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날
해운대 바닷가에서 날씨가 좋으면 “저기 대마도가 보이네” 하며 늘 말하던 곳.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장 가까운 외국 대마도에 우리 사학과 교수들은 역사탐방을 해보기로 작정하였다. 이른바 쓰시마(쯔시마)에 가기로 했다.
고려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 곡물을 답례로 받아 가는 관계였던 대마도는 그후 왜구의 소굴이 되어 조선조 세종 때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정벌(己亥東征)하였는데 그 이후에 대마도는 소오(宗)氏의 간청으로 3포를 개항하고 세사미를 내려주었다는 등등이 내가 알고 있는 대마도에 대한 지식의 전부다.
별 기대하지 않은 채 그냥 한번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아침 10시 30분 영도 입구에 있는 국제여객부두터미널에 집합하여 승선을 위한 수속 절차를 마치고 긴 여객터미널의 통로를 통과하여 12시에 배에 탔다. 배 이름은 비틀즈 2세 (Beetles Ⅱ). 시속 77㎞까지 속력을 내는 쾌속선이다. 12시 25분 배는 출발하여 서서히 부산항구를 벗어난다. 날씨는 화창하고 약간 더운 것이 여행에는 쾌적한 날씨다. 어제까지 비가 오고 해상엔 돌풍이 분다고 했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륙도 전경
오륙도 등대
멀리서 오륙도를 보며....
애환의 영도다리
영도섬이 눈앞에 보이며 가득히 들어 선 아파트가 즐비하고, 이어 한진조선소가 보이고, 해양대학이 있는 아치섬(鳥島)이 보이고 제2의 방파제엔 고기 낚는 낚시꾼으로 가득하다.
드디어 제2 송도의 벼랑들을 끝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늘 부산에 살면서도 좀처럼 나와보지 못했던 항구 부산의 면모를 배를 탄 채 조감해 보는 기분은 정말이지 전혀 새삼스러운 경험이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49.5㎞이며 대마도에서 일본 후꾸오까까지는 140㎞ 정도라니 일본 본토에서보다 우리나라에서 훨씬 가까운 곳이다. 크기는 제주도의 2/3쯤 된다고 하고 인구는 4만 6천 명 정도라니 제주도의 1/10도 안된다. 행정구분은 나가사키(長崎)현에 속해 있으며 上對馬와 下對馬郡으로 구분되고 下對馬의 이즈하라항으로 가는 것과 上對馬의 히타카츠항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우리는 북대마도의 히타카츠항으로 가는 배를 탄 것이다. 이 배는 매일 일본의 후꾸오까로 가는 배인데 화, 목은 쓰시마를 경유하여 간다고 한다.
과연 쾌속선이다. 거품을 일구며 물위를 마치 날 듯이 달린 지 40분쯤 되니까 대마도가 훤히 보였다. 나지막한 섬이 울창하기 그지없다. 드디어 섬 전체 모습이 보이면서 일본 특유의 이층집 모습이 보이고 조용하고 작은 항구가 나타났다. 꼭 한 시간만에 대마도에 도착한 것이다. 240여 명이 승선하는 쾌속선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 일행 10여명뿐이었다. 히타카츠항의 조그맣고 깨끗한 건물에서 친절한 일본인 관리에 의한 여권수속을 간단히 마치고 준비된 미니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1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망망대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上對馬 國民宿舍에 도착했다. 上對馬町에서 경영하는 호텔(?) 인 모양인데 언덕 위에 위치하여 가히 경치가 절경이었다.
배에서 내리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서두르며 먹은 것이라고는 두유와 커피 한잔밖에 없는지라 잔뜩 배가 고팠는데 일본 가서 잘 먹을 것이라고 참고 있었다. 1시 30분 숙사에 도착하자 식당에서 걸 기대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쟁반 위엔 쌀밥 한 공기, 된장미역국 한 그릇, 히라스회 4조각에 간장종지와 다꾸왕 4쪽이 전부가 아닌가!
일본 가면 배곯는다는 옛말이 진실인가? 우리나라 같으면 상다리까진 휘지 않아도 갖가지 반찬에 걸판진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터인데 말이다. 비틀즈배 안에서도 비행기와는 달리 차 한잔, 쥬스 한잔 대접받지 못했는데..... 잔뜩 기대한 점심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일본 음식의 색, 상,모습
방 배치를 받으니 다다미방에 큰판이 하나 있고 그 위에 茶 만들어 먹는 세트와 마호병이 있고, 후수마 안에는 일본 특유의 잠옷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커튼을 여니 넓은 창으로 망망대해와 등대 그리고 소나무가 예쁘게 자란 작은 섬이 눈앞에 펼쳐져 그 신선한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점심은 기막혔지만 반분은 풀렸고 간단한 식사는 다이어트 식단으로 위로하기로 마음먹었다. 살이 몇 백g은 빠졌겠지....
2시 30분 북대마도 관광에 나섰다.
길은 모두 원웨이 정도의 좁은 길이고 좌측통행에 운전대는 오른쪽에 있어서 좁은 길 앞에서 큰차가 오면 마치 역주행하는 듯한 느낌 속에 충돌할 것 같은 착각에 몇 번이나 빠지며 놀라곤 했다. 꼭 영국처럼 일본은 모든 걸 따르니 말이다. 영국에서 우리 유학생들이 많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차는 후진해서 서로 양보하며 지나치곤 했다. 산에는 빽빽하게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하여 마치 원시림을 보는 듯했다.
등산을 하려해도 산길이나 등산로가 없기 때문에 아무 곳에나 올라가지 못하고 또 뱀이 많아서 위험하다고 한다. 대마도는 등산로가 꼭 하나 있는데 해발 800m의 산이라고 한다. 가이드 말이 한국에서 땅군들 관광객을 한번 데려오면 수지맞을 것이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길은 산길을 따라 혹은 해안선을 따라 꼬불꼬불하기가 그지없었는데 지형 때문이며,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큰길을 곧게 만들지 않고 일부러 그렇게 길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대마도는 바다 속에 솟은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85%가 산이라고 하며 울창하기가 그지없었다. 樹種은 스기(삼나무)와 편벽나무, 소나무가 주를 이루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朴堤上 순국비가 있는 곳이었다.
“신라의 내물왕은 倭國과의 통교를 위해 아들을 인질로 보내기로 하고 지모가 뛰어난 박제상을 딸려 보낸다. 왕자 일행이 쯔시마의 사비노우미나토(鉬海水門)에 이르러 정박하게 되었을 때 박제상은 왕자의 침실에 짚인형을 재우고, 다른 배로 왕자를 무사히 탈출시킨다. 다음 날 이 사실이 발각되어 박제상을 비롯한 사신들은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 비는 이국에서 나라를 위해 죽어간 이들의 넋을 기리고자, 1988년 한국과 쯔시마의 학자, 유지가 힘을 모아 건립하였다”고 순국비에 쓰여져 있다. 과연 여기서 박제상이 죽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학자들은 말했다.
박제상 순국비
다음으로 일본 쯔시마의 야마(山)네꼬(고양이)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야생생물보호센터를 견학했다. 멸종되는 야생동물이 많은데 그중 대마도 야마네꼬를 보호하기 위한 센터인 것이다. 우선 25분에 걸쳐 두 편의 관련 비디오를 보여주었는데, 산고양이의 생태와 보호활동 그리고 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방법과 이해, 또한 세계 야생고양이들과의 비교 등 상세한 내용이었다.
사실이지 이 시시하고 척박한 대마도에서 시원찮은 고양이 같은 야생동물에 대해 이렇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억장 무너지는 일이었다. 우리네는 뭐가 죽는지 사는지, 사람이 납을 먹는지, 콜타르를 먹는지 죽는지 아무 관심도 대책도 없는데 말이다. 일행 중 한 사람 曰 “더러운 살찌이(고양이의 사투리) 한 마리 가지고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참 우리 처지가 한심스럽다.”고 했다. 동감이었다.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마음에 드는 정치가와 정책을 만날 수 있을까?
대마해협조난자추모비가있는 언덕에서 본 바다
돌아오는 길에 망망대해가 보이며 낙조가 아름다운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대마해협조난자추모비가 있는 공원에 들렀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쓸쓸하고 깊은 시골 같은 향취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곳에 연보라빛 들국화가 군락을 이루며 가을 정취를 애잔하게 돋구어 주고 있었다. 그 공원 언덕을 걸어내려 오면서 보니 그곳은 바로 군대의 주요 포대가 있는 요새로 그 아래는 방공호 같은 큰 대피소나 군사시설이 있는 것 같았다. 역시 대마도는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호텔에 돌아오니 6시. 잠깐 쉰 뒤 7시에 저녁식사를 하러갔다. 배가 잔뜩 고팠다.
또 점심때처럼 그럴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식탁이 푸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흑돔 4마리를 세 토막씩 낸 것, 12토막에 에 배추, 표고버섯, 팽이버석, 쑥갓, 양파, 곤약, 튀김두부, 파, 당근, 양파, 우동사리가 가득한 커다란 쟁반이 식탁을 가득 메우고 있다. 4인 1조의 식탁으로는 한국에서도 양이 너무 많다고 느낄 정도로 푸짐했다. 이 요리는 대마도 특유의 요리 “이리야끼”라는 것으로 산해진미의 모든 소재를 다 넣어 맛나게 하는 모듬요리였다.
저녁식사 때 일본 전통 춤을 선보이는 소박한 아줌마무희들
불 위에 놓인 솥의 끓는 물이 육수라고 한다. 게다가 낮에 먹은 히라스회도 놓여있고 싱싱한 새끼오징어 삶은 샐러드도 있고, 밥도 한 밥통씩 놓여있었다. 일행은 입이 벌어졌다. 가져간 팩소주를 내놓고 걸판지게 먹기 시작했다. 먹어도 먹어도 다 먹을 수가 없어서 결국은 남겼다. 도저히 일본에 와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참으로 어안이 벙벙했다. 맛있고 양 많고, 분위기 좋고, 경치 좋고, 소주 있고, 아끼바리 쌀맛이 죽여주고...... 후문에 의하면 아주관광에서 우리 일행을 위해 특별히 신경 써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일행은 한 시간 동안 정신없이 먹는 데만 열중했다. 배가 너무 불러서 모두들 호텔 문밖을 나서며 시원한 밤공기를 마셨다. 초엿새 달이 아름다웠다.
대마도는 마치 무인도처럼 조용하고 맑고 캄캄했다. 공기는 100만불 짜리의 무공해 그 자체다. 깊이 숨을 쉬었다. 참으로 좋다. 일행은 아래쪽 나무 벤치에 모두 걸터앉아 멀리 보이는 등댓불과 환히 불 밝힌 오징어 잡이 채납기 어선의 불을 내려다보며 환담을 즐겼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오리온좌, 큰곰자리, 북두칠성......
다 늦게 방에 돌아와 에어컨을 틀어놓고, 캄캄한 망망대해를 반짝반짝 밝혀주는 등댓불을 보면서 밤의 대마도를 즐긴다. TV에선 유고의 밀로셰비치 이야기,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충돌 이야기가 한참이다. 독재자는 결국 쫓겨나겠지......
2. 둘째날
6 : 30 Wake up call → 7 : 30 식사 →8 : 30 출발
6시 30분 눈을 뜨니 바로 수평선 위로 해가 반쯤 떠오르고 있었다. 너무나 놀라웠다. 잠자리에서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일출광경을 본 것이다. 정말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내일 아침은 더 일찍 일어나서 보아야지 마음먹었다.
아침밥은 산뜻했다. 정어리구이, 밥, 국, 사라다.
일출 광경
오늘은 남북 길이 82㎞라는 대마도 일주에 나섰다. 하대마도의 이즈하라까지는 꼬박 3시간 이상이 걸린단다. 우리를 인도해주는 가이드 황윤숙양은 일본입명관(立命館) 대학을 졸업한 재원으로 가이드 생활 5년째라는데 꽤 아는 것이 많고 얘기가 구수하고 가이드 정신이 투철했다. 꼬불꼬불 산길과 해변길을 3시간여 가는 동안 하나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얘기가 진지하면서도 재미있었는데, 좌석이 남는데도 불구하고 내내 문 입구에 서서 우리들을 보며 얘기해주었다.
그런데 도대체 호텔 직원 외에 일본 사람을 대마도에서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곳곳에 솔개만 날고 파도소리만 들렸다. 미스 황의 얘긴 즉 일본인의 하루생활은 새벽 5시부터 시작되는데 모두 직장 나가고, 집안 일하고, 너무나 열심히 일하니까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단다. 특히 대마도는 인구가 적으니까.....
여성들은 아침을 먹고, 이불 말리고, 집안일 하고, 눅눅한 다다미를 위한 청소 등 바쁜 일과를 보내다 저녁엔 시장 갔다오면서 빠찡고집에 들러 빠찡고를 한판 한다고 한다. 한 동네에서 가장 휘황하게 치장된 건물은 빠찡고하는 집인데, 요즘은 주부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시장바구니의 신선도 유지를 위한 칸칸으로 된 냉장고까지 비치하고 있다니 웃지 못할 일이었다. 모든 걸 따라하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빠찡고 문화는 어떻게 들여오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웠다.
집앞, 좁은 골목길...곳곳에 가꾸어놓은 예쁜 꽃들
재일 교포들 중에서 주로 성공한 사람들은 빠찡고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외 MK택시회사 경영으로 유명해진 재일 교포 얘기도 있었는데 대학졸업자도 많이 취업을 희망한다는 것으로 일본 회사원의 초봉이 20만 엔인데 비해 MK회사는 30만 엔을 주며, 복지시설, 제도, 시험제도 등 다양한 방법의 경영으로 성공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얘기다.
또한 일본인들은 대단히 치밀하여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또한 이 직업을 세습하는 것을 당연시하여 양자를 들여서도 가업을 잇고, 또 대기업 이사가 된 아들도 나중엔 아버지의 우동집을 계승하여 우동집 주인이 된다는 얘기는 흔히 듣지만 또 새삼스러웠다.
치밀하고 폐쇄적이고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 등은 이들 사회에 병폐를 드러내게 하여 이지메(왕따) 현상, 성적 도착 현상, 살인 현상 등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심수관 도자기 이야기, 야쿠자 얘기, 스모 얘기, 다까노하나와 와까노하나 집안 얘기 등등 얘기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가는 동안 특이한 모습이 몇 개 있었다. 벼를 심은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벼를 베어서 말리는 모습이 우리처럼 땅바닥에 그냥 두지 않고 막대를 세워 그 위에 죽 걸쳐놓은 방법이 좋아 보였고, 곳곳에 소규모 납골당이 있었다. 그 납골당 속의 항아리에는 사람의 뼈 중 목뼈만 골라 담아 놓는다고 한다. 또 한곳은 얕은 바닷가에 잉어인지 숭어인지 그냥 자연산의 물고기가 가득했다. 곳곳의 바닷가는 명경알처럼 맑았는데 일본 전체에서 가장 맑은 물로 인정받은 곳이 대마도라고 한다. 그리고 산을 허물어뜨리고 길을 내었기 때문에 산사태가 날 우려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의 모든 허물어뜨린 산자락들은 시멘트로 아름답게 마무리를 짓고 있어서 이끼 끼고 풀이 솟아나고 하여 자연과 어우러진 시멘트 처리는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의 언덕 길 곳곳에 “낙석주의”라는 무책임한 행정처리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해안가는 맑고 깨끗했다
근처에는 아담한 온천이 있었다.
온천의 휴게실에서 바라본 경치
일본에 유학했다니 모든 남성들이 남녀평등에 관한 느낌은 어떠하냐고 황양에게 물었다.
모든 남성들이 “유럽의 城에서, 일본여자와 함께, 중국요리를 먹으며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일본여자는 남자들에게 잘한다는 인식은 이제 옛날 말이란다.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에서 보았듯이 황혼 이혼은 늘어만 가고, 경제권도 여자가 쥐고 있고, 젊은 남자는 더 여자에게 맥을 못춘단다. 그래도 아직 한국 남성들은 행복한 셈이다. 중국, 일본보다.
와타즈미 신사
이 신사에는 바다 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고 한다
얘기하는 도중에 가본 곳은 제일 먼저 와타즈미神社였다. 와타즈미신사는 토요타마町의 상징으로 신화의 인물인 용과 공주를 제사지내는 海宮이다. 즉 두 신을 모시는 바다신사로 불전 정면의 바다 속에 서 있는 도리이(신사문)는 만조시 2m 정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파도가 잔잔한 아소만과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신사 한쪽에는 또한 반드시 스모를 하는 도장이 있었는데 원래 스모는 神에게 추수에 감사하며 그 혜택으로 가장 건강한(쌀찐) 사람을 골라 씨름하게 하여 神을 찬양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데 도꾸가와 막부 때 조직화되고 체계화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본 곳은 에보시다케 전망대였다. 아소(淺茅)만을 사방으로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전망대로 깎아지른 듯한 산과 해안선의 조화는 최고의 경치다. 아소만은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쓰시마의 윗섬과 아랫섬의 경계 부분에 위치해 있다. 멀리 산을 깎아 만든 공항 활주로가 보이고, 두 섬을 잇는 다리가 보였다. 우리나라의 다도해 풍경과 중국의 천도호 경치를 뺨칠 만큼 아름다웠다,
만제끼 바시(萬關橋)
만관교 아래로 내려다 본...
근처에 한아름씩 피어있는 들꽃
드디어 긴 상대마도를 지나 하대마도로 가기 위해 다리를 건넜는데 차에서 내려 걸었다. 다리 이름은 만제키바시(萬關橋). 여기에는 재미있는 역사가 숨어 있었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견제해 온 일본은 1904년 드디어 러일전쟁으로 기습 공격을 벌였는데 이에 대응하려는 발틱 함대가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운하를 경유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일본쪽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마도 근처 대한해협에서 결단을 내기로 한 일본은 배를 요소요소에 숨겨놓기 좋은 대마도를 군사요충지로 삼기 위해 남․북대마도가 육지로 붙어있던 것을 재빨리 수심 5m의 깊이로 육지를 파서 그 당시 일본 함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즉 구일본해군의 군함 출입을 위해 만든 인공운하로 섬은 두 개로 나누어졌고 다시 여기에 다리를 건설함으로써 두 섬은 이어진 것이다.
결국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그후 그 파놓은 곳에 두 섬을 잇기 위해 놓은 높은 다리가 바로 이 만제키바시인 것이다. 이 다리 위를 산책하며 바라보는 아소만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또 그 당시 설사병이 난 일본군의 장 치료약도 征露丸인 것은 러시아 정복의 의미를 담고 있는 약 이름이다. 그후 이미지 변신을 위해 正露丸으로 약명을 바꾸었다고 한다.
나가사끼현립 대마도역사민속자료관
조선국 통신사의 비
드디어 남대마의 제일 큰 도시 이스하라에 도착하여 향토자료관을 견학했는데 이름은 나카사키현립 대마역사민족자료관이었다. 입구에는 고려문이 있었는데 옛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져 있었다.
자료관 안에는 특히 눈을 끄는 것이 조선통신사 그림 두루마리였다.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정권은 국교회복을 바라며 조선국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일본의 의향을 받아들여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이를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라 불렀다. 약 400~500명 정도로 구성된 이들 일행은 서울을 출발, 부산을 거쳐 쯔시마에 상륙한 뒤 다시 수로를 따라 세도나이카이를 거쳐 에도(동경)에 도착하였는데, 1607년~1811년까지 약 200년간 12회에 걸쳐 통신사가 방문했다고 한다. 그 화려한 행렬을 그린 두루마리는 길이가 16.58m에 이르렀다.
1시쯤 점심을 먹었는데 일본식의 뷔페여서 또 점심은 매우 푸짐했다. 후식으로 과일, 아이스크림, 커피까지 먹고 나니 배는 또한 만복이다.
대한인 최익현선쟁순국비
어린애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앞치마 입은 작은 불상들
식사 후 걸어서 간 곳은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모셔진 수선사라는 절이었다. 구한말 대 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 선생이 쯔시마(對馬)에 유배되어 순국하자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修善寺)절에서 장례를 치른 후 부산항으로 이송되었고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비를 세웠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