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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열여덟번째..역사한잔 하실까요? -맥주의 발견

Beautiful ... |2008.06.16 18:42
조회 88 |추천 5


 

 

맥주는 새롭게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인류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된 음료였다. 맥주는 기원전 1만경 마지막 빙하시대가 끝나갈 무렵,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서 야생곡물 수확이 널리 보급되었을 때에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었따. 이 지역은 현재의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위로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터키 남동부까지이며, 아래로는 이라크와 이란 접경 지역에 해당된다. '비옥한 초승달'이라는 명칭은 지리학적으로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었다.

 

 빙하시대가 끝났을 때 이 지역의 고원지대는 야생 양과 염소, 돼지 등을 키우는 데 적합한 환경이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야생 밀과 보리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사냥을 하면서 떠돌아다니던 인류 집단에게 풍부한 먹을 거리를 제공했다는 것을 의미했따. 그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들을 채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야생으로 자라나는 풍부한 곡물을 수확하기도 했다.

 


 그러한 곡물들은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잇는 식량의 원천이었다. 비록 조리하지 않고 그대로 먹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빻거나 잘게 부수어 물에 담가 조리하면 그런대로 먹을 만한 식량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 곡물들을 수프와 함께 섞어서 먹었을 것이며 물고기나 견과류, 장과류 등과 같은 다양한 재료들을 석고로 만든 그릇등에 담아 물과 혼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끝이 갈라진 막대를 사용하여 불에 달군 돌을 그 안에 함께 넣었다. 곡물은 아주 소량이지만 검게 그을린 낟알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뜨거운 물에 담그면 수분을 흡수하여 부풀어 터지면서 수프에 녹말 성분을 방출하게 되고 그에 따라 농도가 짙어지는 것이다.

 

 곡물 낟알은 발견되었을 당시에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음식들과 달리 곡물은 말려서 보관하면 수개월 또는 수년동안 저장이 가능했으며, 다른 재료가 없을 때에도 수프나 죽으로 만들 수 있었다. 곡물이 발견됨으로써 그것을 수확하고 가공하며 저장하는 도구와 기술에도 많은 발전이 있었따. 비록 만드는데 상당한 정성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음식이 부족한 경우를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는 기원전 1만년경 곡물수확에 사용된 화로, 저장용으로 사용된 지하동굴, 곡물을 말니는 데 사용된 화로, 저장용으로 사용된 지하 동굴, 곡물을 빻는데 사용된 맷돌 등이 고고학적 증거로서 남아 있다.

 

 비록 수렵채집자들이 완전한 유목생활보다는 일시적으로 여러 곳에 거주하거나 계절마다 옮겨다니며 반 정착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곡물저장기술의 발달로 마침내 한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1960년도에 시행된 한 실험을 통해 정착생활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고고학자는 선사시대에 살았떤 어느 가족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야생곡물을 수확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돌날칼을 사용해보았다.(현재 터키 일부지역에 가보면 아직도 야생상태로 자라는 곡물을 목격할 수 있다.) 이 곳에서 그는 1시간 동안 907그램의 곡물을 수확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수치상으로 환산해보면 선사시대의 가족이 3주동안 8시간만 일을 해도, 가족 모두가 1년동안 매일 453그램의 곡물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야생곡물이 자라나는 지역 근처에 거주함으로써, 가장 적절한 시간을 곡물 재배에 유용하게 활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많은 양의 곡물을 일시에 수확했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의 곡물을 소비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야만 했다. 그처럼 잉여곡물로 인하여 기원전 1만년경부터 지중해 동쪽 해안을 중심으로 최초의 영구 정착지가 세워졌다. 그 거주지는 나무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과 0.9미터 정도 파내려간 바닥으로 되어 있는 단순하고 둥근 오두막이었다.

 

 이러한 오두막에는 일반적으로 화로가 놓여있고 바닥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는데 그 크기는 약 3.5~ 4.5미터 정도였다. 마을 전체에는 50여개의 오두막이 있었으며, 약 200~300명 정도의 주민들이 하나의 지역사회를 형성했다. 마을사람들은 야생동물을 계속 사냥했지만, 그 지역에서 발견된 동물 뼈 등을 보아 선사시대 거주자들은 주로 도토리, 콩 그 외의 곡물 등 식물에 기초한 식단으로 영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곡물 경작보다는 야생상태를 그대로 수확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던 곡물은 독특한 두가지 특성이 발견되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 중 첫번째는 물에 담그면 바로 발아디어 단맛을 낸다는 점이었다.

 

 곡물을 완벽히 방수 처리하여 저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곡물의 특성은 인류가 처음 곡물을 저장하면서부터 자연히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발아된 곡물이 단맛을 내는 이유는 현재 누구나 이해하는 자연현상이 되었다. 물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곡물은 녹말 당화 효소를 만들어내며 그 곡물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녹말 성분은 맥아당이나 몰트로 바뀌게 된다. 이외에도 다른 몇가지 당 성분을 동시에 이용할 수 있었다면 '맥아성분이 된'곡물의 단맛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두번째 특성은 훨씬 더 중요했다. 수일간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곡물로 만든 경우에는 신비로운 변형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액체에는 약간의 거품이 생기고 마시는 사람들을 취하게 하여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데, 공기중에는 일어나는 천연효모의 작용으로 죽성분이 알코올로 발효된 것이다. 즉, 죽이 맥주로 변한 것이다.

 

 하지만 맥주는 인간이 마시게 된 최초의 알코올 형태는 아니었다. 맥주가 발견된 당시에도 과일즙을 발효시키다가 소량의 알코올이 함유된 액체를 우연히 얻게 되었으며, 꿀술을 만들기 위해 물과 꿀을 혼합하는 과정에서도 그와 비슷한 성분의 알코올이 자연적으로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일은 특정 계절에만 수확이 가능했으며 쉽게 부패되는 단점이 있었고, 야생 꿀의 경우에도 아주 제한된 양만을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보관할 수가없었다.

 

 기원전 6000년경이 되어서야 그러한 음료를 담아서 저장할 수 있는 그릇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류는 곡물로 음료를 풍부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저장이 가능했기에 필요할 때마다 맥주를 마음껏 생산할 수 있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맥주는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또는 동물의 위장으로 만든 자루. 속이 텅 빈 나무, 커다란 조개, 돌로 만든 그릇에서 양조되었다. 아마존 유역에서는 19세까지도 조개껍질이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핀란드의 전통맥주인 사티는 오늘날까지도 속이 텅 빈 나무속에서 만들어진다.

 

 일단 맥주가 중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행착오를 거쳐서 질적인 부분에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묽은 죽 형태에 맥아 곡물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으면 발효가 잘 이루어져서 맥주 맛이 더욱 더 강해지게 된다. 맥아성분이 많으면 당분을 더 많이 지니게 되고 발효가 더 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 많은 당분이 라코올로 변한다는 뜻이 된다. 묽은 죽을 완전하게 조리하는 것은 맥주 맛의 강도를 높이는 데 일조하게 된다.

 맥아로 발효되는과정에서 보리에 함유된 녹말 성분 15퍼센트 정도가 당분으로 변하지만, 맥아 성분이 된 보리를 물

 

과 혼합하여 끓이게 되면 고온에서 활동하게 되는 또 다른 녹말 전환 효소로 인해서 더 많은 녹말이 당분으로 변하게 되고 그러한 효모 성분이 작용하여 더 많은 당분이 알코올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맥주를 만들면서 반복적으로 동일한 용기를 사용하면 보다 믿을 수 있는 결과물을 얻을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역사기록에서 그러한 사람들이 항상 '엿기름 물을 담은 통'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전하고 있으며, 어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에서는 '맥주 맛을 더욱 좋게 만들어주는 용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동일한 통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효모 성분이 용기의 틈새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발효작용이 촉진되었다. 그래서 변하기 쉬운 거친 효모에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장과류, 꿀, 향신료, 허브 그리고 다른 감미료 등을 묽은 죽에 추가함으로써 다양한 방법으로 맥주의 맛을 바꿀 수 있었다. 이후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다양한 강도와 맛을 내는 맥주제조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집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최소 17종의 맥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아름답고 훌륭한', '천상에 내린 맛', '기쁨을 전달하는', '식사시간에 빼놓을 수 없는 친구',또는 '맛이 풍부한'이나 '들끓게 하는 '등과 같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관고 슬로건처럼 들릴 정도로 시적 용어로 느껴진다. 종교의식에 사용되었던 맥주 또한 특별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들어진 맥주에 대한 초기 참고문헌에는 서로 다른 20여가지의 맥주 이름이 소개되어 잇는데, 그 대표적인 이름은 생맥주, 흑맥주, 생흑맥주, 알코올 성분이 강한 맥주, 적갈색 맥주, 라이트 맥주, 그리고 압착 맥주 등이었다.

 

 적은 양의 곡물성분을 함유하고 있던 압착 맥주가 비교적 순한 맛인데 반해서, 적갈색 맥주는 여분의 몰트를 추가로 사용해서 만든 흑맥주였따.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맥주빵'이라고도 부르는 맥주 양조용 빵인 바피르를 다른 양만큼 사용하여 또한 맥주의 맛과 색상을 조절할 수 있었따. 바피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발아된 보리를 작은 빵덩어리 형태로 빚은 다음, 검은 갈색빛이 돌 때까지 불에 두 번 구워서 바삭거리는 빵으로 만든다. 그러면 이러한 바피르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 양조통에 넣을 때까지 수년 동안 저장이 가능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바피르는 지배층의 저장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식량이 부족할 시에만 꺼내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하나의 먹을거리였다기 보다는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원재료를 저장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이었다고 볼 수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양조 과정에서 빵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두 고고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들중 몇몇학자는 그 빵이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파생물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학자들은 일차적으로는 먹는 빵으로 사용되었다가 결과적으로 맥주를 만드는 성분으로서 이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빵과 맥주는 모두 묽은 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걸쭉한 죽을 평평한 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햇볕에 쪼이거나 뜨거운 돌에 펼쳐서 구울 수 있엇따. 그리고 묽은 죽은 효소로 발효시켜서 맥주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 두가지는 동일한 동전의 서로 다른 면이엇던 것이다. 빵은 단단한 고체 형태의 맥주엿으며 맥주는 액체로 된 빵이었다.

                                                톨스텐디지 '역사한잔할까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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