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킨스_브리스톨 청춘들의 소돔과 고모라
브리스톨은 수줍은 애티튜드로 자긍심을 발산하는 도시다. 역사적으로는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브리스톨은 일찍이 아프리카와 카리브해(海)로부터 일급 노예들을 수입해오던 무역항이었고, 그 덕에 오래 전부터 다민족 도시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당연히 다문화적인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낮이고 밤이고 넘쳐난다. 오래 살아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이게 은근히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 이를테면, 남들이 모던 록을 띵가띵가거릴 때 브리스톨리안들은 드럼 앤 베이스와 트립합을 시작했고, 다른 도시들이 계급별로 스스로의 구역을 정리했을 때 브리스톨리안들은 부산 감만동 부두의 주택들처럼 마음껏 파란색 노란색 형광색 '뺑끼'를 벽에 회칠해가며 일종의 문화적 히피임을 스스로 과시할 줄도 안다.
예찬은 여기까지. 사실 브리스톨은 촌구석이다. 영국 서부의 중심도시라지만 근교에 있는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나 바로 옆에 붙은 관광도시 배스에 밀려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으며, 북부의 중심도시 맨체스터나 동부의 런던, 중부의 버밍엄에 비하면 별달리 유명세도 없다. 변변한 축구팀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영국에서 가장 내향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탓인지는 몰라도 스포츠에 그다지 열광하는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한국 BBC 방영제목 )의 주인공 캐릭터 비키 폴라드(Vicky Pollard)가 빌려온, 영국에서 가장 은근히 촌스러운 액센트를 구사하는 터라 다른 지방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개인적으로도 이 액센트를 강하게 ‘어돕트’한 터라, 매력적인 BBC 발음과는 끝도 없이 멀어진 지 오래다.
이렇게 대영제국 중심부에서 떨어진 조용한 도시라서, 드라마 가 브리스톨에서 촬영된다는 것은 브리스톨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꽤나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하긴, 영국에서도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제대로 활성화(그리고 숙성화)된 도시에서 ‘스킨스(대마초)’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2007년 1월 25일부터 영국 채널4의 디지털 채널을 통해 방영을 시작했고 한국 ‘어둠의 경로’족 사이에서도 발광적인 열광을 모으고 있는 는 16에서 18살 사이의 브리스톨리안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청춘 드라마다. 그러나 이게 진짜 청춘 드라마인가? 글쎄. 는 사실상 18세 미만의 시청을 금지하고 있는 미드나잇 편성 드라마다. 평균 2백만 시청자? 이게 다 부모들 잠자리에 들길 기다렸다가 몰래 TV 켜고 보는 애들이 올려놓은 시청률 아니겠나.
같은 드라마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다. 는 청춘의 아슬아슬한 전선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캐릭터들을 모조리 모아놓은 과격한 인형놀이다. 남녀노소 모조리 끌어당기는 섹스 자석이라도 몸에 지니고 있는 듯한 토니, 남정네들에게 꽤나 인기를 모으지만 토니 앞에서는 왠지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여자 친구 미셸, 총각 딱지를 떼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소년 시드, 거식증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는 소녀 캐시, 심리학 선생과의 육체적 사랑을 꿈꾸는 소년 크리스, 모하메드를 신으로 모시는 무슬림 집안 자제이건만 대마초의 신을 몸과 마음을 바쳐 영접하는 앤워, 도톰한 연분홍색 입술에 금발의 머리칼을 가진 나긋나긋한 게이소년 맥시, 브리스톨의 유명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그러므로 당연히 마약쟁이 난봉꾼) 아버지를 둔 음악천재 잘. 하나같이 인종과 종교와 마약과 거식증과 섹슈얼리티와 재능과 가정의 문제로 정신없는 아이들이다. 영국에서 아이들이 십대로 산다는 것: 가 까발리는 청춘의 초상
의 작가들은 현존하는 영국 십대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모조리 끌어 모으기로 결심이나 한 모양이다. 매 에피소드 당 한 명 혹은 두 명의 캐릭터에 포커스를 맞추며 진행되는 방식 또한 ‘영국 십대들의 모든 면모를 모조리 보여주자’는 야심으로 보인다. 한명 당 한 가지씩 문제를 끌어안고 있으니 의 브리스톨은 ‘청춘의 소돔’ 혹은 ‘소년소녀들의 고모라’라고 불리워야 마땅할 지경이다.
식성 까다로운 영국 시청자들이 전형적인 캐릭터들을 전형적으로 모아놓은 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것이 정말로 ‘새로운 쇼’이기 때문이다. 사실 는 영국 TV가 미국 TV의 성공 지점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같은 이전의 영국 청춘 드라마들이 오래된 자국 소프 오페라의 전개 방식을 구태의연하게 답습하는 데 그쳤다면, 는 할리우드의 청춘 영화나 같은 미국 청춘 드라마의 성공 요인들을 성심성의껏 베껴온다. 대단히 빠른 전개와 MTV의 감수성은 브리스톨이라는 조용한 도시의 분위기와 상충하며 기묘한 불협화음의 매력을 뽑아낸다.
영국의 공식 팬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가 한국의 비공식 팬들을 어둠의 경로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뭘까. 물론, 니콜라스 홀트다. 신장이 190cm에 육박하는 꽃청춘으로 자라버린 홀트는 의 괴짜 소년을 조금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 섹슈얼한 매력을 흠뻑 뿜어댄다. 애들은 원래 빨리 자라는 법이지만 이 친구의 성장 속도는 의 (다리보다 머리가 먼저 자라는 듯한) 주인공들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썩소를 날리는 미남자가 덜 자란 가슴 근육과 다 자란 다리를 휘청거리며 남녀노소를 꼬시려 덤벼드는 걸 보고 있노라면 ‘뭐 이런 괴물 같은 캐릭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니까. 하지만 는 니콜라스 홀트의 매력만을 내세워 청춘 시청자들을 후려치려는 가벼운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이건 성인의 대지에 발을 딛기 직전, 불안한 허공으로 잠시 뛰어올라본 청춘들의 이야기다. 무겁고 아프다. 마음먹고 보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