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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영화를 보라

이훈 |2008.07.06 00:35
조회 59 |추천 0

  

이 영화를 보라 고미숙 지음 그린비 2008.06.10 펑점 인상깊은 구절 그렇다. 유목민이란 어떤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만드는 존재이다. 아무리 황폐한 곳일지라도 그곳에 들러붙어 삶을 창안하는 순간, 그곳은 세상, 아니 우주의 중심이 된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이진경의 필로 시네마 - 이진경 지음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이왕주 지음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 -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지음| 정지인 옮김

 

 

 

여섯 영화에서 걸어나온 고미숙

 

1. 괴물

 

이라는 영화 속에서 '위생권력'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녀의 모습이 또각또각 보인다. 이라는 영화가 초반 반미영화네, 뭐네 하며 떠들썩 했고 천만 관객을 돌파한 한국 최소의 SF영화라는 점, 우리 기술로 괴물을 창조했다는 점 등이 화제에 올랐지만, 의 의미망을 철저하게 분석한 적이 없다는 그녀의 목소리 또한 또랑또랑 들려왔다.

 

그렇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토록 분석적이며, 비판적으로 들여다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한 '위생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괴물'을 확인하고 그와 맞대응하는 강두 가족을 일그러진 영웅으로 인지하며 인디밴드 가족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하는 등 재기발랄한 그녀의 표현은 참 즐겁다.

 

그녀는 강두 가족, 그러니까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그대들을 영웅으로, 진정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런 묘사를 할 수 있는 그녀의 내부에는 아마도 현대적인 주체, 자본의 노예가 된 주체에서 벗어난 자들, 다른 말로 하면 유목민(노마드)을 긍정적으로 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듯하다. 그녀의 내부에 숨겨진 이 욕망은 이 이후의 나올 모든 영화에 대한 감상의 기본 가닥이 된다.

 

2. 황산벌

 

노마드의 운명을 좋아하는 그녀는 여기서 갑자기 왜 마초적인 영화 을 선택한 것일까? 자신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은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마구마구 솟아날 무렵, 아하...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했던 것이 아니었다. '거시기'로 대변되는 마초들의 욕망을 아주 사뿐히 즈려밟고 서 있는 그녀를 보시라.

 

마초들의 놀이인 '전쟁'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지, 역사적 영웅으로 등장하는 김유신이나 계백 등이 얼마나 개인적인 욕망, 다시 말해서 마초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사투리, 그것도 '거시기'라는, 의미를 무한 변용하는 기표를 용사로 내세워 무참하게 썰어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칭찬 한마디, 이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에게, 천만 관객을 돌파한 보다 이 더욱 멋진 작품이다. 는 빈껍데기로만 남아 자본과 거대 이론과 권력 등에게 노예가 된 주체들이 포르노그라피 속에서 자위를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런 현대적 주체들의 빈껍데기 같은 욕망들이 사투를 벌이는 곳이 전쟁터이며, 그러한 전쟁터에서 영웅웅의 이름으로 빛나던 자들을 비주체적, 비주류적, 노마드의 운명을 가진 사투리 '거시기'로 있는 힘껏 싸데기를 날려버리는 이야 말로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역시 그녀는 노마드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더욱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가라, 껍데기는 가라.(물론 여기서 껍데기는 신동엽이 말한 부패한 권력, 과거에 붙잡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권력이 아니라, 돈과 거대 이론과 권력에 사로잡힌 주체를 의미한다.) 큰 소리로 외치고 있다.

 

3. 음란서생

 

으로 너머 오니, 그녀는 더욱 자신의 욕망에 메달린다. 그녀에게 멜로는 한 곳에 머물고자 하는 껍데기만 남은 주체의 욕망이기에 배척당한다. 그것은 한물 간 고대 유물에 불과하다. 아니 유물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것도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제는 에로티즘이다. 포르노그라피다. 그녀는 따뜻한 손길로 '음란(淫亂)'이라는 글자를 인두로 머리에 새기는 형벌을 받은 음란서생 김윤서의 가슴을 살며시 쓰다듬어 준다. 윤서가 왕의 첩인 정빈과 낭만적인 멜로에 빠지자 구태의연한 멜로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정빈을 욕하더니, 거기서 간신히 빠져나온 윤서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기특한 것이다. 다만 잠시 멜로라는 블랙홀에 빠졌다는 것이 섭섭할 뿐.

 

왜 은 조선시대 사설시조의 얘기처럼 질펀하게 놀지 못하고 그렇게 고귀한 귀족 놀음이었던 멜로를 결말로 삼아 영화를 심심하게 만들어느냐고 따끔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묻고 싶다. 왜 멜로는 삼류로만 느껴지느냐고, 사랑을 위해 유치한 대사를 몇 마디 날리고 목숨을 걸기도 하면 뭐가 좀 어때서? 왕이라고 사랑도 하지 말란 법있는가? 왜 멜로가 그렇게 싫은가? 뭔가 슬프고 무거운 곳에 고귀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양반들의 , 귀족들의, 왕족들의 관념론이 허무맹랑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인가?

 

하긴 그녀는 스스로를 반미주의자라고 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반미가 아니라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反美주의자다. 그러면서 예술가들이 고뇌에 차 고독 속에 파묻히거나 피를 뚝뚝 흘리며 예술은 비참하고 슬퍼야 한다거나 괴기스러워야 한다며 표현마저 괴기스럽고 상식을 뛰어넘는 것에 대해 매우 혐오한다는 말을 한다. 그녀에게 예술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더 이상 예술은 귀족놀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은 이해하겠다. 그러나 왜 그것이 예술이 괴기스럽거나 슬프거나 공포스러운 안 되는가? 왜 멜로는 예술이 될 수 없고 포르노는 예술이 되는가? 좀 더 질펀하게 놀았다면 이 영화가 정말 재미있었을까?

 

갑자기 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그녀는 이 영화를 어떻게 평할까?

 

 

4. 서편제

 

에 대한 그녀의 평은 이제 노골적이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라고 생각했던 '恨'이라는 정서가 사실 일본 평론가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나마 19세기 이후, 즉 근대적이라는 것이다. 결코 고유의 정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녀의 말대로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에는 '한'의 정서가 없고 그저 풍유와 골계 그리고 흥이라는 정서만이 있는가? 아마도 그녀 조차도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우리의 정서를 갈라놓지는 않을 것이다.

 

'한'의 정서를 우리 민족의 고유 정서라고 말하기 시작한 사람이 일본의 평론가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서를 표상하는 언어가 그때 그 사람에게서 생겼을 뿐 우리 민족에게 '한'이라는 정서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조선시대 여인들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울음이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녀가 그렇게 외치던 삶을 외면하게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단지 '한'을 고답적이고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라는 작품 안에서의 개념으로만 여기고 비판했다면 모르겠지만 우리 대중에 뿌리 박고 '한'의 개념 전체를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영화 의 원작자인 이청준씨는 소설은 '지사적'이라는 말을 특징지워진다. 지사적이라 함은 조선시대 선비처럼 일상 삶에서 멀어져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며 학문에만 정진하는 사람들의 정신 세계를 의미한다. 즉 이청준씨의 소설은 구체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개개의 삶을 통해 삶을 에워싸고 있는 거대하고 비극적인 체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지적인 냄새를 풍기며 이야기한다. 그런데 영화 는 그런 소설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그녀는 지나치게 주체에 대한 부정, 고답적인 것에 대한 부정을 추구하다보니 에 나와 있는 정서를 비판하면서 잘못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에 등장하는 유봉이 가진 '한'의 개념을 비판하는 것을 옳지만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 민족 전체의 정서를 비판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5. 밀양

 

영화 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 인간의 내면이 저토록 처절하게 파괴될 수도 있구나, 그런 사람의 모습을 전도연은 참 잘 연기해 내는구나, 이런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다니 이창동 감독은 참 대단하구나, 그런데 송강호는 뭐지?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가족, 고향, 종교의 삼위일체 세력에게 배반당한 자의 고통을 잘 그려내었다고 설명한다. 그것도 아직 냉정하게 그려내는 작품을 그녀는 매우 흠족해 한다. 사실 나도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정말 잘 만든 영화다. 그녀처럼 가족, 고향, 종교에게,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평화롭게 지탱해주는 세 개의 거대한 기둥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이 영화가 놀라웠던 것은 아니다. 노마디즘(유목민주의)을 찬양하는 그녀이기에, 이 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설명이 고개가 끄떡여지기도 했다. 송강호에 대해 마지막 부분에 찬사를 실은 것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 다르게 보인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지탱해주던 삼위일체의 기둥들의 나약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노마디즘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이 작품이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인 신애의 내면이 파괴되는 원인에는 삼위일체의 기둥들에게 기대려고 했던 까닭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이라는 것이 유리와도 같다는 것이다. 한 번 금이 가면 웬만해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이제는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 날만큼 약해진다. 그녀는 삼위일체 기둥을 벗어나야만 올바르게 고통을 이겨내고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제대로 그 기둥들을 받아들여야만 그마나 약해진 유리가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예 유리를 다 깨고 마음을 유목민처럼 비운다면 모르겠다. 아마도 그녀는 유리를 다 깨라는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그래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6. 라디오 스타

 

, 그녀가 주장하는 노마디즘의 결정판! 정말 여기에 등장하는 최곤과 박민수 그리고 이스트리버 모두 주류가 비주류이며, 그 비주류를 마음껏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주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기표일 뿐이다. 마치 오늘날 자본과 권력에 놀아나는 주체처럼 말이다. 그녀는 그렇기에 자신의 영화 평론의 마지막을 로 장식을 한 것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중 노마디즘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그녀의 평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의 불만도 없다. 나도 이 영화를 그렇게 이해한다. 물론 친구 사이의 우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락에 대한 후일담 영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으로 보든 주류에서 다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정도 여기서는 영화 에 나오는 우정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주는, 누구도 주체가 되려하지 않는 우정이다. 마치 동성애적인 느낌이 난다. 이것은 비주류의 우정이다. 이미 주류 음악이 아닌 비주류 음악의 대표로 상징되는 락도 비주류가 확실하다. 그렇기에 는 결코 주류에 대한 영화가 아니며, 바로 비주류에 대한 영화, 비주류의 정신, 다시 말해서 노마디즘에 대한 영화다.

 

그녀는 이 점을 잘 파악했다. 그리고 신나게 달린다. 신나게 부른다. 이스트리버로 나오는 '노브레인'처럼.

 

고미숙 씨는 자신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6편의 영화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호평을 했다. 자신만의 관점, 즉 노마디즘으로 영화를 평했다는 점에서는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예술을 평가했다는 점에서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오늘날 유행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 또한 노마디즘의 한 현상이다.

 

다만 지나치게 노마디즘을 좋아하는 나머지 노마디즘을 하나의 주류 세력으로 밀고 올라가려는 인상을 받는다. 노마디즘은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그것의 정체성은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주류 세력에 합류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이미 노마디즘이 될 수가 없게 된다.

 

노자가 말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노마디즘을 이용하되, 노마디즘을 이데올로기화 해서는 안 된다. 유목민은 유목민으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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