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모래판을 뒤흔들었던 파란의 사나이 강호동이 예능인으로 명함을 판지 벌써 15년이 흘렀다. 취중토크가 진행된 지난 4월 30일은 그가 모래판을 떠나 '이경규의 코미디 동서남북'으로 방송 활동을 시작한지 만 15년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여전히 순발력이 부족해 생방송은 식은땀이 난다"며 너스레를 떠는 이 남자. 그는 인터뷰 도중 "요즘 만나는 방송국 사람들에게 '절대 내 말과 아이디어를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고 털어놓았다.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다는 강호동을 만났다.
▶백상 대상 받은 뒤 찾은 아버지 병실
-44년 역사상 예능인으로는 처음으로 백상 대상을 받았습니다.
"5년 전 같은 무대에서 MBC '천생연분'으로 예능상을 받았어요. 방송인들에게 백상은 공중파 4사를 통틀어 주는 유일한 상이라 의미가 있지요. 백두장사에서 천하장사가 된 느낌이랄까. 아니 그 때보다 더 기뻤어요."
-수상 호명될 때 누구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나요?
"처음엔 아무 생각 안 났는데 차례대로 부모님, 이경규 선배님 얼굴이 떠올랐어요.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해준 분들이니까요. 죽을 때나 번지점프할 때 흘러간 시간이 압축파일처럼 휘리릭 지나간다는데 그날도 꼭 그랬어요. 사람은 모름지기 능력만큼만 칭찬받아야 하는데 너무 과분한 상을 받은 것 같아 겁도 살짝 났어요."
-호동씨도 겁을 먹을 때가 있군요.
"책에서 본 건데 인생 3대 악재 중 하나가 초년 출세라고 합디다. 너무 일찍 정점에 도달하면 안 좋아요. 그만큼 악재도 빨리 닥치니까요. 제가 씨름선수로 비교적 일찍 출세한 셈인데 아마 그래서 은퇴도 빨랐던 것 같아요. 내년이면 불혹인데 이번 대상 수상은 초년 출세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입니다. 클클. 성공하는 사람은 '내일'을 말하지만, 성공했던 사람은 늘 '어제'를 말하죠. 저는 늘 미래를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큰절 세리머니도 이색적이었어요.
"무대에 올라갈 때 마지막은 무조건 절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씨름판 떠난 뒤 공공장소에서 큰절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보기 괜찮았습니까?"
-상 받은 날 뒤풀이는 어떻게 했나요?
"방송 3사 PD들과 간단히 저녁 먹고 아버지 병실에 갔습니다. 지병으로 투병중이신데 거의 매일 병원에 가요. 그날은 금으로 된 트로피를 갖고 가니까 아버지가 굉장히 좋아하셨지요."
강호동은 편찮으신 아버지 때문에 경기도 양수리에 전원주택을 마련했을 만큼 효심이 지극하다. 조만간 퇴원하는 아버지 내외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길 계획이다.
이 얘기가 나오자 강호동은 "괜히 부동산 쪽으로 불똥 튈 수 있다. 그러면 욕만 얻어먹는다"며 말을 아꼈다. 큰 덩치에 비해 걱정이 많은 남자였다. 강호동은.
-시상식 후 만나는 작가, PD들에게 '나를 불신하라'고 선언했다죠?
"네. 자아도취 될까봐 신신당부했어요. '앞으로 내가 제안하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믿지 말라'고요. 자만심에 빠지면 대상 수상이 자칫 대재앙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의심하고 점검하면 절대 자만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평소 인터뷰에 인색한 이유는 뭔가요.
"거품이 두려워서죠. 신인 때는 신문에 기사 나오면 으쓱해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무섭고 부담됩니다. 우리 예능인의 최고의 적은 식상함이에요. TV에도 자주 나오는데 신문, 인터넷에까지 나오면 금세 질리죠. 식상함은 저희한테 죽음입니다."
-녹화 없는 날은 뭐합니까.
"북한산에 가거나 집 근처 헬스클럽에서 땀을 뺍니다. 요즘 버라이어티는 체력전입니다. 총알만 안 날아다녔지 전쟁터입니다. 살아남으려면 체력이 기본이죠. 씨름할 때는 체력 보다 정신력이 더 중요했는데, 방송 해보니 운동할 때보다 근력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체력이 받쳐줘야 녹화 끝까지 버틸 수 있고, 그래야 남들도 웃길 수 있거든요. 참 아이러니 아닙니까?"
-집에선 어떤 남편입니까. 서로 호칭은?
"의외로 제가 애교가 많은데 경상도 남자라 그런지 표현은 잘 못합니다. '자기야' '여보' 이런 말은 낯간지러워서 못해요. 그냥 '효진아' '오빠'라고 부릅니다."
-손이 커서 설거지 도와주면 금세 끝나겠어요.
"아내가 주방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해요. 자기 영역이라며 침범하지 말래요. 자기 임무는 남편 체중 안 빠지게 하는 거라면서 맛있는 음식도 자주 해줍니다."
-신혼인데 데이트는 어떻게 합니까?
"밀도있는 시간을 보내기에는 둘만의 여행이 최고인 것 같아요. 지난주에는 동강에 다녀왔습니다. '1박2일'의 경우 한 주에 2주치 분량을 찍거든요. 그럼 격주마다 금, 토요일은 제 시간이에요. 그때 아내를 태우고 제가 운전해서 지난주 갔던 곳에 또 갑니다. 녹화 시간에 쫓기느라 제대로 못 봤던 곳을 구경하면서 아내랑 진짜 1박2일을 보내는 거죠."
-롱런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까.
"한때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를 분석해본 적이 있어요. 경쟁이 치열한 미국 토크쇼 세계에서 그녀는 어떻게 살아남았고, 영향력을 얻었을까요. 반신반의하는 많은 사람들 중 분명히 윈프리의 가능성을 발견한 PD가 있었을 겁니다. 롱런 여부는 이렇게 훌륭한 제작진의 손에 달려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IQ 200짜리 한 사람 보다 IQ 100짜리 두 명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은 실패하더라도 팀플레이는 실패할 확률이 적습니다."
-강호동의 진행은 데시벨이 높고, 멘트가 비경제적이라는 일부 흠집내기 지적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수다와 대화, 억지와 카리스마는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제 부족함을 편집으로 커버해주는 위대한 제작진 덕분에 제가 있는 거겠죠."
-'무릎팍도사' 출연자 중 얼굴 붉힌 사람은 없습니까.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이런 걸 물을 거다,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우리 프로에 나오기 때문에 큰 마찰은 생기지 않아요."
-혹시 '무릎팍도사'에 게스트로 출연할 생각은 없나요?
"안 그래도 담당 PD가 마지막 방송 때는 제가 나와야 한대요. 오래 가는 프로가 돼서 몇 년 후에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흐흐."
-살면서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었나요?
"백두장사 시합 앞두고는 정확히 1주일 전부터 복통이 옵니다. 천하장사는 날자 계산할 것도 없이 딱 보름 전부터 배가 아파요. 큰 시합 앞두고 떨지 않는 선수는 한 명도 없습니다. 담담한 척하는 것 뿐이죠. 부담감 심할 때는 일부러 다쳐서 시합을 피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1박2일' 초창기 때도 숨이 턱턱 막혀 꾀부리고 싶었고요."
-좌우명은 뭡니까.
"날씨 좋을 때 우산을 준비하자입니다. 언젠가 매너리즘이 올 것이고, 프로그램이 신선함을 잃겠지만 그땐 또 우리 위대한 제작진이 짠하고 나타나 해결해줄 겁니다. 호동이가 그런 것까지 다 고민하면 머리 터집니다. 이경규 선배의 몰래카메라가 나왔을 때 다들 코미디는 끝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잖습니까."
-아직도 일각에선 일본 예능프로 카피가 존재하지 않습니까.
"10년 전 얘깁니다.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원, 투, 쓰리 놓고 말로 웃기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독서광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 달에 열 권 정도 닥치는대로 읽습니다. 운동부라는 이유로 중1때부터 교과서라는 걸 못 받아봤어요. 처음엔 책 읽는데 좀이 쑤셔서 혼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책 속에 길이 있고, 답이 있더라고요. 그래도 책 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 만날래, 책 볼래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아직까진 사람입니다. 클클."
-독선생 모시고 공부하는 건 없습니까.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아직 용기가 안 납니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닌데 아직 기회가 없어요."
-요즘 행복합니까.
"잘 모르겠어요. 백이면 백, 오늘 행복해 죽겠다는 사람은 없지요. 다 '그때가 좋았다'며 과거를 그리워해요. 곰곰히 그 이유를 따져보니까 불확실한 미래 때문인 것 같아요. 내일 닥칠 막연한 걱정 때문에 오늘을 즐길 여유가 없는 거죠. 당장 저도 이번주 '1박2일' 아이템을 고민해야 돼요."
-괜히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피하는 게 상책이죠. 천하장사 때 경험을 되살리면 됩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을 이용하는 건 반칙이죠. 어릴 때부터 '너는 모래판 밖에선 무조건 져야 한다'는 코치 선생님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세뇌가 돼 있어요."
-본인을 둘러싼 많은 오해도 있었죠.
"저만큼 루머가 많았던 연예인도 드물 겁니다. 거의 개의치 않고 살았는데 장인, 장모께 처음 인사드리러 갈 때는 조금 민망했어요. 피천득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인생이란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요. 루머의 산증인이었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가장 두려운 건 뭡니까.
"어느 순간 철들까봐 무섭습니다. 세상에 길들여지는 것이 철드는 거라면 죽을 때까지 철들지 말자는 게 제 생활신조 1조1항이에요. 남들 앞에서 폼 잡을까봐 두렵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쑥스러울까봐 늘 두렵습니다."
-평소 거울 자주 봅니까.
"꽃미남은 아니지만 거울 정말 좋아합니다. 그리고 거울 속 제 얼굴을 보고 억지로라도 웃으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거울 보고 자주 웃어라. 네 남은 인생 중 제일 젊은 얼굴이니까 열심히 봐둬라. 억지로라도 웃으면 우리 뇌가 무의식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대요.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즐거워집니다."
-끝으로 무릎팍도사의 요즘 고민은 뭡니까.
"어제 '스타킹' 녹화하다가 1년 전 뇌종양 선고를 받고 뇌수술을 두 번이나 한 12세 소년 출연자를 만났어요. 그 아이 부모가 병마와 잘 싸워 이긴 아들에게 기념 앨범을 만들어줬지요. 그 아이에게 '고통을 어떻게 견뎠냐'고 물었더니 '지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타일렀대요.
'내가 지치면 부모님이 힘들어한다'는 얘기였죠. 그 말을 듣고 정말 콧잔등이 시큰했어요.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고 투정했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방송 좀 힘들다고 화냈던 제 자신이 어찌나 초라했는지 몰라요. 저도 그 소년처럼 앞으로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자 강호동은 길게 한숨을 쉰 뒤 "오늘 대답을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며 "좋은 제작진은 원석을 다이아몬드로 잘 가공하는 사람들인데 인터뷰도 마찬가지"라며 기자에게 부담감을 떠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