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Good Samaritan
착한 사마리아 사람
어떤 율법학자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대답대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율법학자가 대답하였습니다. “‘네 모든 마음과 모든 목숨과 모든 힘과 모든 뜻을 다해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이것을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이 율법학자는 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님께 다시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그때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해주신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행객이 강도를 만났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so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그러면 누가 제 이웃입니까?” 그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이웃이란 가까이 살면서 서로 교통이 있으며, 서로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가지는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정의는 이 교활한 율법학자가 오늘 물어본 질문_"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 10:29)에 이웃에 대한 대답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기 직전에 있었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로 그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눅 10:30-35).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모두 지나쳤지만 그곳을 지나던 한 나그네(사마리아인)는 그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맨 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일까지 배려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배는 불리우면서 이웃의 아픔에 관심이 없는 성전의 우두머리 제사장이야 그렇다치고 왜 하필 레위인이었을까? 이웃에 대한 구약의 교훈은 레위기 19:18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아는 것 많은 율법학자에게 레위인을 상징으로 놓았을 것입니다. 구약 레위기에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그는 밥먹듯이 이야기했을 터이니까요.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너는 이 세 사람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대신, 자비를 베푼이 이이다,고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은 고대 이스라엘의 멸망한 아시리아인등 이민족과 이스라엘인(유대민족)의 혼혈로 인해 이민족시되었던 민족집단을 일컫습니다. 사마리아는 당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으나,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한후, 사회지도층은 아시리아에 포로로 끌려가고 아시리아로부터는 대량의 이주민이 밀려왔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과의 혼교및 종교적 융합에 따라 유대인에 의해 이단자,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집단이라는 배타적 취급을 받았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가며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여러나라에 선한 사마리아법을 만들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일반인의 적극적인 구호행위를 장려하기 위해 구호행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을 선한 사마리아법이라고 합니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입법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도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께서 대화를 나누고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내용이 한번 더 나옵니다. 추하고 더럽고 보잘 것 없는 지체의 사마리탄이 오늘도 이 나라 이웃의 다정한 나눔의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물론 나도 그냥 지났쳤을 터입니다.
포악무도한 강도들이 무섭고 겁나기 때문입니다.
내 할일도 많고 갈길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괜시리 필요없는 송사에 휘말리거나 필요없는 아귀다툼에 휩쌓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