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잉그마르 베르히만(1918-2007)'은 스웨덴 웁살라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경질적인 성격이었고 10대가 되기도 전에 인형극을 무대에 올리고 혼자 만든 영화를 사람들에게 공개할 정도로 그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대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열아홉 살 때 부모의 엄격한 도덕성에 반기를 들고 연출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집을 나왔다. 예리한 작품들로 곧 주목을 받은 그는 1944년에 '헬싱보리 시 극단장'에 임명되었고, 그러한 연극계 이력은 '말뫼', '고텐불리', '스톡홀름'으로까지 이어졌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전성기 때도 연극은 늘 그의 영화에 변화와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언젠가 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또 스스로 각본을 쓰기도 하여, 영화계에도 처음엔 작가로 데뷔했다. '알프 셰베리'를 위해 쓴 는 사디스트적인 학교 선생의 횡포를 이겨 내는 한 젋은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심술궂은 아버지-인물들의 강압에 시달리는 젊은이라는 테마는 (각본을 누가 쓰든)감독으로서 그의 초기 작품에 늘 반복되는 주제이다. 어설프고 부자연스러운 면도 종종 눈에 띄는 이들 초기작에서 그는 전전의 '카르네'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채 못다 소화한 영향을 어떻게든 소화하려 애쓰며, 나름대로의 강렬한 개인적 비전을 담아내고 있다.
'베르히만'이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은 곳은 그의 열 번째 작품 에서였다. 참신하고 매혹적이며 서정적 느낌을 자아내는 경치로 더욱 인상 깊은 이 작품은 불운한 10대의 사랑을 애잔하게 그린 영화이다. 이와 비슷한 특질은 에서, '하리에트 안데르손(그가 키운 첫 번째 여배우이다)'의 육감적 연기를 통해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싸구려 순회 서커스단을 통해 개인의 굴욕과 고독을 조명한 은 위안도 느낄 수 없고 매력도 거의 찾아 볼수 없는 범작이 되어 버렸다.
'베르히만'은 우아한 아이러니, 사랑과 행복의 덧없음이 적당히 어우러진 모짜르트식 코미디 로 국제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그 뒤에 이어진 3편의 영화는 전후 세대들에게 스킨디나비아 영화라는 울타리를 넘어 유럽 예술 영화의 한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은 페스트로 신음하는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한 기사가 죽음과 체스 게임을 벌인다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우화이다. '베르히만'의 영화 중 가장 '입센'적이라 할 수 있는 는 노령의 교수-베테랑 감독 '벡토르 셰스트룀'이 맡았다-가 추억 속을 파고 들어가 자기 인생의 실패와 직면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다시 중세가 배경이 된 에서는 살인과 속죄의 전설이 반복되고 있다. 이 세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고통과 절망의 상황에서도 뭔가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히만' 영상의 엄격미는 그의 극도로 심각한 목적-시류가 바뀌면 의 패러디 대상으로 맨 처음 꼽히게 될 기질- 과 잘 조화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 그의 숭배자들이 생각한 것만큼은, 자신을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어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엉터리 예술가를 유쾌한 고딕식 우화로 풍자한 작품 과 와 같은 그의 냉소적 코미디를 보고 한껏 유식함을 자랑하려는 비평가들을 조롱하며 스스로를 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은 늘, '피터 카위(1992)'의 말을 빌리면, 향하고 있었다. 시대적 부담을 털어 버리고, 출연진과 촬영진도 실내악단 수준으로 대폭 규모를 줄인 상태에서 '베르히만'은 3편의 황량한 작품 ,,을 만들었다. 이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서로 괴롭히는 방법으로 길잡이와 위로를 찾으려 한다.
정신적 충격을 입은 여배우와 그녀를 보살피는 간호사가 심리적으로 서로 괴롭히는 이야기를 담은 는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개인적 관계의 킬링 필드 속으로 파고 들어온, 새로운 출발점이 된 영화였다. '베르히만'의 영화에서 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해 온 클로즈업은 여기에서 거의 최면적인 강렬함으로 다가온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여성들의 관계를 다룬 밀실 공포증적인 연구, )에 와서야 그는 비로소 지독하게 파고드는 예전의 수준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 , 그리고 최초로 텔레비전과 영화, 둘 다를 위해 만든 과 같이 중도적 성격을 띠고 사회적, 정치적, 감정적으로 예술가의 무력함을 고통스러게 조명한 일련의 영화들도 있다.
1970년대에 들어 '베르히만'은 자신의 국가적 기반과 가족과 같은 유대감으로 레퍼토리 극단까지 형성하고 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을 떠나 과감하게 모험을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그리 신통한 것이 못 되었다. 영어로 만든 유일한 작품인 은 어설프고 경박한 느낌이 들었고, 독일에서 만든 두 작품은 강조가 지나쳐 거의 병적으로까지 보일 정도였다. 을 제외한 1970년대의 가장 강렬한 작품은 파열된 관계를 파고 들어간 이었다 - 다섯 시간짜리 텔레비전 각색물에서는 이 관계가 더욱 고통을 자아내게 그려졌다.
그는 19세기 말엽의 웁살라를 배경으로 한 화려하고 장대한 가족 이야기 를 들고 다시 그의 옛 뿌리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에서의 유쾌한 터치로 그러한 면모를 이미 한번 보여 준 바는 있지만, 이 작품의 따스함과 관대함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 뒤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고 TV용으로 만든 소품 몇편을 제외하고는 그 약속을 지켜왔다.
'베르히만'이 1960년대 초의 명성을 되찾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 같다. 고 한 '우디 앨런'의 그 외경심 어린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영화를 지배한 그의 방식은 독보적이었고, 그 점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또한 그토록 타협 없이, 개인적이면서 유기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도 흔치 않다. 지금까지의 그의 작품은 모두 좋든 나쁘든, 자기만의 뚜렷한 스타일과 목소리로 그의 개인적 관심사를 파고든 것들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영화를 철학적 성찰의 도구로 이용한 최초의 영화감독이었고, 아직까지도 그 계승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