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아이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심미선, 신효순.
2002년 당시 열네살의 여중생이었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아마 수능을 치뤘을 것이고,
지금쯤 어여쁜 대학생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온 국민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던 2002년 6월 13일.
그때 미선이와 효순이는 단짝친구 다희의 생일잔치에 가던 중이었다.
그날이 다희의 생일이었고 다음날이 효선이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둘의 생일잔치를 다희네 집에서 한꺼번에 하기로 했고
효순이와 미선이는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 2리를 가로지르는
좁다란 56번 지방국도를 걷고 있었다.
버스 두대가 지나가기도 좁은 도로..
그 도로엔 훈련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두 여중생이 그 좁은 길을 지나고 있음에도
앞서 미군 지프를 운전하고 있던 병사도,
육중한 궤도차량을 운전하던 병사들도 두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효순이와 미선이는 차량을 피하고 싶었지만,
퀘도차량은 그대로 두 여중생의 몸을 짓밟고야 말았다.
그렇게 효순이와 미선이는 6월의 아스팔트 아래
붉게 스러져 갔다.
그리고 이틀 후,
한국과 포르투갈의 월드컵 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렸고,
열광적이던 월드컵 분위기에 묻혀
정부와 언론은 두 여중생의 희생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

<효순이 미선이 추모비 일부 : "미 2사단" 부분이 긁혀 훼손되어 있다.>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은 무관심 속에 계속 묻혀지기 시작했고,
시민단체들과 대학생들에 의해 붙여진 대자보와 포스터를 통해
2002년 8월이 다 되어서야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후 효순이 미선이의 부모님들은 보상금 대신,
두 아이와 과거 미군에 의해 억울하게 숨진 넋을 기리는 추모공원과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군이 일으킨 범죄에 대해 기록하고 알리는
교육기념관 건립을 바랬다.
하지만 미군은 여론에 밀려 간신히 추모비 하나만을 세웠고,
시종 방관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사고가 있은지 보름쯤 지난 7월 4일,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던 미선이의 오빠 심규진(당시 고3)씨의 귀에
인근 미 2사단 영내에서 쏘아올린 미국 독립기념일 축포 소리가 들렸고,
규진씨는 격분하여 학교를 뛰쳐나갔으나 친구들이 간신히 말렸다.
그리고 2002년 11월 20일.
가해 미군의 무죄 판결이 난다.
2004년 5월 24일에는 사진을 통해 효순이 미선이가 당한 사고를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렸던
사진 운동가 '이용남'씨가 효순이 미선이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에 추모비 앞에서 농약을 삼켰다.
두 여중생의 죽음은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산 교범이었다.
이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너나없이 분노하였다.
살인미군 처벌, 부시 공개사과, SOFA개정 범서명운동에 140만명의 국민들이 동참하였고,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 국제적인 관심과 지지 속에서 투쟁이 계속되었다.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에 대한 최초의 투쟁은 6월 15일 용산 미군기지 5번 게이트 앞에서
"미군 장갑차 사망자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공동대책위" 주최로 열린 주한미군 규탄 기자회견이었다.
이어 6월 20일에는 의정부 미 2사단 정문에서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살해 규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대학생들과 사회 시민단체 뿐 아니라
효순 미선이의 언니 오빠들이 다니고 있는 의정부 여고와 의정부 고등학교
학생들이 150명이나 참가하여 친구, 동생의 죽음에 대해 미군이 진상조사를 외면하고
책임을 미루는 것에 대해 항의했다.
6월 26일에는 의정부 미 2사단 앞에서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표단은 미 2사단장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하려고 하였는데,
미군측은 콧방귀를 뀌면서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취재하던 기자 2명이 미군측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연행, 감금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듯 힘든 싸움은 월드컵 분위기 속에서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이후 인터넷을 통해 대중들에게 급속히 알려지게 된다.
8월 1일 여중생 범대위는 여중생 사망사고의 해결을 촉구하는
명동성당 천막농성에 돌입하였으며, 대학생들은 8월 3일 파주 미2시단
7기갑부대 4대대 소속 장갑차 30대를 가로막고 시위를 벌였다.
8월 7일.
SOFA에 따라 재판 이양권을 포기할 수 없다는 미군에 통보에 따른 분노로
여중생 범대위는 노상 농성까지 진행하였다.
이처럼 주한미군에 대한 투쟁은 불을 지피듯 곳곳에서 타올랐다.
2002년 11월 20일.
인터넷 누리꾼 아이디 '앙마'의 제안으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는
삽시간에 수만의 촛불 물결을 이루었다.
11월 26일 전교조는 SOFA 불평등 관련 공동수업을 시작하여
한미관계의 부당성을 학생들에게 알렸고, 이후 공동수업은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2002년 12월 7일.
전국 동시다발적인 자주적인 나라 만들기 대회가 진행되었다.
이 대회는 전국 43개 지역에서 진행하였고, 서울에 3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하였으며,
미대사관 투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고
미대사관 정문 앞까지 투쟁대오가 진출하였다.
12월 14일을 '주권회복의 날'로 선포하고,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을 진행하였고,
온 국민은 태극기 게양, 6시에 촛불의식과 묵념등의 공동행동에 참가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64개 지역에서, 해외 15개 나라에서, 40~50만의 사람들이
다양한 행사와 집회를 열었다.
행사와 집회가 열렸던 도시는 다음과 같다.
서울, 과천, 오산, 여주, 청주, 제천, 음성, 진천, 괴산, 영동, 옥천, 보은, 단양, 대전, 공주,
논산, 당진, 보령, 서산, 아산, 연기, 천안, 홍성, 서천, 태안, 전주, 고창, 남원, 장수, 순창,
익산, 광주, 목포, 여수, 순천, 영광, 광양, 진도, 춘천, 강릉, 원주, 동해, 횡성, 대구, 성주,
안동, 구미, 포항, 왜관, 김천, 부산, 울산, 거제, 진주, 김해, 사천, 마산, 창원, 밀양, 거창,
통영, 함한 등 64개 지역과
독일 베를린, 뮌헨, 프랑스, 스웨덴, 일본, 미국, 러시아, 호주,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뉴질랜드 등
해외 15개 나라.
그 이후 2003년에도 투쟁은 계속되었고, 300차 정도의 촛불 집회가 진행되었다.
2002년.
당새 대학 새내기로서 내가 경험했던 2002년의 촛불은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2008년.
군을 제대하고 이제 대학생활을 마무리 하는 내게,
다시한번의 촛불이 찾아왔다.

...2008년의 촛불시위는 2002년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아있다.진실을 왜곡하고, 언론을 장악했던 당시의 상황과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고,어린 여학생들이 집회의 큰 부분을 차지 한다는 것도지난 2002년의 뜨거웠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2002년과 조금 다른 특징이 있다면,2002년 당시 처음으로 열리던 촛불집회가 가지던 경직성을 벗어나학생, 주부, 예비군, 노동자, 지식인 등정말로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이 모여 함께대중적인 새로운 문화 코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2002년에 겪었던 감동의 순간들이,2008년, 지금의 촛불을 더욱 더 환하고 강하게 하는데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은 아닐까....
...특히 집회 내내 스스로 자제하고, 질서를 지키던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대한민국의 집회 문화가 이정도로 성숙해 졌구나.'하고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 속에 담겨진 우리의 소망은
하나가 둘이되고, 어느덧 열이 백이되었다.
2002년에 효순이, 미선이의 죽음을 묻히게 했던
한일 월드컵때 쓰였던 응원문구 중에 하나가
"꿈은 이루어진다" 였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2008년의 촛불이
지금 우리의 꿈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 속에서 효순이 미선이를 잊지않고 추모하며..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그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도록 노력해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