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지방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지방의 그리스도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한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이라 믿는다.
이 질문은 '여러분이 구원받았습니까?"이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압니까?'이다.
천 명 가운데 두세 사람만이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안다.
어떤 때에는 전 회중 가운데서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찾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여러분은 이미 주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였고 그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악을 씻었는데 왜 아직도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예를 들어 사람이 물에 빠져 옆에 있는 사람이 그를 구해 주었다 합시다. 깨어난 그 사람은 자신이 물속에 있는지 아니면 강기슭에 있는지를 압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자신이 멸망할 자인지 아니면 이미 구원받은 자인지 알아야만 합니다." 입으로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세상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많은 이가 이렇게 대답할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분의 잘못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것은 결코 운이 좋으면 이기고 운이 나쁘면 패하는 그러한 도박이 아니다. 주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것은 참으로 보장된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죽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에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성경 몇 구절을 읽어 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
우리는 자신의 행위로써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우리에게 많은 죄가 있어서 우리 마음속에 근심을 불러 일으키므로 우리는 감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 자신은 실패하지만 주 예수는 여전히 신뢰할 만하시다. 그분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된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알 것은'이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여러분은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여러분의 죄가 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알아야 할 것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죄를 구주께 맡기고 그분이 여러분을 위하여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게 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5:9-13).
주 예수가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주 예수가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여러분은 주 예수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했는가?
영접했다면 여러분은 이미 생명을 얻었고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 주 예수께서 친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
이 단락의 성경은 우리가 영생을 가졌는데도 이 증거를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시는가?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보혈로 씻음받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과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도 요한으로 말하게 하여 그가 이 말씀을 쓴 것은 바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경의 증거는 우리가 능히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후(死後)의 일이 아니며 내세에 가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살면서 마땅히 우리가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알아야 한다. 만일 아직 구원받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그분의 구속을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만약 이미 구원받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며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를 열납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이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할뿐 입니다.
좋은 일을 하고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장래에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이 구원받는 방법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힘을 다하여 일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자신의 공로와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열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64:6).
여러분은 이렇게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고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구원받는 것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2:24, 3:18).
그분은 이미 구속을 성취하셨다. 우리는 그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여러분은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여러분의 행위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결코 그 행위로 인해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의 대신 죽으심의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가망이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를 "속죄제로" 영접하면 여러분은 구원받기를 희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얻지 못한 것들을 바란다. 이미 얻은 것이라면 그것을 바랄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외출하셨다면 아이는 아버지를 아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그 아이는 매우 기뻐한다. 그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직도 너의 아버지를 보기를 원하니?"라고 물으면, 그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는데 내가 왜 여전히 바라겠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정말로 이미 얻었다면 더 이상 바랄 필요가 없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 사람은 멸망에서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이 둘 가운데에는 결코 중립적인 위치가 없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믿지 아니하는 자는…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6-18).
성경은 사람을 두 부류,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
결코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없다.
여러분이 만일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여러분의 죄를 담당하심을 믿었다면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므로 더 이상 구원받기를 바랄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가 다른 사람에 의해 강기슭으로 구해졌다고 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은 무엇을 원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이 "나는 강 기슭으로 구원받기 원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답변이 의미가 있는가?
형제들이여, 주 예수를 믿었다면 여러분은 영생을 가진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아직도 의심하는가? 여러분이 이미 얻었다면 왜 또 바라는가? 다만 주님을 찬양하라.
또 어떤 사람은 구원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나는 진실로 주 예수의 속죄의 공로를 믿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가 구원받았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 나아갈 그때 비로소 그분이 내가 양인지 염소인지 심판하실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나를 양이라고 하시면 난 기뻐할 것이고, 만일 나를 염소로서 멸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슬퍼하며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가련한 장래인가!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만약 내가 이미 구원받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아마도 나는 오늘 밥도 먹을 수 없고, 오늘 밤 잠도 잘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열납하셔서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셨다. 여러분은 진실로 주 예수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가? 여러분이 그분을 믿었는데도 여전히 사후까지 기다려서야만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아니면 멸망에 빠질 것인지를 아는가? 성경 말씀을 보라.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은 가장 믿을 만한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 성경 구절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역사이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구원을 성취하시도록 그들에게 주 예수님을 주셨다. 이로써 주 예수를 믿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믿었다면 여러분은 멸망을 면하여 영생을 가지게 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많은 사람이 암송할 수 있는 구절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우리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많은 믿는 이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고쳐 버렸다! 주님을 구주로 믿었는데도 여전히 구원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변개시킨 것이다!
이것은 사실 그대로 받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음과 같이 고쳤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모든 이로 하여금 한 달 혹은 두 달, 일 년, 수십 년이 지나고 죽은 후에야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경은 결코 '두 달, 일 년, 수십 년' 등의 다른 수식어를 그 안에 넣지 않았다. 성경은 '주님을 믿는 이'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라는 말을 연결하여 놓았다. 여러분과 내가 주 예수를 믿고 그분의 보혈로 죄가 씻겨진 그때에 여러분과 나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은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요3:16). 죽은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대로부터 교회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잘못 해석해 왔다.
사람들은 이것을 주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마태복음 25장 32절의 '모든 민족'은 본래 '이방인'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을 '유대인, 헬라인(이방인), 하나님의 교회'(고전10:32)로 구분하신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방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양과 염소의 심판은 장래 주 예수께서 성도들과 함께 강림하실 때에 이방 열국을 심판하시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 믿는 이들은 결코 이 심판에 포함되지 않는다.
주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후에 다시 구원과 멸망에 관한 심판을 받지 않는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신 것은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그분이 이미 우리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문제를 이미 해결해 주셨다. 그분을 믿는 우리들은 그분을 우리의 대치물로 취한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히 다시 심판받고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요한복음 5장 24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 예수의 말씀은 얼마나 달콤한가! 그분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없다.
이 몇 마디의 분명한 말씀은 죄인의 귀에 달콤한 음악과 같이 들린다. '진실로 진실로'에 어떠한 가장(거짓)이 있을 수 있는가?
단연코 없다. 주 예수께서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씀하심은 진실로 진실로(참된 것)인 것이다.
주 예수께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신 이것도 참된 것이다. 주 예수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신 이것도 진실로 참된 것이다.
그분이 '이미'라고 말씀하시면 당연히 '이미'인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말할 때에 '이미'라는 이 두 글자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미'라는 단어는 일을 완성하여 과거사가 된 것을 말하지 않는가? 주님은 그분을 믿는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우리는 죽어봐야 비로소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가?
형제여! 오늘 그분을 믿는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내가 진실로 말하건대 믿은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믿지 않은 자의 죄는 '이미 심판받았다'. 요한복음 5장 24절과 3장 18절의 '이미'는 모두 현재에 결정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이것을 읽고서 많은 믿는 이들처럼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만일 이미 구원받았다 해도 어찌 자랑할 수 있겠는가? 나의 행위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독자여! 우리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결코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다'라는 글자는 바로 우리가 수동적이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인데 여기에 또 어떤 자기 자랑이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진실로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고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은 본래 죄인이며 멸망에 빠져야 마땅하지만 지금 주 예수를 믿어서 그분의 구원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은혜가 얼마나 깊고 주의 구속의 공로가 얼마나 넓으며 주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표명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이 은혜를 입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당연히 특별하게 주님을 칭송할 것이며 늘 주님을 높이며 찬송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높이는 것이지 결코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의 깊음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사하심의 크기를 보면 볼수록 주님을 더욱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마땅히 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영생을 가졌고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자기 자랑이 아닌 믿음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신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의 행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구원받은 것은 결코 우리의 좋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주 예수께서는 의인이 아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었다"(딤전1:15-16)라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의지한다면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감히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만약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장점이나 좋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구원받을 가망이 없다.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이리저리 요동하는 사람이다. 때로 행위가 좀 좋으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고 행위가 나쁠 때면 마땅히 멸망에 빠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은 시종 주님을 온전히 신뢰한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우리에게 선한 행위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다.
실로 그분의 은혜는 얼마나 큰지!
많은 사람들은 "나는 이제 주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렇다 해도 구원받은 것인가?"라고 말한다.
형제여! 성경은 결코 "나는 이러한 즐거운 느낌을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주어 너희로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렇게 말했다면 느낌이 없으면 틀림없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이것을'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성경 말씀이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자신이 영생을 얻었고 구원받았음을 아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주님을 믿은 사람은 구원받았다고 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느끼든 못 느끼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여러분이 주 예수를 의지하고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죄를 씻었다면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형편이 좀 넉넉한 한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친구가 화답이 없다고 하자. 그는 혹 그의 친구가 그를 무시하여 기꺼이 그를 돕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다. 생각할수록 그는 그 친구가 자기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이 일을 동네 사람에게 이야기하였다. 어떤 이는 그 친구가 돈을 변통해 주지 않을 만큼 우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세태가 변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가 희망적인 말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매우 기뻤지만 절망적인 말을 들었을 때는 또 몹시 염려스러웠다. 다음날 그의 친구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그 속에 어떤 약속이 있는지의 여부를 몰라 안절부절하였다. 그러나 편지를 읽어 보고 나서는 식구들을 불러 말하였다. "이제 다 해결됐어. 내 친구가 앞으로 우리 집의 모든 쓸 것을 책임지겠다고 친필 서신을 보내왔거든. 이제는 아무 문제없어. 사람들이 나를 희망이 있다고 말하든 희망이 없다고 말하든 난 상관 안 할 거야. 그가 직접 약속했기 때문에 난 이제 안심이 돼."
많은 믿는 이들이 이 가난한 사람과 같지 않은가? 가련하게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자신의 느낌에 따라 이리저리 표류한다. 이 가난한 사람은 친구의 편지를 받고서야 안정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얻으면 문제가 해결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주) 이것을 믿기에 앞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절대적임을 믿고 신뢰하여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이 정해졌다고 말씀하시는데 왜 의심하는가?
우리의 느낌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사람의 이상(理想)이 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시면 족한 것이다. 그분의 말씀이 최종적인 판결문이다. 하나님은 관대하게 그분의 성실을 선포하셨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의심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은 과연 맞지만 나는 나의 믿음이 불완전하여 구원받지 못할까 두렵다."
성경에는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분별만 있을 뿐, 불완전한 믿음이란 것이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주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공로와 무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공로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원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믿는 것은 곧 영접하는 것이다(요1:12).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주 예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면' 족하다. 주는 것과 받는 것 둘 사이에는 죄인이 이룬 공로가 없다. 구원은 완전히 주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 중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우리는 얼마나 가련한가!
성령이 오셔서 우리로 죄를 알게 하셨다. 죄의 형벌은 얼마나 처참한지! 장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벌벌 떨지 않을 수 없다. 더욱 가련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진흙탕에 빠진 사람은 그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실로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죽임당한 어린양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우리 죄인의 위치에 서 계셨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분이 구원을 이루셨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주여, 당신의 큰 은혜는 우리로 한없이 감격하게 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데 없는 죄인인 우리들이 그분에 의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기에는 어떤 완전한 믿음이나 불완전한 믿음이 없다.
그분 자신이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쫓아 내지 아니하리라"(요6:37)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미 그분께 왔다면 이제 하나의 문제는 "그분이 나를 내어 쫓을 것인가?"이다. 하나님을 찬미하자. 그리스도께서는 성실하고 신뢰할 만하며 그분의 입에는 거짓이 없으시다. 그분은 언제나 그분 앞에 나아온 자를 내어 쫓지 않으신다. 자신의 죄를 알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을 그분은 구원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이것이 현재 주님의 초대장이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실이 여러분을 구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시는데 우리들은 아직도 믿지 않는가? 아직도 의심하는가?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되어 정함이 없이 표류하는 우리의 생각을 밀어내야 한다.
어떤 이는 이 진리를 분명히 알고 난 후에 다음의 의혹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이 만일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가졌으며 천당에 가는 것이 보장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정욕을 좇아 방임하고 임의로 죄를 범하지 않겠는가? 그가 이미 구원받은 것을 안다는 이유로 죄를 짓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기우(杞憂)에 불과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안 사람이 여전히 범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전히 상반되는 다른 행위가 발생하게 된다. 즉 구원받은 것을 안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고 그의 생각과 행위에도 하늘에 속한 성질을 갖게 된다.
나는 이에 대해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한 아버지가 아들을 미국에 보내려고 한다 하자.
그 아들은 어떤 옷차림을 해야 하는지, 중국인의 장삼, 마고자 중에서 어느 것이 최신 유행인지 주의하겠는가? 또 어떻게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지 중국인의 처세술을 연구하겠는가? 그리고 그 밖에 중국인과 관련된 많은 사물들을 연구하겠는가? 그는 결단코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가 지금 미국에 가려고 한다면 그의 마음은 중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풍속과 시대의 유행을 배우려고 할 것이다. 그는 음식 먹을 때에 어떻게 칼과 포크를 사용해야 하고, 어떻게 악수하며 모자를 벗는지 배우려고 할 것이다. 그는 또한 미국인의 기호와 습성 등을 상세히 알려고 할 것이다. 그는 미국인의 기질을 알아볼 것이다. 그는 영어를 말할 때에 미국인의 어조로 말할 것이고, 길을 갈 때에도 미국인의 걸음걸이를 배울 것이다. 그의 옷과 모자와 신발도 미국인의 유행을 따를 것이다. 이처럼 미국에 가려고 하는 사람은 일거일동을 미국인과 똑같이 하려고 하는 자연적 심리를 가지고 있다. 만일 믿는 이가 자신이 영생을 얻은 하늘에 속한 백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반드시 말이나 행동이나 됨됨이 등의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늘에 속한 모양을 배우려고 할 것이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을 본받고 그것에 동화될 것이다. 형제여!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아는 자는 결코 범죄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도리어 날마다 전심으로 위엣 것들을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믿는 이의 영적인 체험으로 충분히 증명된다. 미국에 가려고 하면 어떻게 미국인이 되는가를 배우듯이 천국에 가려고 하는 자는 또한 마땅히 어떻게 천국 시민이 되는가를 배워야 한다.
사랑하는 형제여!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사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며 더욱이 영원 안에서의 가장 큰 분깃이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미 구원한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이 어떠한 기쁨인지! '기쁘도다! 하늘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것은 실로 얼마나 귀한 소식인가! 이것이 참된 복음이다. 이생에서 내가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다니! 전에는 죄인이었는데 지금은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주님이 이미 나를 구원하여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겼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어떠한 감격인가! 어떠한 환희인가! 이것을 알 때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알므로 모든 권위와 풍성과 지혜와 능력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영원토록 죽임당한 어린양께 돌린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았을 것이다. 그분이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는 마땅히 은혜에 감사함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하고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그분이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빌1:6).
우리 자신은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롬8:8)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할 때 비로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때로 실패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때 낙심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서 주님의 용서를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전진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한번은 내가 어느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한 형제가 이 가르침을 분명히 안 후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나는 내가 구원받은 자임을 알지 못했으므로 세상에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렸는데도 심판대 앞에 갔을 때에 주님이 또 제가 멸망할 것이라고 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없는데 또 천국에서의 분깃도 없다니요! 그러나 오늘 저는이 구원의 진리를 알고서 천국이 이미 내게 보장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국의 시민인 저는 더 이상 세상과 어울려 살기 원치 않습니다." 그렇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속에 감춰진 것을 안다면 자연히 앞에서 말한 것들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놀라우신 구주를 가졌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가졌다. 어찌 기쁘지 않은가!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치자!
<"하나님과 화목하라" 中 '구원의 증거'>(한국복음서원) - 웟치만 니 -
이렇게 기록된 것 처럼 옳든 옳지 않든 하나님에 대해 깊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