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명 : 모다대첩
사건발생 : 2008년 4월 24일 새벽
사건전개 :
KBS 쿨 FM
“이 노래만큼은 되도록 피하려 했으나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이 곡을 원하셨기에, 감히 에서 이 분의 인권을 무시한 채, 이 곡을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준비 되셨나요? 이 시대 최고의 댄스곡은 모다?” (성시경의 ‘미소 천사’ 방송되다!)
얼마 뒤, MBC FM4U (이하 )
“자, 갑자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구요. 사연 소개하기 전에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약간 서정적인 노래가 듣고 싶어요. 괜찮은 보컬, 토이 라이브 노래 중에서 유희열 씨가 부른 ‘이 밤의 끝을 잡고’ 들으시겠습니다. (중략) 시간만 되면 보컬 레슨을 받고 싶습니다. 유희열씨의 가늘고 감정이 많이 담긴 목소리로. (중략) 별 다른 뜻은 없었구요. 그냥 듣고 싶었어요”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신청곡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에서 성시경 씨의 신청곡입니다. 토이 유희열이 부른 ‘이 밤의 끝을 잡고’. (중략)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큭큭.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큭큭.”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안다면, 당신은 심야 라디오프로그램, 혹은 이나 의 애청자일 것이다. 절친한 선후배이자, 동시간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두 사람은 ‘금지곡 배틀’을 벌였고, 두 프로그램의 애청자는 난데없이 벌어진 이 사건에 배를 잡고 굴렀다. 방송사를 초월한 두 DJ의 돌발 행동은 지금 연예계에서 오직 라디오 프로그램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즐거운 해프닝이다. 그들은 DJ와 DJ끼리, DJ와 팬들이 하나의 정서를 공유하면서 그들만의 방송을 한다. 유희열은 신청곡 사이에 끊임없이 자칭 ‘20대 여성의 대통령’이며 ‘아이돌의 임금님’인 자신의 우아한 문화 생활을 늘어놓고, 성시경은 애청자들이 보내온 연애담에 달달한 목소리로 까칠하게 상담해준다. 만약 라디오 방송이 언제부터 DJ 개인의 것이 됐냐고 분노하는 어르신이 있다면, 그 분은 SBS 러브FM (이하 )을 들어보시길 바란다. ‘방송사고’에 대한 우려 때문에 녹음 방송으로 진행되는 에서는 신해철이 방송 도중 자신이 꾼 ‘야한 꿈’의 내용을 너무 적나라하게 말해 담당 조연출이 멘트를 끊고 “이 부분은 도저히 방송할 수 없으니 90초간 음악을 들어주세요”라고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성시경이 2년 8개월여 동안 을 진행하고, 유희열과 신해철이 컴백하면서 ‘음악하는 DJ 오빠들’의 차지한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시간대는 지금 음악과 라디오가 살아남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다. 이들은 기존 라디오 프로그램의 형식을 파괴하고, 지금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비주류가 된 것들을 주류처럼 소개한다. DJ는 연예인이 아닌 대화 상대가 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들이 더 많이 소개되며, 청취자들은 냉정한 소비자가 아니라 가족이 된다. 신해철이 “99%가 듣는 음악이라고 따라 듣는 건 부끄러운 짓”이라며 자신이 추천하는 제니스 조플린의 음악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은 라디오 안에서도 하나의 도시, 천국, 혹은 스테이션을 만든 이 프로그램들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들은 라디오를 공중파 3사의 라디오가 아니라 영화 에서 등장한 그 멋지고 사적인 라디오로 돌려놓았다.
음악 이상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하는 ‘DJ 오빠’
공중파 방송 안에서 개인의 퍼스낼리티을 프로그램의 성격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건 이 ‘오빠’들만의 특권이다. 그것은 이들의 음악적 자양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은 성시경을 제외하면 모두 ‘1990년대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팬들은 ‘오빠’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의 퍼스낼리티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들의 프로그램은 그 때 신해철의 생각을, 유희열의 집에 있는 CD를 궁금해 했던 사람들의 바람을 실현시켜준다. 성시경 역시 MBC 의 ‘무릎 팍! 도사’에서 아슬아슬한 발언을 쏟아낼 정도로 자신의 퍼스낼리티가 분명하다. 지금 이들의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은 DJ가 무난하게 들을 수 있는 사연을 나열하고, 인기곡을 트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이어폰을 채웠던 이 ‘DJ 오빠’들에게 좋은 음악을 소개 받고, 자신의 고민을 상담하고 싶어 한다. 은 뜰 줄 알았는데 못 뜬 음악들부터 지금 국외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음악까지 모두 소개하며 음악 잡지가 사라진 시대에 음악 팬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대신하고 있고, 성시경은 연애 상담, 팝, 영화 등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청취자들에게 ‘교양 수업’을 한다. 유희열과 신해철의 컴백과 함께 인터넷의 어떤 게시판에 올라온 한 질문은 지금 청취자가 그들에게 바라는 역할을 대변한다. “그 방송을 어디서 하나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많지만 제가 좋아할만한 음악을 소개해주는 곳이 요즘 없네요.” 그들의 프로그램에서 개인의 취향과 퍼스낼리티는 라디오의 공공성을 해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라디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그들은 스튜디오 안에서 뮤지션이자 이야기꾼이고, 카운슬러다.
크진 않지만 섬세하고 단단한 라디오 커뮤니티
그래서, 그들은 공중파 방송 안에서 가장 사적이고, 가장 단단한 커뮤니티를 만들어낸다. 중학교시절부터 을 들으며 이제 20대가 된 애청자에게 신해철은 자신의 친구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존재다. 신해철은 자신의 애청자를 아예 ‘식구’라고 부른다. 특히 인터넷은 이 라디오 커뮤니티를 성장시키는 촉매제다. 라디오 방송은 끝나도 청취자 게시판에는 하루 종일 다양한 글들이 올라오고, 디씨 인사이드의 ‘라디오 갤러리’에는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의 팬들이 의견을 교환한다. 어디선가 야근을 하는 청취자의 사연을 이 ‘오빠’들이 소개하고, 그 날 낮에 당사자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다른 청취자들이 그를 격려해준다. 그들에게 라디오는 매스 미디어가 아니라 미디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공동체 같은 것이다.
생각 있고, 취향 분명하고, 음악 잘하는 ‘오빠’들을 중심으로 모인 이 라디오 공동체는 지금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크고, 실질적인 대안의 하나다. 성시경은 TV에서는 노래 잘 부르고, 오락 프로그램에서 재치 있는 멘트를 잘 던지는 남자다. 하지만, 라디오에서 성시경은 라이브 도중 너무 흥분해 ‘이 시대 최고의 댄스곡은 뭐다’를 ‘모다’로 발음한 ‘모다 시경’이 되기도 하고, 그룹 넬이나 에픽하이, 클래지콰이의 알렉스와 함께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젊은 뮤지션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에서는 게스트로 출연하는 이지형 같은 인디 뮤지션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알게 해주고, 은 여전히 ‘롹’ 을 듣고 싶은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준다. 그래서 이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DJ를 하는 뮤지션들 자신이 보다 강한 퍼스낼리티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TV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한마디 하기도 어려워 하지만, 음악 이야기로는 2시간을 말해도 모자란 뮤지션들이 숨을 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라디오는 계속 돼야 한다, 오빠들과 함께
그러나 이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지금 한국 방송가에서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대부분 20~30대인 청취자들이 그들의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 ‘오빠’들이 매일 두 시간씩 수많은 음악과 수많은 사연을 읽는 사이, 그들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기 꺼려했던 식구 이야기나 연애담을 털어놓을 수 도 있고, 취업에 대한 불안이나 한국의 우주인 프로젝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수도 있다. 드라마에서는 재벌 2세나 잘 나가는 전문직들이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라디오의 이 DJ들은 매일 그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민을 상담해준다. 이 세명의 DJ가 직업적인 DJ나, 의젓하기만 한 ‘선생님’이 아닌 친근한 ‘오빠’로 남는 것은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평범한 20~30대의 정서를 함께 호흡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라디오 방송은 라디오가 지금 다시 모두의 히트곡에서 그들만의 ‘리퀘스트’로, ‘청취자 여러분’의 것에서 DJ와 그의 ‘식구’의 것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유희열의 말처럼 “라디오와 음악 시장의 파이가 줄어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한 이들 중 성시경은 군입대로 2년 8개월동안 진행했던 을 떠난다. 그러나 은 그 이름을 그대로 유지한 채 클래지콰이의 알렉스가 계속 진행한다. 설령 ‘오빠’가 바뀌더라도, 커다란 방송국 안에서 작은 밤의 도시를 만든 이 라디오 공동체는 계속된다. 누군가는 이 시대에 무슨 라디오냐고, 무슨 음악 이야기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은 분명하다. TV에 나오지 않는 음악이 듣고 싶어질 때,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 못할 이야기들이 마음 속에 하나씩 쌓여갈 때, 우리는 이 ‘오빠’들의 라디오를 찾게 된다는 걸.
출처 - http://www.magazinet.co.kr/Articles/article_view.php?mm=006001000&article_id=48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