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과학수사硏 첫 여성 소장 정희선씨
'듀스'의 김성재씨
死因 규명 결정적인 단서 찾아낸 주인공
남편 유영찬씨도 前 국과수 소장
"3년은 있어 주겠어요?" 1978년 숙명여대 약대를 갓 졸업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입사 면접 시험장에 들어선 앳된 여성에게 면접관들이 물었다. "3년은 있겠지요." 확신은 없었지만 일단 대답은 당차게 했던 스물세 살의 이 여성은 그후 꼬박 30년을 국과수에 바쳤다.
국과수 53년 역사상 첫 여성 소장으로 임명된 정희선(53) 신임 국립과학연구소장은 9일 오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활기찬 목소리로 "감동적이지요"라고 했다. "30년간 연구소에 쏟아 부은 내 사랑이 결실을 거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곧 비워줘야 할 법과학부장 사무실 벽면에 'Synergize(시너지 효과를 내다)'라고 적힌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올해 초 경기도 이천 화재사건 현장에 나가본 후 고생하는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세운 모토다. 그는 "이제 거기에 '신뢰', '정직', '열정'을 덧붙이겠다"고 했다. "그 중 과학자들에게 특히 필요한 덕목은 '열정'이에요. 범죄 수사에 결정적 해법을 제공해야만 하는 우리 연구소 사람들에게는 연구의 끝을 보겠다는 자세, 과학자로서의 '근성'이 무엇보다도 요구되죠."
그의 전문 분야는 약·독물과 마약. 최근 5년 동안 국내외 학술지에 약물 및 마약 관련 연구 논문을 40여편 게재했고, 관련 특허 4개를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엔 과학기술부로부터 '제7회 올해의 여성과학기술자상'을 받았다. "1980년대 초 미국 연수를 갔더니 소변 검사를 통해 필로폰 복용 여부를 판별하고 있더군요. 당시 우리나라에는 필로폰 투약 사례가 드물었지만 '언젠가는 필요하겠다' 싶어 방법론을 확립해 놓았지요." 그 덕에 1986년 이태원에서 필로폰 복용자 10여명을 한꺼번에 검거할 수 있었다. 그는 "연구소 들어와 제일 신났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약·독물과장으로 근무하던 지난 1995년 발생한 랩댄싱그룹 '듀스'멤버 김성재씨의 의문사. "시신 부검을 했더니 오른팔에서 주사바늘 자국 28개가 발견됐어요. 마약을 복용했겠거니, 쉽게 생각하고 혈액·소변 검사를 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화학물질이 나오는 거예요. 꼬박 열흘을 매달렸어요. 심지어 꿈속에서도 실험을 했는데 우리 직원들은 꿈에 내가 나타나 '빨리 알아내라'고 다그치더래요. 13만종의 화학 샘플을 검토한 결과 동물용 마취약이라는 걸 알아냈어요. 기뻤다고 하기는 표현이 좀 그렇지만 아무튼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이번에 그에게는 '최초의 여성 국과수 소장'이란 수식어와 함께 '최초의 부부 국과수 소장'이란 타이틀이 붙게 됐다. 그의 남편이 유영찬 전(前) 국과수 소장(임기 1999~2002년)이기 때문이다. "부담스럽지요. 공·사 구분 못하는 것처럼 보여 연구소에 폐가 될까봐요. 남편은 제게 가장 좋은 멘토지만 사람들이 제 능력보다 남편을 먼저 볼 땐 자존심 상해요." '최초의 여성 소장' 타이틀에 대해서도 그는 "일 좋아하고, 열심히 일하고, 경쟁력 키우는 게 중요하지 여성·남성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매일 10분씩 꼬박꼬박 전화 영어 강의를 듣고, 미국 드라마 CSI를 보면서도 '뭔가 배울 게 없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이 여성 과학자는 딸(14)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로 돌변했다. "걔도 이 다음에 과학을 하면 좋겠는데 도통 관심을 안 보여서 속이 상해요. 공부 열심히 하라고 기사에 꼭 좀 써 주세요."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