 이륙에 필요한 충분한 속력을 내지 못해 이륙에 실패한 것이다. 버즈비 감독도 비행기에 탑승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구조되었다. 7명의 선수는 사고 당시 사망했고 중상을 입은 선수 한 명은 2주일 후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고 이후 유러피언컵을 포기할 것이라는 루머가 나돌았지만, 부상 중인 버즈비를 대신해 지미 머피가 임시 감독직을 맡고 대회에 계속 참가하였다. 참사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FA컵 결승전까지 올랐다. 196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버즈비가 다시 팀을 정비하였고 데니스 로 등을 영입하고 젊은 선수 육성에 주력했다. 그 결과로 조지 베스트라는 맨체스터의 영웅을 탄생시켰다.[13] 1963년 FA컵을 들어올렸으며, 1964년 시즌에는 2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1965년과 1967년에는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으며, 1968년에는 벤피카를 4:1로 꺾고 드디어 유러피언컵을 들어올렸으며[14] 이는 뮌헨 비행기 사고 10년째가 되는 해였고 잉글랜드 클럽 사상 최초로 해당 대회를 우승하였다. 1960년대의 버즈비 시대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유럽 올해의 선수(발롱드르)를 3명이나 배출하는 기록을 올렸다. 1964년에는 데니스 로, 1966년에는 바비 찰튼, 1968년에는 조지 베스트[15]가 수상자였다. 1969년 버즈비는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리저브팀 감독이자 전 맨유 선수였던 윌프 맥기네스(Wilf McGuinness)가 감독직에 올랐다.
1969년 ~ 1986년
버즈비의 시대는 뒤로하고, 새로운 감독 윌프 맥기네스(Wilf McGuinness) 체제에서 1969/70 시즌에 실망스럽게 8위에 머물렀고 1970/71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시즌 초반 성적으로 결국 윌프 맥기네스는 리저브팀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사임했었던 버즈비가 6개월간 팀을 잠깐 맡았는데 결국 1971년 여름에 그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셀틱을 유러피언컵 정상에 올려놓은 존 스테인(Jock Stein)가 새로운 감독으로 취임할 뻔했으나 계약 성사 직전에 그의 포기 의사로 결국 프랭크 오 파렐(Frank O'Farrell)이 감독직에 올랐다. 하지만 18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1972년에 토미 도허티(Tommy Docherty)가 그의 뒤를 이었다. 도허티는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했으나, 1974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결국 강등되었다. 이 무렵에 골든 트리오라고 불렸던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보비 찰튼이 팀을 떠났다.
강등 직후 다음 시즌에 곧장 1부 리그로 복귀하였으며, 스티브 코펠(Steve Coppell, 현 레딩 감독)이 이 시즌 막바지에 데뷔하였고 FA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1977년에는 리버풀 FC을 2:1로 꺾고 FA컵을 들어올렸다. 도허티의 이같은 성공과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불륜 사건에 휘말려 해임되었다. 데이브 섹튼(Dave Sexton)이 1977년 여름에 그의 자리를 이었고 수비적인 스타일의 전술을 구사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버즈비와 도허티의 공격 전술을 선호했던 서포터들로부터 인기를 잃었고 우승에는 못 미치는 성적으로, 해임 직전의 7연승에도 불구하고 1981년에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론 앳킨슨(Ron Atkinson)이 감독 자리에 올랐고 웨스트 브롬에서 브라이언 롭슨(Bryan Robson)을 당시 잉글랜드 이적금 기록을 깨면서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데리고 왔다.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83년, 1985년 FA컵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985/86 시즌 리그 초반 10연승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리버풀 FC에 내주고 말았고 다음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강등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결국 앳킨스는 성적 부진의 책임으로 해임되었다.
퍼거슨 시대의 개막(1986년 ~ 1998년)
알렉스 퍼거슨은 애버딘(Aberdeen)시에서 맨체스터에 도착했고, 앳킨슨의 뒤를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직에 올랐다. 그의 첫 시즌 성적은 11위였다. 다음 시즌인 1987/88에는 2위라는 성적을 거두었고 브라이언 맥클레어(Brian McClair)가 조지 베스트 이후로 오랜만에 시즌 20골을 달성했다. 그러나 다음 두 시즌 유나이티드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팬들의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1990년에는 해임 위기에까지 몰렸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크리스털 팰러스를 FA컵에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0/91에는 유러피언컵 위너스컵에서 스페인 챔피언 FC 바르셀로나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리즈 유나이티드에 리그를 내줬다. 한편, 1991년에 런던 증권거래소에서 £4700만의 주식 평가를 받아 대중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1992년 11월 에릭 칸토나의 합류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활기가 돌았다. 라이언 긱스, 폴 인스, 데니스 어윈, 개리 팰리스터와 함께 1992/93 시즌 우승을 이끌어 1967년 이후로 20여 년만에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노팅엄 포리스트(Nottingham Forest)로부터 이적해 온 로이 킨의 활약으로 1993/94 시즌에 최초로 리그컵과 FA컵을 동시에 들어올리는 더블을 달성하였고, 로이 킨은 주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94년 1월 20일 과거 맨유에 영광을 안겼던 버즈비가 사망,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1994/95 시즌에 에릭 칸토나는 인종 차별적 모욕을 한 크리스털 팰리스의 서포터 매튜 심슨을 이른바 쿵푸 킥으로 가격해 8개월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시즌에서 마지막 시즌 경기를 비기고 FA컵 결승전에서 에버튼에 패배함으로써 리그와 FA컵에서 모두 2위에 머물렀다. 팬들은 퍼거슨 감독이 주요 선수들을 팔고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필립 네빌과 같은 유스팀 선수들을 중용하는 방침에 격분하였다. 하지만 이 선수들은 곧장 잉글랜드 국가 대표팀으로 발탁되었고 놀라운 플레이를 선보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1995/96년에 더블을 안겼다. 잉글랜드 클럽으로서는 더블을 두 번 했던 팀은 없었기에 그 기록을 더블 더블(Double Doubl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96/97년에는 시즌 우승을 차지했고 에릭 칸토나는 30세의 나이로 축구 선수로서 은퇴를 선언했다.
트레블(1998/99)
1998/99 시즌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프리미어리그, FA컵,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함으로써 잉글랜드 프로축구팀 역사상 한 시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되었다. 토트넘 핫스퍼를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꺾고 프리미어리그를 근소한 차이로 우승한 이후(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프리미어리그 우승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폴 스콜스와 테디 쉐링엄의 골로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2: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 그리고 캄프 누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과의 접전 끝에 이른바 누 캄프의 기적을 일구어 내며 2:1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0:1의 상황에서 정규 시간이 종료되고 주어진 추가 시간 3분 동안 2골을 몰아 넣으며 트레블(삼관왕)을 달성하였다. 트레블의 달성으로 알렉스 퍼거슨에게는 영국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가 수여되었으며, 이후 열린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팔메이라를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트레블 그 후 (1999년 ~ 현재)
2000년, 2001년 시즌 우승을 하였으나, 챔피언스리그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2000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G-14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한편 퍼거슨은 챔피언스리그에서의 좋은 성적을 위해 예전보다 수비적인 전술을 채택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2001/02 프리미어리그에서는 3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시즌은 우승을 차지했다. 그 와중에 리오 퍼디넌드는 도핑 테스트에 불참해 잉글랜드 축구협회로부터 8개월의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큰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2003년에는 유소년팀에서부터 계속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였고 프리킥과 세트 피스 상황에서 큰 활약을 해왔던 데이비드 베컴이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라커룸 내에서 퍼거슨 감독이 축구화를 걷어 찼는데 공교롭게도 베컴의 얼굴에 맞아 상처를 입혔고 두 사람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었다. 2004년에는 FA컵을 들어 올렸다. 2004/05 시즌에는 뤼트 판 니스텔로이의 부상으로 인해 총체적인 득점력 부재를 겪었는데 결국 어떤 트로피도 얻지 못했고 3위에 머물렀으며 FA결승전에서는 승부차기 끝에 폴 스콜스의 실축으로 아스널에게 트로피를 내줬다. 시즌 말에는 말콤 글레이저가 구단을 인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2005년 5월 12일 그는 구단 경영권을 획득했고,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구단을 제외시킬 것을 공언했다. 인수 사실이 확정되자 일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팬들은 거대 자본이 순수한 축구 구단을 잠식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말콤의 구단 인수가 격렬히 반대하고 경기가 있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반대 퍼포먼스를 행하기도 했다.
2005/06 시즌에는 PSV 아인트호벤의 박지성이 영입되었다. 직전 시즌의 UEFA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AC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는 등 맹활약을 한 박지성을 퍼거슨 감독이 점찍어 두었고 마침내 박지성은 대한민국 1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되었다. 박지성은 에버튼과의 시즌 첫 경기이자 데뷔전에서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특유의 지치지 않는 플레이로 퍼거슨 감독을 비롯한 팀관계자들을 만족시켰다.[16] 한편, 시즌 중간 주요 선수들의 부상과 기존 442에서 433으로의 전술 변동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예전갖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로이 킨이 팀의 젊은 선수들을 언론을 통해 맹렬히 비난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의 충돌로 인해 로이킨이 구단을 떠나 셀틱으로 이적하는 내홍을 겪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가브리엘 에인세, 앨런 스미스,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의 줄부상으로 시즌 내내 여러움을 겪었으나, 루이 사아의 활약으로 2006년 리그 컵(칼링 컵) 결승에서 위건을 4:0으로 누르고 차지했다. 그러나 뤼트 판 니스텔로이는 자신을 중용하지 않은 퍼거슨 감독의 전술 변경으로 팀을 떠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006/07 시즌에는 공격 축구가 살아나 시즌 동안 83골을 작렬시켰으며, 골득실차 +56의 우수한 기록으로 라이벌 첼시를 따돌리고 우승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가 17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쳤고 PFA 올해의 선수상등 각종 시상식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편 이 시즌 중간에 헨릭 라르손이 두 달간 임대되어와서 훌륭한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4강에서 카카의 활약을 앞세운 AC 밀란에게 패배했다. FA컵 결승전에서는 디디에 드록바의 멋진 마무리에 힙입은 첼시에게 연장전까지 가는 경기에서 1:2로 패배했다. 2007년 3월 13일, 유럽대항전 첫 진출 및 EEC를 출범시킨 로마조약 50주년 기념 경기를 마르첼로 리피 감독의 유럽 올스타(유럽 XI팀)와 치뤘다. 루니가 2골을 넣은 가운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4:3의 승리를 거두었다.
2007/08 시즌에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결국 은퇴하였지만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를 강등에서 구해냈었던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테베스의 이적을 성사시켰으며 발기술과 스피드가 훌륭한 안데르손, 나니등의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여 기존의 전력에 힘을 더해주어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순항 중이다. FA컵에서는 8강에서 포츠머스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해 탈락했다. 한편 2008년은 뮌헨 비행기 참사 50주년이기도 하다. 2월에 당시의 생존자와 전현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 및 팬들이 모여 추모행사를 가졌다. 2월 10일,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 등 유명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추모 경기 및 경기 전 추모행사를 가졌다. 이날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사고가 있었던 50년대 후반 당시 유니폼을 입고 선발 선수는 1~11번, 교체선수는 12번 이후 번호의 유니폼을 입고, 맨체스터 시티는 유니폼에 후원사 로고를 없앴다. 경기 결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홈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맞아 1-2로 패배하였다.
프리미어리그(구(舊) 1부 리그 포함) 우승 16회
우승: 1908, 1911, 1952, 1956, 1957, 1965, 1967, 1993, 1994, 1996, 1997, 1999, 2000, 2001, 2003, 2007
챔피언십리그(구(舊) 2부 리그 포함) 우승 2회
우승: 1936, 1975.
잉글랜드 FA컵 우승 11회
우승: 1909, 1948, 1963, 1977, 1983, 1985, 1990, 1994, 1996, 1999, 2004
칼링컵 우승 2회
우승: 1992, 2006
FA 채러티 쉴드/커뮤니티 쉴드 우승 15회
우승: 1908, 1911, 1952, 1956, 1957, 1965*, 1967*, 1977*, 1983, 1990*, 1993, 1994, 1996, 1997, 2003, 2007 (* 공동)
유러피언 컵/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우승: 1968, 1999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1회
우승: 1991
UEFA 슈퍼컵 우승 1회
우승: 1991
인터컨티넨탈컵 우승 1회
우승: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