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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있어서 가사 유무의 차이점

이예은 |2008.07.19 11:49
조회 252 |추천 1

 

 

  나는 클래식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전공하는 학생들은 클래식만 듣는다거나 적어도 즐겨 들을 거라고 예상하지만, 같은 과 친구들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적어도 나는. 오히려 거의 듣지를 않는 정도이다. 나는 평소 올드팝이나, 어쿠스틱팝, 그리고 케니G나 스티브바라캇, 이루마 등의 뉴에이지 음악, Lisa Ono나 Jack Johnson의 헤비하지 않은 음악을 즐겨 듣는다.

 

Jack Joshson

 

 특히 한국가요는 많이 듣지 않는 편이고, 팝송보다는 가사가 없는, 악기로만 편성된 연주곡을 많이 듣는다. 그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성찰하고 다소 학술적인 내용을 섞어서 쓴 것이 다음 essay이다. 이 essay는 2007년 1학기, 작곡과 이론전공의 전공수업인 <음악미학> 수업과 관련하여 제출한 것이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흥미를 가질 블로거가 있을 것 같아 올려 본다.

  

 

 우리는 음악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사가 있는 음악과 가사가 없는 음악. 어떤 사람들은 가사가 있는 음악(성악음악)을 선호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사가 없는 음악(기악음악)을 더 좋아한다. 물론 두 종류 사이에 구분을 두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간에 대개 가사가 없는 음악을 즐겨 듣는다. 가사가 있는 음악일 경우에는 90% 이상이 팝송이나 이태리가곡, 프랑스 가곡 등 가사가 있어도 어차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음악이다. 내 홈페이지의 BGM 중에 한국어 가사로 된 음악은 겨우 5%밖에 안 될 정도이다. 가사가 있는 음악이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가사 내용 때문인데, 그런 경우 곡에서 음악 자체보다 가사가 비중이 크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그 음악 자체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꺼려진다. 다시 말해 내가 그 가사 때문에 그 음악을 좋아한다고 생각될 뿐이므로, “나 그 ‘노래’ 좋아해.” 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음악’ 좋더라.”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김범수의 &#-9;보고 싶다&#-9;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가사가 와닿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성악음악을 좋아하는 또 다른 경우는 그 음악이 너무 좋아서 가사가 없는 셈치거나 혹은 가사까지 좋아진 경우이다. 즉 좋아하는 대상이 가사가 아니라 음악이 우선한다.

 

 내가 가사가 있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가사, 즉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음악은 대부분 그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다. 가사에 100% 공감하지 않는 이상 자연히 그 음악과 나 사이에 어떤 벽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인 나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올 것 같지만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줌으로써 오히려 나와 먼 관계에 놓이게 된다. 평소 사랑이나 이별 내용을 담은 닭살 돋거나 혹은 극단적으로 우울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무리 (melody가) 좋은 노래라 하더라도 가사 내용이 그러한 내용인 경우 노래와 나 사이의 거리를 느낀다. 예를 들어 대중 가요 중, 가수 김동률과 이소은이 함께 부른 ‘욕심쟁이’라는 곡의 가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매일 아침에 젤 먼저 날 깨워주기
내가 해준 음식은 맛있게 다 먹어주기

친구들과 있을 때 나 말고 딴 데보지 않기
사랑한다는 말은 나에게만 하기
좋아한다는 말도 너무 아껴 하지 말기
내가 투정 부릴 땐 말없이 껴안아 주기
괜히 다툼 끝에 서로 토라질 때 먼저 말 걸어주고 미안하다 말하기
오 사랑한다고 날 좋아한다고 너무 보고 싶다고 수도 없이 말해주기
내가 잘해주는 만큼 나에게 더 잘해주기
오 헤어지자는 말은 평생 꺼내지도 말기
내가 사랑하는 만큼 더욱더 날 사랑하기

 


 나는 이 곡이 주는 느낌이나 두 가수의 목소리의 어우러짐이 꽤나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곡을 좋아하기는 어렵다. 물론 내가 지금 애인이 없어서 공감을 심하게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애인이 있다 하더라도 내 성격 상 이런 닭살 돋는 가사를 좋아하기는 어려우며 가사의 일부분을 좋아할 지는 몰라도 역시 이 가사가 완벽한 나의 이야기가 아닌 이상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경우의 예로, 가사는 정말 공감이 가는 이별 노래인데 가수가 남자인 경우에 아쉬운 생각이 드는 일도 허다하다(나는 여자다).

 

 하지만 가사가 있는 음악이라 할 지라도 가사가 한국어가 아닌 경우엔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가사는 단지 멜로디 전달의 기능, 즉 가수의 목소리가 곡의 선율을 노래하는 하나의 악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뿐이기 때문에 감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영어 가사는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야 있지만 모국어가 아닌 이상 그 언어는 어떤 ‘소리’로 다가올 뿐이지 ‘의미’로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실 이런 경우에는 가사가 알아듣기 어려울수록 좋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최근에 흥미로운 essay를 하나 읽었다. 저자 Lawrence Kramer가 도입부에 소개한 어떤 여자(영어권의)는 어렸을 적 어머니가 불러 주시던 성가를 무척 좋아했다. 그 성가는 라틴어로 된 것으로, 그녀는 가사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그 성가에서 사랑과 따스함을 느꼈다고 한다. 저자는 그 노래에서 가사가 한 역할은 의미전달, 텍스트의 전달이 아니라 단지 멜로디를 전하는 것에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의 순수한 악기로서 작용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기능의 가사의 기능을 ‘songfulness(‘가락이 좋은’의 뜻을 지닌 songful의 명사형)&#-9;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가사가 아니라 가락이고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Kramer는 위의 essay에서 그 예로서 슈베르트Schubert의 ‘들장미(Heidenröslein)’를 들었는데, 이 곡의 가사 내용은 들으면 콧방귀가 나올 정도로 단순하다. 어떤 소년에 의해 꺾이는 의인화된 장미의 이야기인데, 내용은 <들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장미를 본 소년은 즐거운 마음으로 장미를 꺾으려 할 때, 장미는 "날 꺾으면 널 찔러버릴테야"라며 딴에는 위협(?)하지만 소년은 결국 장미를 꺾었고 장미는 결국 수난을 당했다.> 정도가 전부이다. 장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지만 곡 중 이야기꾼이나 슈베르트 모두 이 상황을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 곡은 굉장히 밝고 전원적이다. 가사는 자연스러운 서사 형식을 무시하며 구체적인 이야기 서술을 피하고 몇 개 단어를 뜬금없이 반복하거나 함으로써 songfulness에 일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사 전개의 자연스러움보다 가락 전개의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쨌든 간에 결국 내 입장은, 가사는 나로 하여금 음악에 빠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가사가 없든지 구체적이지 않든지 둘 중 하나인 편이 음악감상에는 더 좋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사실 나는 가사가 있는 음악 중에 좋아하는 음악을 일일이 찾아 내어 들을 필요 없이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듣기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가사가 없는 음악이라고 해서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 둔다.) 가사가 없는 음악은 인간의 언어가 개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구체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기악곡들은 그 주된 특징인 추상적이고 비개념적인 특성 때문에, 들을 때마다 똑같이 감상되지 않고 내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내 해석에 따라 그 음악에 100% 공감하는 것이 ─ 가사가 있는 음악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해지며 그 음악은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친구로서 다가온다. 물론 기악곡도 개별 작품들이 고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표제음악의 경우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하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방해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한 번 마음에 든 기악곡은 쉽게 질리지 않게 된다.

 

 내가 기악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로 든 기악음악의 추상적이고 비개념적인 특성은, 실은 오래 전에는 단점으로 여겨져 기악음악이 평가 절하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금은 기악음악(즉 가사가 없는 음악)과 성악음악(즉 가사가 있는 음악) 사이에 우열을 가리는 일이 이상하게 여겨질 지 모르지만, 사실 기악음악은 구체적이지 못하여 명확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특성으로 인해 미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었다. 중세-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성악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음악이 종교예식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음악에서 종교적 텍스트가 명확히 표현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1] 기악음악은 노래의 반주나 춤의 반주 정도의 기능만을 했고, 감상을 위한 음악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기악음악이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그러한 특성, 즉 단점으로 여겨지던 그 특성들이 장점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감상의 대상이 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로, 서양음악사상 굉장히 최근의 일이다.

 

 한편 현대 예술, 특히 미술 분야에서는 점점 감상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은 예술가라고 생각했던 이전의 사고에서 벗어나, 감상자가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작품의 재창조가 일어난다는 새로운 관점이 나타났다. 다시 말해, A라는 작품을 100명의 감상자가 감상할 때 100개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미술은 이전처럼 단순히 어떤 대상을 그대로 모방해서 표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감상자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게끔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더 이상 작품들은 예술가의 내면을 일방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대에서는 감상자를 또 한 명의 작품 창조자로 생각하며 감상자의 해석을 요구한다.

 이러한 측면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가사가 있는 음악보다는 가사가 없는 음악이 현대 예술의 요구에 더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해, 작곡가 혹은 작사가가 직접 제시하는 가사를 일방적으로 들을 때보다 가사가 없는 음악을 들으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상상하고 해석하며 음악에 의미를 부여할 때 현대의 감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 단점으로 여겨지던 추상적인 기악음악의 특성이 장점으로 인정받게 된 것도 이러한 현대예술의 맥락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1] 홍정수,오희숙,『음악미학』,61쪽, 63쪽.

 

 

 

 공부할 때 가요보다 클래식이 좋다고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9;가사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성&#-9;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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