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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역사

박민진 |2008.07.02 01:47
조회 54 |추천 0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행복한 가정이 있다. 어느 정도냐면 부부는 금술이 좋고, 큰 아이는 학교 잘 다니고, 작은 아이는 밤에 나오는 그림자 귀신을 무서워하는 아주 평범한 꼬마다. 이 가족은 주말에는 교회에 가고, 주말 저녁마다 맛있는 식사를 같이 하면서, 시골의 한적한 마을에 여유롭게 살고 있다. 근데 좀 뜬금없지만 이런 물음을 던져본다. 그들에게도 폭력이라는 것이 있을까? 겁에 질린 아이의 입막음을 하고 정확하게 아이의 머리에다 조준해서 머리통을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분해 시키는 그런 잔인한 폭력이 내제되어 있을까? 이 시대의 폭력이란 이 가족에게는 그저 TV 속의 이벤트로 인식될 뿐이다. 영화<폭력의 역사>는 우리의 삶 속 내제된 폭력에 대해 말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 영화의 내러티브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장면이 먼저 펼쳐진다. 폭력 없이는 정의가 되지 않는 두 남자가 그것이다. 그들은 한 가게에 들어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사람들을 죽인다. 그것은 아이도 예외는 아니다. 관객은 초반부터 살인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 없는 두 사람을 보게 되면서 살인과 폭력에 대한 적응을 하고 영화에 들어가게 된다. 그 적응이라는 것은 너무도 진부해져버린 사회 속의 폭력에 대한 블랙유머라고 보면 족할까? 잔인한 폭력 속에 아이가 등장하면 그 순수함에 조금은 마음이 풀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아이가 총을 들 수 없다는 안도감일 뿐이지, 그 아이가 폭력에 안전한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도 폭력은 존재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이 시대의 대물림되어지는 그 폭력성. 유전자의 조작이 아닌 역사 속의 장난임을 인식할 수 있는 자는 이 영화를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세상의 폭력에 익숙하다. 어젯밤 9시 뉴스에서는 중동과 미국의 테러에 대해 떠들지만, 그것은 관심 밖이다. 오늘 아침 신문 조그만 귀퉁이에 실려진 노처녀 강간치사 사건이 오히려 더 잔인하다. 그러고 보면 폭력은 세상의 중심이자 변두리다. 어렸을 적 학교 주변 고등학교 선배들에게 돈을 뺏기는 기분보다 더 엿같이 중심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인정할만한 용기가 있는 지에는 물음이 생긴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바는 분명한 것이다. 내 삶의 폭력은 그리 멀지 않다는 것. 아이의 얼굴에다 총구를 가져가며 웃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가정적이고 친절한 남자 ‘톰'(비고 모텐슨)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사람을 구한 일로 마을의 영웅이 되어 매스컴에 대서특필된다. 그러나 며칠 후, 거대 갱단의 두목 포가티(에드 해리스)가 찾아와 그가 ‘톰’이 아닌 자신의 적 ‘킬러 조이’라며 가족을 위협한다. 아내 ‘에디’(마리아 벨로)와 아이들 역시 ‘톰’에게서 문득문득 보이는 ‘조이’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며 점점 그를 멀리하고 마침내 ‘포가티’는 ‘톰’의 집에 총을 들고 들이 닥치는데…

 

 톰의 아들 잭은 아주 온순하다. 아주 민감한 사춘기를 보내지만, 날아오는 야구공도 힘겹게 잡을 정도로 겁이 많은데다가, 아이들에게는 빈번하게 폭력을 당하는 맹추다. 평범한 가정에서 온순하게 자라온 탓도 있지만, 녀석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착하고, 친절하기로 소문난 스톨 카페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잭은 그렇게 온순한 환경 속에 적응하며 자라온 탓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왕년에 잘나가는 킬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잭은 자신을 괴롭히던 녀석을 단숨에 때려눕힌다. 그의 속에 분노하던 것을 모두 꺼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증오하던 그 얄미운 녀석을 드러눕히고, 밟아버리자 녀석은 후련해 한다.


‘그 녀석은 맞아도 싼 놈이라니까요.’ 

 


 감독 ‘크로넨버그’는 내제된 폭력의 대물림은 마치 도서관의 책처럼 언제든 우리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나치즘과 파시즘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악함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그들의 피가 우리를 만들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폭력성을 분출할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잭은 아버지의 폭력성이 자신에게도 있다고 믿고, 그것을 발산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제된 폭력성을 인정해버린다. 역사 속 전쟁과 학살의 피가 우리에게 섞여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학교에서 내 친구의 폭력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일방적인 피해자임에도 두려움에 돌아보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들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던 점은 바로 그 점이었다. 내가 숨겨두었던 그 열망과 욕구.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폭력성을 나는 참고 지내왔다는 답답함. 과연 그렇게 참음으로 해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사회가 폭력을 조장한다는 말을 뒤로 빼내버리고 나서라도, 그런 굴욕적인 경험들을 견디어 낸 내 자아가 과연 내 가족이 창출해 낼 폭력성에 어떠한 반작용을 할 수 있을지 고민이 쏟아져 나온다. 난 아직도 가족의 구성원이고,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낼 꿈을 가진 사람이기에 내제된 폭력성에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 아들의 피에 그것이 섞이기를 원치 않으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내 사람들은 자신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인정해버렸다. 아이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 자신을 떠올릴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현대 사회의 전쟁과 테러는 폭력을 친숙하게 하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다양한 매체들로 쏟아져 나오는 폭력의 잔상들은 폭력을 미화하는데 서슴지 않았으며,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는 데는 눈이 점점 멀어가고, 우리는 폭력이라는 대전제에 어느새 깊숙이 가입되어버린 용의자다. 그 잔인함이 우리에게 익숙하다 말하면서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꺼내어 놓지는 못한다. 즉, 현실에 깊숙이 자리한 폭력이라 입에 발리도록 말하면서도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일에는 지극히 인색하다. 어떻게든 숨기고 들어, 내제된 폭력성을 억제한다.


 ‘톰 스톨’은 자신을 구속했던 폭력의 역사를 끝까지 파헤치고, 정독하며 해결한다. 그는 자신의 친형까지 죽임으로 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폭력의 역사의 끝을 본다. 그가 끝을 모두 봤다고 한 순간 그는 가정으로 들어온다. 과거는 묻고, 서벅서벅 어색하게 가족의 식사 테이블에 앉은 이 남자는 말이 없다. 그의 가족들은 톰을 위한 고기 한 조각을 올려놓고는 그저 묵묵히 식사를 한다. 외부에서 살인마 조이가 된 그와 가족으로 돌아온 톰 스톨은 완연히 달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묵묵히 그를 받아들인다. 그가 어떠한 이력을 지녔는지는 두렵지만, 그것을 꺼내놓을 용기는 없다. 그저 가족이기에 그를 받아들인다고 말을 할 뿐이다. 어떠한 대화도 없이 침묵 속에서 식사를 시작한다. 감독이 지적하는 폭력의 문제점은 인간이 내제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현실적으로 꺼내놓지 못하는 데 있다. 느끼지 못했는가? 그가 조이가 되었을 때는 마치 게임을 하듯 자유자제로 사람들을 죽인다.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게임 속의 아케이드를 맛본다. 그것은 감독의 의도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내제된 폭력성에 대한 욕구를 비현실적인 도구를 통해 해결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테러영화와 전쟁영화 그리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살인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살인의 경각심보다는 영웅주의의 세련된 포장지로 포장을 했으며, 폭력을 용인하는 사회 분위기에 그에 발맞춘 컨텐츠의 창출이 이 시대를 더욱 폭력적인 미학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일상의 우리는 이와 반대로 돌아간다. 그가 모든 역사의 흔적을 지울 수 있는 데까지 지우자마자, 그는 리얼리티 드라마 속 평범한 가장이 되어버린다. 가족은 묵묵히 다시 자신을 숨기고 아버지를 받아들인다. 당혹스러운 일을 이제 끝마쳤으니 모두 잊자는 것이다. 그들은 다시는 자신들을 들쑤시는 폭력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자신을 억제하며 살아갈 것이다. 잭은 학교에서는 온순한 학생으로 톰은 카페의 친절한 주인으로, 아내는 변호사로서 사랑스러운 딸을 키우며 오늘도 욕망을 숨긴 채 이성적인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시대는 욕구분출의 시대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다. 솔직한 시대라 말한다. 모두들 쿨한 것을 선호하다 보니 뜨거운 것이 없다. 내제된 욕망이 얼마나 뜨거운 지에는 관심이 없다. 욕구분출의 명목 하에 욕구를 억제하는 반작용만이 가득하다. 정말 솔직한 지에는 물음표가 달리는 것이다. 당신 정말 솔직한가? 지금 솔직한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가? 겉멋에 치중해 쿨 하다고 말하면서 속으로 다른 생각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사실이 민감하기에 혹은 비인간적이기에, 짐승 같기에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우리는 뜨겁다. 스스로도 동조할 만큼 우리는 뜨거운 것을 좋아한다. 한기가 돌만큼 서늘한 눈으로 조이가 되어서 폭력을 탐구하는 그는 우리가 아니다. 그는 감독이 만들어 낸 폭력성의 환상이다. 오히려 숨죽이며 집을 들어와 조용히 당신의 가족들에게 미안해하는 당신이 뜨거운 그대이다. 인간의 숙명이 욕구를 억제하며 사는 것이라면, 또한 그것이 동물과의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꼭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시대의 폭력성은 엉뚱한 곳에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당하지 못하고, 숨기려 들며 자신을 은폐한 체 음지에서 표출한다.


 쿨함? 그것은 정말 엿 같은 구라다. 외모지상주의와 학벌주의의 엿 같은 기준 속에 숨겨진 그 욕구불만을 부디 현실에서 풀어야한다. 그것이 누구를 죽이라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는 조용히 있다가 뒤에서 무언가 풀려하는 그 어리석은 짓부터 멈춰야 한다. 폭력의 역사가 우리를 자극하는 가장 큰 힘은 이중의 양면성을 가진 조이가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때 , 비로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다른 방법으로 나를 세상에 내어주자. 표정의 가면을 쓰고서는 나를 억제하는 경솔함은 상대에 대한 모욕이자 내 인격의 말살이다. 욕망이 솔직한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뜨거워져야 한다.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으로 나를 내어 보일 수 있다면 좋겠다. 대화에는 욕구가 묻어나오며 그것은 조용히 우리를 자극한다. 숨긴다고 억제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으며, 오히려 조금씩 솔직해져 보는 것이 진정한 쿨함은 아닐까? 폭력의 역사책에 이름 올릴 생각이 없다면, 진정하고 한 번 뜨거워져 보자. 그리고 그 뜨거움 속에 진실한 그 무언가가 당신을 희열로 감싸 앉을 것이라 확신한다. 내 속의 것을 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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