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_ 메시아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무덤]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기에, 유대인들은 죽어서도 그들의 메시아가 온다는 감람산에 묻히기를 소원한다. 그때의 부활을 소망하며 한 장의 돌을 무덤 위에 덮는다. 감람산을 뒤덮은 이 무덤의 주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하고 죽었다. 영혼 없는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살아생전 가졌던 그들의 헛된 소망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에 합당하기까지 자기 의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소망이, 여기 묻힌 사람들이 가졌던 부활의 소망과 같지 않은가. 저기, 장례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월간 기쁜소식 표지 이야기 중에서...)
요한복음 5장 24절 이하에 보면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두 때에 관한 말씀을 읽어 볼 수 있다. 먼저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때이고, 두 번째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는 때이다.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만, 어느 때에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때가 온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곧 이 때라고 하신 것이다. '이 때'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살아나리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때’라고 말씀하신 것은 육체의 호흡이 끝난 상태의 죽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아담 한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잃고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그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 잃어 버렸던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 되는데 성경은 이것을 보고 ‘거듭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지만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은 자에게만 들린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당시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었지만 그들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음성을 듣긴 들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을 등지고 배척한 사람들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스스로 자부했던 많은 유대인들과 율법사,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길 원했다. 분명히 그들도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간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자기가 살아 있는 자였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구원을 얻었던 사람들에게 한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그들 자신에게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전부 끝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죄와 사망을 이기려고 발버둥치고 싸워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죄와 사망이 끄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구원의 얻었다. 간음 중에 잡한 여자가 그러했고, 38년 된 병자가 그러했으며 물동이를 이고 가던 사마리아 여자가 그러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한 편의 강도 역시 자신이 행한 것은 죄밖에 없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죽은 자였다. 자신에 대한 소망과 기대할 것이 끝이 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이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가복음 10장의 한 율법사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앞에 자신의 행위를 들고 나와 영생을 얻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니라 선생님에 불과했다. 그들에게는 은혜로 값없이 영생을 주시려는 아들의 음성이 마음에 들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자기가 원하는 음성을 듣고자 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인간이 선을 행한 그 값을 따라 받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값없이’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은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다. 밤만 되면 온 동네마다 붉은 십자가가 우뚝우뚝 서있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끼고 주일만 되면 예수님을 찾지만 그렇다고 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아담의 후손들이지만, 마음 안에 자신에게 대한 기대와 소망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가 선하게 되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우리가 선하게 살고 열심히 주를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봉사합시다!’ 하는 목사들의 음성은 들릴지 몰라도 값없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들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하나같이 자신의 행위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듣는 때인데, 삶이 모두 끝난 육제의 죽음을 가리킨다. 이 때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진다. 그러나 이 음성은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인과 죄인에 대한 심판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살았을 때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들은 이 때에 영원한 멸망인 불못으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 메시야의 음성을 듣기 위해 무덤 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영원한 헛됨으로 끝날 것이다.
어느 때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가? 만약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이 때’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면 나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와 소망이 끝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익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의 긍휼 앞에 나아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