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책을 읽다가 씩 미소를 짓는 사람, 피곤한 일상에 젖어 있어 내내 고개를 떨구는 사람,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주름진 손으로 신문지를 주워 담고 계신 사람,
그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친구들이라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을 기약하지 않은 채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손을 맞잡고 있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날 내 볼을 스치고 간 바람을 잊지 못합니다-
아이스 민트 목캔디 Episode 7 [목소리]
"목소리 좋아요"
"내가 목소리가 좋아요? 그런 얘기 처음 듣는데.."
"목소리가 은색같은 거, 알고 있는지-"
"재밌는 분이네요. 목소리에도 색깔이 있나요?"
유난히 목소리에 대한 강한 집착 혹은 이상한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어디를 먼저
보냐는 그 흔한 질문에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사람 목소리에는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들어있어요.난 목소리 좋은 사람이 좋아요"
"자기가 좋아한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목소리가 다 좋아보이지 않나 그럼?"
"아뇨..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목소리가 좋으면 다만 얄미울 뿐이지."
목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은색빛이 나는 그 목소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마치
녹차 안에 내 몸을 담아 두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였습니다.
"내 목소리가 좋다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예요."
"내가 처음이구나,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요.왜냐하면.."
"왜냐하면?"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어버린 게 우리의 평범한 모습이니깐."
"하..?"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칭찬은 내게 예쁘다는 말도, 똑똑하다는 말도, 부자라는 말도,
무지 건강하다는 말도 아닌, 아주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당신 목소리도 참 듣기 좋아요.. "
마음이 벅차 올랐습니다. 마음속으로 내내 누군가가 나의 목소리를 듣고서 웃어주며
그런 말을 해 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찰나에 그 한마디가 내 귓속에서 24시간 아니
240년 동안 맴돌듯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날 불어온 바람은 내 볼에 어찌나 시원하게 느껴지던지, 흘리던 기쁨의 눈물 조차
날 수줍게 만들어 주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수줍고 설레며 마냥 즐겁고 따뜻한 은색빛의 목소리는 조금씩 그 음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냥 플러스 단어로만 가득할 것 같은 문장은 조금씩 그 숫자가 줄어 들어 마이너스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떄가 찾아온 것이었죠.
"날 못 믿는 것인가요"
"못 믿게 만들어 주어서 미안해요"
"미안하단 말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안 남았나요"
"지치고 힘든 날들의 연속이면 어떡해요"
당신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독소가 혀를 타고 내려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까지, 꾹 눌러 참아왔으나, 그것이 당신을 감당하지 못하여 터져 나왔을 때 조차
마음속으로 진심이 그 독소를 이기기를 어쩌면 서로가 간절히 바랐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 예뻤어요 오늘..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
"잘 가요"
왜 그 때 나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이제서야 해 보지만,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이미, 나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 울부짖는 울음 소리와
비참하게 짝이 없는 미움의 말들과, 온 에너지를 애써 웃음 지으려 한 나의 미소에
모든 것을 쏟아버렸기에, 차마 진실된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후, 주위에서 많이 차분해졌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게 된 시간 이후,
그것 조차 어떤 이의 목소리를 더이상 듣게 되지 못한 이후에 내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소중하고, 때론 가슴 시린 선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같은 여름밤이면, 나는 이따금씩 창가로 다가가 외등으로 뿌연 바깥을 바라보았습니다.
함께 걸어왔던 언덕이 저 멀리 가로수 등불에 비추어져 내 눈에 아련히 들어옵니다.
마치 그것은 겨울이 휩쓸고 지나가 버린 듯 그렇게 황량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황량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이로 나의 스물 다섯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과 나의 행복과 그토록 원했던 것들이 손끝에서 만져진다 생각했던 순간,
손끝에 자리잡기를 원했던 나의 행동과 나의 목소리는, 누군가에겐 지겨워지기 시작한
구속과, 끝이 없는 답답함과 슬픔으로 자리매겨져 있었나 봅니다.. 가슴이 아파옵니다.
내 손안에서 사라져 갔던 그 기억들은 지금 이렇게 세상에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나의 손과, 예쁜 글씨로 조금씩 퍼져 나가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입니다.
"그와 내가, 우리들이, 모든 것이, 마치 태어나고 죽는 그 모든 것이 그렇듯,
예기치 않았지만 어느순간 조용히 예기하고 있었듯한, 그 모든 것이 그저 어쩌면 당연하지만
당연하고 싶지 않은, 그저 운명이라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어요."
마음속으로 다시 익숙한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피아노 소리보다도 훨씬 나의 마음을 그립게 만드는 소리입니다.
마치 무수한 빗방울 소리 같기도 한,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던 바스락 거리는 소리 같은,
나의 귀를 스치던 소리 같기도 한 선율입니다-
나는 책꽂이로 다가서서 시디 케이스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일 지 모르는 내가 들려줄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서 나의 손가락에 나의 목소리를 담아내어 어렵게 보냈습니다..
단 한번도 들려주지 못했던, 단 한번도 함께 듣지 못했던, 나의 그 피아노 소리 덕분에
힘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니 기억해 주기를 사실 바랍니다.
피아노 소리가 내 방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서 무엇인가가 내 안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의 주머니에서 펑 하고 무언가가 터져 나왔습니다.
내 자발적인 의지는 아니었지만 내 뜻이 아닌 것도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마음속으로 반은 타의에 의해, 반은 자의에 의해 온 힘을 다해 말했습니다.
"이제 울지마.. 너를 놓아 줄게.."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인연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고. 시간이 지나면 가벼울 거라며.
난 그대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다만 고개를 숙이며 어느 목소리를 깨쳐 버리려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나의 마음의 주머니에서 나온 그가 나를 물끄러미 아무런 표정 없이 쳐다 보고 있는 듯 하자
갑자기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눈에는 아직 다 마르지 못한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아..."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습니다. 차마 내 입으로 발음할 수 없었던 이름
사랑을 믿었던 그 날들에 그가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부끄러워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애써 잊으려 안간힘을 쓰지 말라고도
전해 주세요. 왜냐하면 네 가슴은 몹시 벅차올라 마지막에는 감당할 수 없는 검은빛으로
네 마음을 온통 번지게 만들어 결국은 이렇게 되었지만, 그렇지만 내 대신 전해줄래요..
"당신의 마음은 나로 인해서, 나의 마음은 당신으로 인해서 사랑받았으며
사랑했던 나날들의 꽃과 별과 바람이 가득할 테니까.
쓸쓸한 생은 많은 사람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을 허용하지 않는데,
너는 한때 그걸 가졌었어.. 그걸 기억해주렴.
그건 사실 나의 모든 것을 가진 찰나의 순간이었으니-
세월이라는 것이 꼭 좋은 것인지 아직은 잘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래도록
누군가를, 어떤 꿈을, 그리워 한다는 만큼 순수한 감정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고
신기하게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목소리가 바람을 스치고 지나 옵니다.
그 날도 스쳐 지나 옵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 어떤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당신의 꿈은 뭐예요?"
"그런 말 물어봐 주는거 처음인데.."
"고맙습니다 처음을 선물해 주어서"
"잊을 수 없는 하루네요"
"나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는 오늘 내 눈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목소리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어느 날, 지하철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눈물을
만들어 준 그 고마우면서도 나를 한없이 꾹 눌러 주었던 메시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