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란 가능한가? (4)
강원용 목사님의 '기독교 윤리강좌' 中에서
지난 주에 기독교의 윤리에 있어서 가능성과 불가능성, 그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시간이 모자라서 끝냈습니다. 제가 몇 주일 동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극히 기본적인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바로 밝혀 놓지 않으면 앞으로 남북문제니 정보화문제니 가정문제니 국가민족문제니 상당히 혼선을 가지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를 종합하면, 과연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가능한 거냐?하는 이야기에서 결국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능하다. 하나는 불가능하다. 세 번째 이야기가 내 스승이던 라인홀드 니버가 남겨 놓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불가능인데 가능하다. 불가능의 가능성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제가 볼 때 우리 경동교회 교인들은 네 번째가 많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입장이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
먼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교회에서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수의 증가는 세계에서 가장 성장도가 높은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교인수가 많이 불어나는 교회의 윤리신학을 보게 되면 가능성의 신학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순복음교회이구요. 소위 성장위주의 교회인데,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입니다. 로버트 슐러의 스승되던 사람은, 제가 미국가서 공부하던 시절에, 큰 교회를 담임했던 노먼 빈센트 필이라는 사람입니다. 노먼 빈센트필이 한 것은 소위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를 이야기했습니다. 기독교에서 부정적 사고를 다버리고 적극적 사고를 가지라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제자인 로버트 슐러는 가능성의 신학(Possibility thinking)을 이야기했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지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입장입니다. 굉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그 분의 책이 많이 나와있습니다. 그 분의 책을 교회에서만 읽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사원들과 간부들을 교육시키는데 텍스트로 쓰고 있습니다. 책 중 대표적인 것이 두세 가지 되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믿음만 있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성경구절,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저리로 옮기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라는 이야기, 사람은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성경구절, 그런 성경구절을 전부 모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대로 믿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는 거죠. 슐러의 이야기가 아주 쇼킹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개도 훈련시키면 되는데 사람이 왜 안되겠느냐는 식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 중 설득력을 가지는 이야기가 많은데, 예를 들어 믿음의 신앙을 가지는 방법으로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꼭 성경을 읽는데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류의 성경구절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든 기도문이 있습니다. 가령 "나는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라는 말을 여러 번하고, "믿음만 있으면 불가능이 없으니 내게 믿음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이 있는데, 이것 또한 되풀이해서 매일 아침 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강조합니다. 이야기도 재미있게 합니다. 자동차에 비유합니다. 가솔린이 다 떨어진 자동차를 주유소에 가서 가솔린을 넣지 않고 그냥 몰고 가면 덜커덕덜커덕하다가 결국 서 버리고 말지 않느냐? 그런데 우리 믿음이라는 것이 한번 가지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키워야 되는데, 주일예배에 출석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자동차를 비유해서 말하게 되면 가솔린 넣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빠지면 그건 벌써 믿음이 없어져 덜커덕거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어떤 점으로 말하면 굉장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지난 번 미국가서 며칠 있을 적에 아침에 텔레비전을 틀어 두었는데, 수정교회가 나왔어요. 사람이 몇 만명 모인데서 아멘아멘하는 소리가 연신 흘러나옵디다. 병치료도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병치료도 되구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또 여러가지가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전부 거짓말이면 그렇게 열심히 따를 리가 없죠. 그런데 우리가 성서적으로 볼 때, 과연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거기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믿음만 가지면 능치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뭐냐? 내가 믿음만 가지면 내 말을 잘 듣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결국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데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바라는 데로 움직이는 사람의 형상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 가장 근본적인 신학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철저한 기복사상입니다. 내가 무엇을 얻는데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내가 얻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제가 이야기를 했던 기독교인의 생활윤리라는 것이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도저히 인간은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거의 없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곧 사랑이고 아가페인데, 그런 것들은 할 수가 없는 거죠. 믿음만 있으면 돈도 벌 수 있고, 믿음만 있으면 출세도 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 복싱선수가 챔피언 타이틀을 따자 말자 어느 목사님의 기도 때문에 내가 이것을 땄다고 그랬대요. 타이틀 따고자 하더라도 믿음만 있으면 되고, 자기가 원하는 아파트를 그려 놓고 서원기도하고 해 가지고 헌금주머니에 집어넣으면 목사가 그걸 가지고 기도하면 아파트 추첨이 되고, 극단적이지만 이런 예가 수없이 있습니다. 간증할 때 이런 것이 이루어졌다 하면 와 하고 박수치고, 그러니까 윤리성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의 이기심을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확장시키기나 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내 모든 것을 내어 주고 희생하는 그런 강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 모으고 돈 모아서 굉장한 교회당 짓고, 그렇지만 무엇을 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이 가능성의 신학을 세계에서 제일 많이 영향 받는 곳이 한국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있으면 거의 미쳐 나서 우리 경동교회 같은데 못 나옵니다. 증거도 아무 것도 없고.
문제는 그런 일들이 거짓말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있을 수 있고 얼마든지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병고치고 무슨 일들을 성취할 때 하필이면 기독교냐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이 경동교회도 이 전에 천리교가 있던 자리입니다. 천리교도 병고치는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말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냐는 거예요. 원죄라는 것이 성경에는 나오지 않고 신학자들이 만든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원죄가 전제되지 않고서, 우리가 구원이니 신앙이니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출발하지 않고서는 가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능성의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고, 윤리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겁니다.
두 번째로 불가능의 신학이 있습니다. 아주 정통 보수파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안된다는 겁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는데, 그것이 언제냐 하면, 죽은 다음에 저쪽 세상에 가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한 다음입니다. 세상에는 가능성이 없고 타계에만 있는 거죠. 도덕적인 비관주의요, 윤리적인 패배주의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 사후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 오늘 여기의 문제를 거의 문제삼지 않습니다. (중략)
불가능을 앞에 둔 가능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윤리는 불가능을 확실하게 인정함속에서 하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능성입니다.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이 될 수 없어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가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가변적이고, 내 자신도 변하고 환경도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도, 그 변하지 않는 빛이 비추어지는 변해 가는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윤리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행동을 할 수 있음은, 변하는 상황이 있기 때문에, 몇 백년이 지나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굳어 있는 기독교의 윤리나 도덕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윤리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황윤리입니다.이것은 기독교의 윤리에서 1960년대부터 시작됐습니다. 1970년대말까지 격론이 되었고, 80년대 와서는 다시 사라져 버렸습니다. 상황윤리를 한 사람을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려고 보니까 한국사람이나 동양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득이 서양사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제일 처음 연대적으로 보면 영국성공회의 로빈슨 주교입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가 있습니다. 현영학 교수가 우리나라말로 번역했어요. 비슷한 때에 죠세프 플레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상황윤리학자입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는 도덕입니다. 도덕임에 틀림없지만 상황에 따라서 거짓말을 하는 게 도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도 철저하게 도덕적인 겁니다. 살인하는 것이 도덕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본 회퍼가 히틀러를 죽이고자 했던 예를 이 사람은 들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도 도덕입니다. 간음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다. 버그마이어라는 여자의 예를 든 경우죠. (중략)
규범적인 도덕주의, 그것부터 깨뜨려 버려라 합니다. 그런 것을 깨뜨려 버리지 않고는, 앞으로 남북문제, 정보화시대의 문제, 복제인간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을 가지고 와서 딱딱 맞추고, 어거스틴이 한 이야기로만 사고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주일까지 이런 기초되는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가정문제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