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있으면 4월 19일.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날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여기서 우리는 4.19의 저항권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1960년 2월 28일 이었습니다.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독재정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구 도심으로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를 2.28대구학생의거라고 하는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3월 15일에 헌정사상 최악의 부정선거 사태가 터지게 됩니다.
이를 3.15부정선거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4.19혁명의 원인이 됩니다.
이로인해 마산에서 시위가 벌어지는데요, 이를 3.15마산시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은 마치 강에던진 돌처럼... 잔잔하게 퍼져갑니다.
그리고... 4월11일 마산시위에서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김주열학생의 시체가 최루탄에 맞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국의 모든 국민이 4.19에 참여하는 계기를 가져왔습니다.
그후 4월 18일 고려대학교의 학생들이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귀교하던중 종로5가에서
정치깡패 유지광이 이끄는 깡패들에게 기습을 받아 수십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들고 일어났습니다.
4월 19일 고려대학교의 총궐기선언문과 같은 선언문이
여러 대학생들에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 학생들과 대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당시 실권자였던 이기붕의 저택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광화문에서 경찰은 발표를 명령했고 저지를 당해,
수십명의 학생들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한편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현재의 대통령 경호실장을 말합니다.)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막았으나, 곡사포는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경무대 정문을 부셨습니다.
그 경무대 정문을 부신 수간에 군인들이 덮쳐서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여기서는 군인들은 발포를 하지않은 것으로 알려졌다네요)
국민들은 재선거와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에게 계엄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계엄령 사령관 김종원은
강력히 막으라는 내무부장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학생들을 도왔습니다.
시위는 점점 번져갔습니다.
그리고 4월 25일 대학 교수들까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구호로
시위를 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 1공화국은 종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기붕은 몰래 경무대로 들어왔고, 그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4월 26일 새벽 0시.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라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저격하여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1시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고, 자유당도 해체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오후 4시 그는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이승만은 5월에 하와이로 망명했고
1965년 7월 19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아시아 최초의 장기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혁명 4.19혁명입니다.
단 한번도 어느 나라처럼 왕의 목을 친 적이 없던 우리는.
그렇게 단숨에 민주주의를 향해 달려가는 듯 했지요.
그러나...
그건 바람이었을 뿐... 또 하나의 어둠의 그림자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By Ju-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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