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의 후과는 컸다. 감독과의 대화 도중에 나오는 몹쓸짓을 하고, 바람을 쐬면서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다행인 것은 얼마 안 있어서 바로 다음 영화를 보아야 했다는 것. 이제 서울여성영화제 마지막 영화다. 이로써 아시아 단편경선을 모두 보았다. 만세! 장하다!!
아시아 단편경선 1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 | The Things She Can't Avoid in the City
욕망의 도시가 삼켜버린 너무 가벼운 그 여자
★★★★★
솔직히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만나는 애니메이션, 특히 아시아 단편경선에 출품되는 애니메이션은 내 경험으로는 좀 어려웠다. 작년에도 5분짜리 애니메이션 보다가 까무룩 졸았는데 정신차려 보니 이미 영화가 끝나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 설사 어렵지 않더라도 그림체가 매우 서정적이고 추상적인 영화들이 많았다. 아니면 아주아주 우울하든지.
그런데 이라는 아주 긴 제목을 가진 이 애니메이션은 '미래소년 코난'처럼 밝고 선명한 색깔로 우선 내 눈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몇 안 되는 등장인물이지만 목소리와 말투도 재미있고.
재개발 때문에 철거를 하던 중, 집 한 채가 통째로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공사가 중단된다. 그 집에는 그녀가 산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릴 때면 몸도 함께 공중에 붕 떠버릴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그녀, 그녀에게는 끊임없이 팽창하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그리고 고양이 머리를 한 그 남자가 있다. 그녀가 해주는 케이크를 좋아하는 그 남자는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케이크 맛을 잊지 못해 크레인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녀의 집을 찾아온다.
공중에 매달려 있지만 그녀 혼자 있을 때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집이 그 남자만 오면 기우뚱거린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오면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려 집이 기울어 버리기 때문에 남자는 그녀의 집에 찾아와도 그녀를 만질 수 없다.
남자가 찾아오는 횟수만큼 남자가 먹는 여자의 파이 갯수도 는다. 고양이 남자는 마치 낮은 집들을 파헤쳐 더욱더 높은 집을 짓는 도시와 흡사하다. 파이 갯수를 늘리던 고양이 남자는 결국, 집이 기울까봐 만지지도 못했던 여자를 삼켜버린다. 여자는 남자의 뱃속에서 남자가 삼켜버린 다른 여자들을 만난다.
머리를 말릴 때 헤어드라어 바람에 몸이 붕 뜨는 상상을 했다는 감독은 상상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길 수 잇는 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다. 감독의 상상력은 매우 신선하며, 그 상상을 두고 해석할 여지도 매우 많아서 눈과 귀, 머리, 모두가 즐겁다.
모딜리아니의 그림같은 여자의 모습이 처연하고 위태위태하지만, 그것을 우울하지 않게 풀어낸 솜씨가 훌륭하다. 홍재희 감독의 과 더불어 아시아 단편경선 우수상을 수상했다. 무진장 축하한다. ^^
상실의 시대 | Lost and Delirious
고명미
한국
2007
20'
Digi-beta
color
코미디
동지가 필요해!
★★★
실연당한 여자, 솔메이트라 굳게 믿고 있는 강아지를 잃어버린 소녀, 이 둘이 만났다.
밥도 안 먹고 울지도 않고 그냥 반지하방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던 상실은 개 짓는 소리가 나는 휴대전화 덕에 강아지 찾는 소녀와 만난다. 상실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말만 내뱉는 소녀. 처음엔 귀찮았지만 어느새 상실은 소녀의 강아지를 찾아 골목길을 뛰고 있다.
죽을 것 같은 실연의 상처 속에서도 한 줄기 미소를 줄 수 있는 건 비슷한 처지의 동지였다. 물론 그 미소가 떠나간 애인을 돌아오게 하지 못할 것이고 상처 또한 치유하지 못하겠지만.
평이한 이야기를 꽤 리듬감있게 끌어간 깔끔한 영화.
출산기 | Birth Dialogue
미리 우르만, 아밋 밀러
이스라엘
2007
52'
Beta
color
다큐멘터리
나의 첫번째 출산 경험
★★★★★
자신의 출산을 다큐멘터리로 찍을 생각을 하다니 참 괴짜 감독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정말 괴짜더라.
인간의 출산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병원에서 출산을 관리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집에서 자연분만을 하기로 결심하고 조산사를 찾아가는 감독. 우려섞인 조언을 건네는 의사와 부모, 남편에게 출산은 자기 인생 최초의 경험인데 온전히 겪고 싶다는 감독. (아무래도 에니어그램 7번 유형 같다. 이렇게 출산마저도 놀이로 인식하다니. ㅋㅋ) 아이를 낳더라도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이 영화를 보니 이스라엘에서는 자녀를 출산하면 교육을 위해 시골로 가는가 보더만) 자신이 도시생활을 좋아하니 아이를 낳아도 도시에서 살 거라는 감독. 진통이 오는 와중에 담배를 피우고 싶다며 "대변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니 담배 한 모금이면 쑥 나올 것 같다"고 농을 던지는 감독. 그리고 그녀의 몸을 통한 출산을 자신의 일로 여기고 출산 준비부터 진통, 분만까지 모두 함께 하는 남편.
다큐멘터리고 영화고 다 떠나서 저런 부부가 있다는 게, 여성이 출산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게,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또한 출산 경험이 없는 내게 이 다큐는 매우 생생하게 출산을 간접 경험하게 했다. 52분짜리 다큐멘터리라고 하길래 혹여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감독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면서 그에 따라 출산용품을 준비하는 감독을 보면서, 나는 감독과 더불어 출산을 경험하고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드디어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을 때 울컥 하고 눈물이 솟았다. 친언니가 아이를 낳았을 때도 못 느꼈던 뭉클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이 영화는 어쩌면 나의 유일한 출산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