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비상사태입니다.
내일 소고기 장관고시게재 강행한답니다.
이명박이 사실상 통치력을 상실하니
이제는 한나라당이 앞장서서 관보게재하겠답니다.
일단 게재하면 돌이킬수 없습니다.
노무현당시 통관중지되어 냉동보관되어있던 2만톤이 바로 풀립니다.
운송노조가 하역거부할서도없이 곧바로 내일부터 전국에 미국소가 풀리는것입니다
그럼..롯데식품이 계약하고 있는 단체급식부터 들어가겠죠
학교,군대,요양원,경찰,교도소,병원,회사,라면스프,쵸코파이마쉬멜로우,...
600여개품목에 광범위하게 퍼지겠죠
말이 2만톤이지 서울시민1천만명이 열흘동안 푸짐하게 먹을수있는 양입니다.
단체급식만으로도 한달이상 먹을 량이지요
비상사태입니다.
한나라당이 국민과 한판해보자는 겁니다.
해볼라면 해보라 이거지요
국민여러분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우리국민은 이미 역사적으로 두번이나 독재정권을 이겼씁니다
1960년 4월19일 서울 봉기
1960년419학생혁명으로
10만시위대가 경무대로 찾아가 총칼든 이승만 독재정권을 하야시켰습니다.
1987년 6월항쟁당시 고 이한열 열사 장례식
1987년 6월항쟁으로 100만 시위대는
전두환 노태우군사정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씁니다.
2008년 이명박하야를 위한 촛불대행진
2008년 현재 촛불은 전국민 80%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이제 대통령하야만으로는 해결할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통령하야와 더불어 국회해산을 요구하여야 합니다
이명박정부가 하야한후 국회해산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30일내에 총선재실시하여야합니다.
국가비상사태입니다
민족의 운명이 기로에 서 있습니다.
광우병 프리온은 전세계가 감추어 오고 있습니다.
조사해보신분들은 알겠지만
10년전 국내수입된 미국소와 영국사료때문에 국내에도
100여명이상의 광우병 사망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저희집도 한우를 키우고 있고 저도 한때 대규모 농장을 해보려고 조사해본적이 있어 잘알고 있씁니다.
광우병 보통 심각한게 아닙니다.
영국만,미국만 감춘게 아닙니다.
서울대 우희종교수님과 노벨상수상자인 프루시너교수님이 경고하신것을 찾아 보십시요
21세기 신종흑사병에 준하는 무서운 전염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한나라당은 국민생명을 걸고 도박을 펼치려고 합니다.
그들의 정권욕과 알수없는 비밀스런 이익때문에 국민을 도축되는 소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고 있씁니다.
600년 동안 단한번도 소실된적없던 국보1호 숭례문이 단 6시간만에 불타버렸습니다.
초기진화시에 30키로짜리 머리기왓장을 들어내고 물을 뿌려야 하는데 우왕좌왕하다가
다 타버렸습니다.숭례문은 이명박이 서울시장시절 무책임하게 개방하여 불탄것입니다.
이제 이대로 가면 FTA졸속개방으로 온나라경제가 불탈것입니다.
이대로는 아니 됩니다.
전국민은 419혁명과 같은 봉기로 일어나야 합니다.
헌법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정당은 대의민주제에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어찌 머슴이 주인을 팔아먹는단 말입니까
국가 비상사태입니다.
광우병 ,운하,민영화,5년내내 데모할수 없습니다.
가면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언론조작및 선동세뇌는 21세기에 북한이라는 기형국가를 유지할수 있을만큼 위력적입니다.
조중동과 정부의 거짓말에 세뇌되는 국민은 갈수록 늘어갈것입니다.
거기에 이권이 걸린 세력들도 점차 늘어가면서 힘들어질것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습니다.
국민의 정당한 권력을 행사합시다.
오늘 오후3시부터 3호선 경복궁역에서 끝장 시위합니다.
이명박이 하야하던가 국민이 죽던가 둘중 하나입니다.
2008년 6월 25일 청와대로 행진하는 제49차 촛불집회
오늘 내일 함께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28일 전국민시위에 동참하여 주십시요
저들은 20%도 되지 않습니다.
인터넷알바들의 글에 흔들리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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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베스트에 들어갔군요..
48년전 우리국민이 이승만독재정권을 어떻게 하야시//키고
총선을 다시 실시했는지 살펴주시길 소망하며
제가 아고라에 올렸던 글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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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1960년 2월28일 대구

1960년 2월 28일 거리로 진출하는 대구 고등학생들
이승만 독재정부의 부정부패에 참다못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1960년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봉기
교복이 군복을 이기는 시작이었습니다.
이때도 학생회간부들은 우왕좌왕 갈피를 못잡고
거리진출에 소극적이었으나
일반 학생들이 이들을 나무라며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고
다그쳐서 일어난 시위였습니다.

1960년 2월28일 대구 고교생 봉기
1960년 3월 15일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 했던
마산 상고 1학년 김주열 군이 시위 도중 실종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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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가 되어 떠 오릅니다.

경찰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사체에 돌을 달아 바다에 던진 것이 떠 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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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시민3만여명이
시청과 경찰서등을 습격하여 파괴하였고
시위대는 갈수록 증가하여 15만명에 이르렀고
부정선거규탄시위는 이승만 하야운동으로 발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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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도 이승만은 시위대의 배후에는
공산당이 있다고 공갈을 쳤씁니다.
하는짓이 딱 이명박입니다.

광화문으로 향하는 고교생들과 의대생들

당시 시위주도세력은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4월18일 고려대생 3천여명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갔다가 오후7시경
반공청년단과 조직깡패100여명에게 습격당합니다.
4월19일 이사건이 보도되자
대학생과 고등학생,여중생들까지 봉기합니다.

시위대가 약 10만에 이르자
경찰의 발포로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합니다.
이를 보고 흥분한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순식간에 20만명을 넘게되고
오후3시 서울,부산,대구,광주등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됩니다.
오늘날 이명박처럼 이승만은
거짓말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합니다.
자신은 315부정선거를 전혀 몰랐다며
한나라당의 전신인 자유당 당무위원과 국무위원들의 사표로
사태를 무마하려고 합니다.
지금 한나라당이 고시강행으로 국민을 배반하는것처럼
이때 자유당도
시위대의 투석,경찰구타,파출소습격,청사 파괴등을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발포하였다고 하면서 국민을 자극합니다.
더불어 이승만은 이번시위가 장면부통령과 천주교 노기남주교의 공작이라며
국민의 뜻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1960년의 상황과 2008년의 지금상황이 어쩌면 이리도 닮아있는지 한 번 봐 주십시요

뉴라이트등 보수단체들이 촛불시위대를 가격하기위해 가져온 무기들
이것이 2008년 한국이라니 기가 막힙니다.

폭력을 비호하고 동참하는 경찰..

소유건물에 성매매업소를 운영하는 대통령이명박을 빼어닮아
자기동생이 매머드급(호텔전세) 불법성매매업소를 운영하는 어청수경찰청장

국보위에 참여하여 민주항쟁을 좌파용공세력이라고 매도하였고,
매국매판로펌 김앤장의 고문이었으며,
이명박의 친형이상득이 운영하는 코오롱워터스로 상수도민영화를 넘겨줄 한승수 국무총리

1997년한승수가 경제장관을 할때 경제차관을 했던 현 기획재정부장관 강만수(가운데)
그는 김영삼정부시절 외환위기를 방치하여 IMF를 불러온 공적이며,
2008년 달러약세가 지속됨으로 유가급등이 상쇄됨에도 불구하고
1997년과는 반대로 외환에 적극개입하여 원화가치평가절하에 올인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현대삼성LG,SK등 재벌기업은 환차익으로 떼돈을 벌었으나
그 부담을 고스란히 서민들이 지게 되었으며,단군이래 최대규모의 단기차입금 유입으로
2008년5월 모건스탠리로부터 국가부도사태를 경고받게 했음
(사진 좌는 강재섭한나라당대표,우측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이자도 이명박의 대국민사기에 앞장선 주적임,
민간 품마크효과도 못되는QSA를 가지고 EV처럼 공갈침)
이승만의 비상계엄령으로
서울시위가 수그러든것처럼 보였으나
4월25일에는 대학교수 300여 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며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했고,
시위는 다시 격렬해졌습니다

4월26일 10만명의 서울시위대가 다시 봉기하였고
이들중 계엄군의 총탄에 어린 학생들이 사망하자
부모형제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 말라면서
초등학생들까지 봉기합니다.

시위에 나선 419당시의 수송국민학교 학생들
<당시 서울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의 글>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고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여중2학년생이던 진양숙열사도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미아리고개에서 군경의 총탄에 산화하였는데
당시 집을 나가기 전
집을 비운 부모님께 남긴 유서가 발견되어 훗날
전국민의 눈물을 흐르게 하였습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 .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했습니다."

4월26일에는 시위대 10만이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진격하고
오전 10시30분 하야성명을 받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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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밤 온갖 부정부패로 축재를 하고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민주국민을 탄압하던
이기붕일가는
경무대 관사에서 자신의 친아들이자 이승만의 양자인
이강석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4월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합니다.
향수병에 걸렸는지,곡국의 재산이 탐났는지 그는
1962년 3월16일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사죄성명까지 발표하였으나
1965년 7월19일 91세로 사망합니다.
당시 이승만과 이기붕의 재산은
천문학적인 규모였다고 합니다.
마치 지금의 이명박과 그의 내각들처럼....

518묘소를 참배하면서 상석을 밟는것도 모자라
박장대소하고 있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이명박은 밝혀진 일가의 재산만 230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태까지 드러난 비리규모만 해도 1조원대가 넘으니..
이승만보다 결코 못할게 없지요
미국무기 22조 리베이트가 얼마나 되길래
믿힌소를 수입하려하는것입니까?

1960년 4월19일부터 26일까지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산화하신 열사는
총 사망186명 부상6259명이셨씁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서슬퍼른 계엄군도
두번이나 이긴 우리민족입니다.
1987년 6월항쟁당시 고 이한열 열사 장례식
1960년 419는 516으로 도둑맞고
1979년 하늘이 준 1026은 1212로 강도당하고

1987 년 6월항쟁

1987년 6월 항쟁은 629선언에 속고
2008년엔 친일파 매국노들에게 또 속을작정이십니까?

일제의 독립군처형장면

일제의 독립군 머리전시
광화문에는 이순신장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께서는 일찌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자는 살것이고
살기를 바라는 자는 죽을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한 일념으로 풍찬노숙하던 대한독립군 전사들

오늘 3호선 경복궁역에 집중되는
국민 총궐기에 참여하시는 21세기 대한독립군 전사여러분
무사히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내일아침 9시 관보게재못하게
아예점거해버릴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방도 많은 분들이 상경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일신상의 사유로 동참하지 못하고 있으나
할수있는 모든 조치로 성원하고 있는 수많은 국민들이 있음을 알아 주십시요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산화하신 선배님들께 눈물로 감사드립니다.

(44회 4·19혁명 기념일을 하루 앞둔 18일 서울 수유리 4·19묘역을 찾은 조호순씨가
고려대 학생으로 시위에 참가했던 남편 김호성씨의 묘비를 잡고 흐느끼고 있다.)
김문석기자 경향: 2004년 04월 18일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여러분 사랑합니다
101느티나무집님의 다른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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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국회해산하면 안된다고 하시는 분들을 위해
야후지식을 보여드릴테니 더 검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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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 해산권은 자율과 타율로 구분되는데요
귀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보니 타율에 의한 해산을 말씀하시는군요
의회 해산권은 3권분립의 원칙에 의하여
입법부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입니다.
통상 국가원수가 아닌 행정부수반이 행사하게 됩니다.(프랑스 제외)
왜냐하면 3권분립은 국가원수 입법 사법이 아니라
행정 입법 사법이니까요..
따라서 일본과 영국과 같은 경우 행정부수반인
수상(또는 총리)가 의회 해산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 5공화국(전두환정부)
시절까지 국회 해산권을 명시하고 있었으며
이게 행사된적은 419혁명이후 국회의 의결에 의해 자율해산을
한바 있고 516쿠데타 이후 강제 해산된 적이 있으며
1972년 유신이 실시되면서 강제 해산된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980년 전두환정부가 들어서면서
강제 해산되게 됩니다.(이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부칙조항에 이 헌법의 발효와 동시에 현 국회의원의 임기는
종료된다라고 되어 있기때문입니다.)
이후 1987년 9차개헌때 국회해산권을 없에게 됩니다.
대통령제 하에서는 통상적으로 국회해산권이
없습니다.(우리나라, 미국등)그러나 러시아처럼
예외도있지요
프랑스 처럼 이원집정부제인 경우 대통령이
의회해산권을 행사합니다.
프랑스는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행정부수반은 아닙니다.
행정부수반은 다수당의 당수가 총리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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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왜 청와대로 가야 승리하는지
중앙대 촛불아가씨가 올린 한호석님의 글을 아래로 덧붙입니다.
이글을 읽으시면 촛불의 행동과 방향을 분명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시위에 참가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이 정보를 꼭 드시고 완전히 소화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우리가 막연하게 알고 있는것을 구체적으로 풀어준 드문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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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702646
40일 저항운동’은 무엇을 남겼는가? <연재> 한호석의 진보담론 (15)
도덕적 승리와 허약한 정치공세
2008년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40일 동안
이 나라의 광장과 거리에서,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서 일어난 대사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토론이 분분하다.
그러한 토론들 가운데서 돋보이는 것은,
분노의 광장, 저항의 거리, 소통의 인터넷에
수십만 명이 운집한 대사변을
국민대중의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으로 한정하여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물론 이론적 해명에서 일차적으로 중시하는 것은,
이 땅의 국민대중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운집하여 항의를 표명하였고
인터넷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였다는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시해야 할 것은
항의표명과 의사소통에서 출발하여
저항운동으로 나아간 역동적인 발전과정이다.
이 글에서는 대사변을 ‘40일 저항운동’이라 부른다.
‘40일 저항운동’이 남긴 성과들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운동이 거둔 도덕적 승리(moral victory)이다.
도덕적 승리란 시위군중이
경찰의 야만적인 강제진압과 강제해산에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도덕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뜻한다.
아닌게 아니라, 국민대중이 밝힌 촛불은 저항운동 첫날부터
도덕적 승리의 상징으로 등장하여
광장과 거리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40일 저항운동’은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귀를 막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차츰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
‘40일 저항운동’이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사실은,
군중이 외친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거대한 함성에서 입증되었다.
이 중요한 변화는 ‘40일 저항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하였음을 말해준다.
‘40일 저항운동’은 반정부운동의 전략목표를 제기함으로써
1960년 4.19 혁명과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도달한
반정부운동의 최고발전단계인
정권퇴진투쟁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양대전략은
협상전략과 투쟁전략이다.
협상전략과 투쟁전략 이외에 다른 전략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상과 투쟁은
국민대중과 집권세력의 대립관계를 풀어내는 기본전략이다.
그렇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중과
그것의 수입을 강행하려는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서
협상이 가능하였을까?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
그와 국민대중 사이에서는
어떤 형태의 협상도 불가능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국민대중의 항의표명에 등돌리고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소통거부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의 정치적 의미이다.
소통거부행위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를 증폭시킴으로써
결국 대통령이 스스로를 정치곤경에 빠뜨리는 자해행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자해를 바라보는 국민대중의 환멸과 분노가
집단행동으로 번져갈 때,
‘40일 저항운동’은 청와대를 겨눈 정치압박공세를 개시할 수 있었다.
정치압박공세란,
국민대중과 소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자해하는 대통령을
협상요구전술로 압박해들어가는 것이다.
만일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협상대표단을 구성하여
대통령에게 직접협상을 요구하였더라면,
협상을 거부하는 그에게 사퇴압박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사퇴압박공세는 ‘40일 저항운동’에 기폭효과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40일 저항운동’에서 직접협상요구전술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가 열심히 활동하였지만,
그 회의체는 전술적 판단을 담당할만큼 탄탄하게 조직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 동안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매우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분노와 저항을 고조시켰으나,
그 거대한 동력을 집적하고 분출하는 위력적인 전술은 없었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은
광장과 거리, 그리고 인터넷 공간에 넘치는
대중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였을 뿐이다.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을 때
직접협상요구전술을 이용하여 대통령에게 사퇴압박을 가하지 못한 것,
그것은 ‘40일 저항운동’이 도덕적 승리를 거두었으면서도
정치공세에서는 허약해진 원인으로 되었다.
역사적 경험에서 길어올린 진리
‘40일 저항운동’이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틈에,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1960년 4.19 혁명에서 전개된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다.
‘40일 저항운동’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반정부운동으로 발전하였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군부독재연장을 반대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1960년 4.19 혁명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출발하여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6월 민주항쟁과 4.19 혁명이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 좌절하였다는 점이다.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6월 민주항쟁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이었고,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된 4.19 혁명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였다.
정권퇴진투쟁과 정권교체과정이 복잡하게 뒤엉킨
그 시기의 역사적 경험을 직선화하면 아래와 같다.
6월 민주항쟁은 6.29 선언 발표→대통령 직선제 개헌→보수야당 분열→대선 실시→군부독재연장으로 이어졌고,
4.19 혁명은 국회의 대통령 하야 촉구 결의→과도정부 수립→내각책임제 개헌→총선 실시→보수야당 집권으로 이어졌다.
위의 역사적 경험에서 관심을 두어야 할 대목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퇴한 직후에
보수야당이 집권한 과정이다.
그 정권교체과정을 살펴보면 이렇다.
1960년 4월 26일 국회 부의장(당시) 이재학의 사회로 진행된 국회 회의는
‘이승만 즉시 하야 촉구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그 결의안이 통과되자마자,
이재학은 중진의원들 가운데
민주당 의원 7명, 자유당 의원 6명, 무소속 4명을 급히 불러모았다.
이재학까지 포함해서 18명의 국회의원은,
외무장관(당시) 허정을 수반으로 하여 과도정부를 내오기로 결정하였다.
과도정부수립문제를 국회의원 18명이 서둘러 결정한 것은,
무정부상태에 빠진 정국이
이재학의 정치선동에 좌우되어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정권교체시기에 전면에 나서서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했던 이재학은,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에 소속되어 3.15 부정선거를 자행할 당시에
자유당 선거기획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검찰이 선거사범을 구속하기 시작하자
이재학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5월 26일에 구속, 수감되었다.
4.19 혁명의 공격대상인 자유당이 파멸직전에 과도정부수립문제를 좌우한 것은,
그 혁명이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국회운영위원회는 여야의원 9명이 참가하는
‘국회 내각책임제 개헌안 기초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의결하였다.
민주당 의원 4명, 자유당 의원 4명, 무소속 1명으로 구성된 개헌안 기초위원회는
1960년 5월 11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국회는 6월 15일 개헌안을 의결하였고,
허정 과도정부는 새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어서 7월 29일에는 새 헌법에 의거하여 총선을 실시하였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이러한 정권교체경험에서 돋보이는 것은,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그 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이미 해체과정에 들어간 집권여당이
보수야당과 야합하여 정권퇴진투쟁의 결과를 고스란히 가로채고 만다는 점이다.
국민대중의 반정부운동이 정권퇴진투쟁으로 발전하였어도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하면,
4.19 혁명 당시나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오늘이나 마찬가지로
국민대중의 정치적 승리는 기대할 수 없다.
반정부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란,
진보정치세력이 쓰는 전문용어를 빌리면, 전선체이다.
오늘 진보정치세력이 무력하여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각계각층 대중이 반정부운동에 나섰어도 전선체를 결성하지 못하였다.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정치적 대표체를 구성하지 못한 근본원인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력에 있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국민대중은
시민자유발언, 길거리토론, 인터넷 댓글달기를 통하여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하였다.
진보정치세력 일각에서는
국민대중이 보여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집단행동을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 실현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고 항의를 표명한다고 해서,
그러한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과대평가이다.
국민대중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가는 하나의 방도이다.
또한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와 대비하면서,
앞의 것을 선진적 집회방식으로,
뒤의 것을 후진적 집회방식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다.
진보정치세력의 체계적인 정치집회에는
의식화되고 조직화된 군중이 참가하기 때문에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 같은 의견수렴절차가 생략되는 것이지,
체계적인 정치집회가
참가군중의 자율성을 제약하는 후진적 집회방식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지적해야 할 것은
국민대중의 자율적인 군중집회에서 드러나는 한계이다.
자율적인 군중집회는
비체계적인 의견수렴절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집단적 항의표명에서 멈추고
집단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인터넷 댓글달기는
인터넷이 국민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의사소통방식이지만,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은
이번에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한 현상’이 아니라
전통적인 군중집회방식이다.
이를테면 1898년 3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만민공동회가
각계각층 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끄는 군중집회의 효시였다.
만민공동회는 같은 해 12월 25일
조선왕조 봉건정부가 탄압하여 강제해산되었지만,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에 이르는 1만 명 대군중이 종로에 운집하였고,
42일 동안이나 철야시위를 진행하는 치열함도 있었다.
시민자유발언과 길거리토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던 지난 시기에는
국민대중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군중집회를 열 수 없었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
대중통신수단인 인터넷과 손전화기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식 군중집회를 열 수 있었다.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은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오직 그러할 때 자율통치기구에 의해서,
자율통치기구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국민대중이 자율통치기구를 세울 때,
정당정치(party politics)와 의회정치(parliamentary politics)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가 폐기되고,
평의회정치(council poltics)에 의거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
평의회정치의 역사적 유형은
1871년 파리꼬뮌(Paris Commune),
1917년 사회주의10월혁명 시기의 쏘비엣(Soviet),
1936년 스페인내전 시기의 반파시스트 민병대위원회(Anti-fascist Militia Committee),
1970-1973년 칠레 아옌데 정권 시기의 산업지구대(Cordones industriales) 등이 있다.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에 의존하는 대의민주주의가
난해한 정치공정을 거쳐서 실현되는 것처럼,
평의회정치에 의거하는 직접민주주의도 그러하다.
더구나 대의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급진적인 정권교체과정은 더 말할 나위 없이 난해하고 어렵다.
이 땅의 진보정치세력이
‘40일 저항운동’ 기간에 이루어진
국민대중의 의사소통과 항의표명을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으로 과대평가한 것은,
국민대중이 낡은 지배권력기구를 해체하고
새로운 자율통치기구를 세우기까지 전개되는 발전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를 알지 못한 정보제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부분 중요하다 봅니다.원시시대에 도끼를 들고 사냥을 하며 생존했다면
지금은 정보화시대!정보를 능동적으로 사냥해야만 생존할수있다 봅니다.
따라서 시위대중도 끊임없이 정보사냥을 거듭해야함을 알수 있습니다.-옮긴이 정현호)
승리하지 못한 두 가지 전술
국민대중과 대통령 사이에서 어떠한 형태의 협상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은,
국민대중에게 투쟁을 선택할 가능성만 남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40일 저항운동’ 기간 내내 국민대중이
분노의 광장과 저항의 거리에 운집하였건만,
정작 있었어야 할 정치투쟁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40일 저항운동’이 곧 정치투쟁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군중이 ‘이명박은 물러가라’고 외친 것은
정치행동이지 정치투쟁은 아직 아니다.
물론 넓은 의미의 정치행동에 정치투쟁도 포함되지만,
대통령에게 항의를 표명하는 정치행동을 넘어서,
저항의사를 전략과 전술을 통하여 관철하는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정치행동을 정치투쟁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반정부운동이 투쟁전략에 집중하면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전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40일 저항운동’은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밖에 알지 못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21년만에 가장 많은 군중이 참가한 것은 광장운집전술의 승리였고,
진압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방패를 휘두를 때
평화적 시위로 대응한 것은 비폭력대응전술의 승리였다.
그러나 현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광장운집전술과 비폭력대응전술로는
도덕적 승리를 거둘 수는 있어도 정치적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그 까닭은, 그 두 가지 전술이
‘준법질서의 허용범위’라는 결정적인 제약에 묶여있는
‘성숙한 시위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정부운동의 목적이
국민대중의 집단적 항의표명에 한정된다면,
그 두 가지 전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퇴진이라는 전략목표를 제기한 반정부운동이
그 두 가지 전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전술문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반정부운동의 투쟁전략이 그 두 가지 전술에 국한될 때,
그 운동이 노리는 정치압박효과는 극도로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