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있어줘 a film by eric khoo
명작이라 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말에 매우 동의한다.
3년만에 다시 보았지만 처음 보았을때의 찬란한 빛이 전혀 바래 있지 않다.
진정한 사랑 그리고 아픔 희망.
나는, 너는, 그들은, 참 많이들 아파하며 산다.
물론 아픔으로 헐벗겨진 껍데기를 늘 드러내놓고 있진 않지만
간혹 그것들이 은근히 혹은 격렬하게 솟구쳐올라올때 주체하지 못한다.
마치 손톱이 빠진 맨살위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처럼.
손톱이 있을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빠져버릴경우에는
심연의 끝자락에 고이 잠들어 있는줄로만 알았던 작은 먼지 한줌마저 엄청난 탄력으로 튀어올라
아픔의 폭포수에 힘을 보탠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 아픔의 크기와 깊이를 본인들밖에는 알수없다는 것이다.
가치도 기준도 없으며 그 자체로서의 의미로만 그들 각자에게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첫사랑에 실패해 움츠려있는 까까머리 중학생보다,
생계가 막막해 동호대교 다리 한가운데에 올라 다리밑을 쳐다보고 있는 40대 가장이
더 아플거라고 쉽게 단정지을순 없는거 아닐까?
지극히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다. 그리고 굉장히 복잡하다.
간단히 얘기해서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알려고 노력하고 알았다고 외치지만, 모른다. 당연히.
넌센스이긴 한데 알지만 알지못한다.
아는척 이해하는척 하지만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처럼 마음깊은곳에서 느끼고 만질수는 없는것이다.
나의 아픔은 철저히, 잔인할정도로 나만의 것이며 쓰건 버리건 삼키건 그 모든 파장의범위 역시 my thing 이다
그렇게 우리와 그들은 살아간다. 각자 웃고 기뻐하며 때론 아프고 절망하며. 그렇게 그렇게.
내가 슬픔에너지 max가 되어있을때 그들도 똑같이 max가 되어있을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만나고 부딪혀야하고 살아야한다.
영화는 말한다. 삶과 사랑은 계속된다고. 그리고 삶에 대한 존경심을 놓지말라고
1곱하기 1처럼 쉬운답도 있고, 63453 곱하기 80992 처럼 어려운 답도 있다.
어려운문제가 계속 나올때가 있고, 쉬운문제가 계속나올때도 있다. 계속 아플수도 계속 좋기만 할수도 있다.
중요한것은 '계속'이다.
삶은 계속되어야한다.
희망속에서 절망이 싹트고 절망의 끝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LIVE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인간들은 그 밀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희망과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들 아닌가.
그렇다면 절망쪽보다는 희망쪽에 1cm라도 더 가서 줄타기를 하는것이 당연히 더 좋을것이고, 한발 내딛을때 발걸음이 무겁지 않을것이다.
영화에 직접 출연한 테레사첸의 나레이션에선 그녀만의 가볍지않은 희망의 메세지를 들을수 있다.
굳이 그녀가 갖고 있는 장애로서 그녀와 나를, 우리를 이분법적인 상투성으로 구분짓지 않아도,,
그녀의 희망으로 가득찬 현란한기술에 마음이 움직인다.
세가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만들어내는 스토리는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그들이 충돌해서 만들어내는
그 미묘한 순간들에선 기적과도 같은 위안을 던져줌과 동시에 희망의 씨앗을 던져준다.
지금 비치는 빛. 좋다.
당신, 내곁에 있어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