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성영화제가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냐... 빨리 끝내야지. 이제 목요일에 본 영화만 정리하면 끝이다. 요즘 난, 수퍼우먼인 것 같다. 아니, 적어도 일주일은 수퍼우먼으로 살아야 한다.
아시아 단편경선 5
여고생이다 | Highschoolgirls
편견도 윤색도 없는 '진짜' 여고생 이야기
★★★★
며칠 전 쓴 에 대한 리뷰에 제작진은 보면서 2박3일간 반성해도 시원찮다고 했더랬다. 사실 가 그리 못 만든 영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들은 여고생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은 상처입기 쉽고 감정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여서, 여고시절을 나이가 들어도 가시지 않는 상처로 곧장 치환하든, 아련한 첫사랑과 동일시하곤 하는 것이다. 에 문제가 있다면 여고생에 대한 관습적인 편견과 윤색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여고생을 그리는 관습적인 방식이 과연 진실일까? 나의 여고시절을 돌이켜 보았을 때 관습적 이미지의 여고생과 동일시되는 무언가가 있었는가? 아니었다. 나는 꽤나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청소년이었고, 교사한테 개기다 온몸을 두드려 맞아도 상처입지 않았다. 이성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으니 첫사랑따위도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나와 전혀 다른 여고시절을 보낸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들 다른 모습으로 그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여고생은 그 숫자만큼 다양한 삶의 이야기와 방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지 똑같은 교복처럼 동일한 가치로 등급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는 여고생에 대해 습관적으로 가지게 되는 편견이나 윤색이 없는 맑은 영화다. 졸업한 지도 꽤 되었다는데 그녀들의 일상을 이렇게 세밀하게 포착하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린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도 참 좋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은 건, 나의 여고시절보다 10여년은 뒤에 있었던 여고생 이야기이다 보니 관객으로서 동일시할 만한 무언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 단편경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내가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아도 되는 영화는 된다는 거지. ㅋㅋ;;;
엘리베이터 | Elevator
청 페이정, 잔 위안위, 민 완천
대만
2007
11'
Beta
color/b&w
애니메이션
나는 지금 어떤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
대만 감독들이 만든 애니메이션. 모노톤의 단조로운 연필선으로 이뤄져 있고 내용이 다분히 추상적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고 또 갈아타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기대치에 따라 공장에서 규격 맞춰 나오듯 '맞춰지는 인생'을 보여주는 영화. 우선 그림이 예뻐서 좋았다. 어쩌면 조금은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아름다운 연필화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걸리는 부분 없이 물 흐르듯 순조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고작 11분짜리 단편이지만 이거 만드느라 무진장 고생했을 세 감독에게 박수를!
무지개 | Rainbow
김경진
한국
2007
18'
DV
color
드라마
때깔은 참 좋은데 말이지...
★★
올해 서울여성영화제 리뷰를 쓰면서 몇 번이나 반복했던 이야기지만, 때깔 좋은 영화들이 참 많다. 디지털장비가 보편화되면서 그리 된 거라고 누가 설명해 주던데, 뭐 모르겠는 이야기는 넘어가고.
때깔이 좋아지니 눈이 즐거워서 좋긴 한데, 거기다 배우들도 연기들 참 잘하니 기분좋게 볼 수 있긴 한데, 뭔가 허전하다.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새로운 문제의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건 뭐냐?
역시 그랬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레를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는 소녀와, 한때 발레리나였던 중년여성이 넋을 놓고 토슈즈를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영화의 제목 무지개처럼 잡을 수 없는 꿈, 혹은 잡고 싶은 꿈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이게 다다. 내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는다. 왜 이러냐? 내가 문제냐? 발레리나의 꿈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냐? 에라, 모르겠다.
그녀의 여름 | Her Summer
안선희
한국
2007
47'
DV
color
다큐멘터리
최악의 영화로 임명합니다~!!
☆
올해 인천여성영화제에서 노인여성 특별전을 하기로 했는데 노인여성 관련 영화를 찾기는 쉽지 않아서 고민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서울여성영화제 브로셔를 보니 이란 영화가 눈에 띄었다. 80 평생 가사노동에 바쳐온 할머니의 부지런한 손이 주인공인 다큐라,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 나타난 수호천사같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 지금껏 다큐멘터리를 꽤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기분 더럽게 만드는 다큐는 난생처음이다. 할머니의 손이 주인공이라고? 웃기시네. 이 다큐의 주인공은 할머니의 손이 아니라 감독이다. 감독은 기실 할머니의 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영화를 찍기 전 이미 할 말을 다 정해놓고 할머니의 손을 소품으로 사용했을 뿐. 그 할 말이란 것도 얼마나 구태의연하고 교과서 같은지, 영화를 보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감독의 친할머니인데 내가 왜 이렇게 죄송해지는지.
이렇게 주인공을 대상화시킨 다큐는 처음이다. 단편경선인데 길기는 또 왜 이렇게 긴 건지. 이 영화를 본선에 올린 영화제 측에 화가 치밀었다. 욱, 하는 마음에 게시판에 항의글을 써야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음 영화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영화들이 이 다큐의 몹쓸 기억을 지워줄 만큼 근사했기에 예의를 차리며 진정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교훈을 얻었다. 내가 영화를 만들든 글을 쓰든 무언가 표현할 때 그 대상을 이런 식으로 수단화시키지는 말아야지. 이거 정말 몹쓸짓이구나. 예의없는 짓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