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에는 '언어 영역'이라는 이름의 국어 과목이 100점을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의 한국어 사용 능력을 고취시키고, 비문학과 문학을 두루 아우르는 독해 능력을 키우는데에 목적이 있다고 내 맘대로 판단해도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지만,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 수준의 글을 한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당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언어 교육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55문제(?)의 언어 영역에는 문학 작품을 지문으로 하는 문제가 무조건 출제된다. 덕분에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고대로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게다가 매년 늘어나는 작품들을 대충이나마 훑어볼 것을 강요받는다.
모래톱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소설의 화자는 교사였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아마도 강과 바다가 만나는 시골 마을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어떠한 거대 권력과 외롭게 싸우고 있다. 화자는 직접적으로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전해듣거나 본 내용을 담담하게 서술할 뿐. 즉,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겠다.
난 분노했었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그 내러티브는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던 일이었다. 난곡을 비롯한 달동네에서, 평택의 미군기지 예정지에서, 간척사업이 벌어지는 갯벌 마을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소설은 '힘'을 가지고 있다. 잘 쓰여진 소설은 훌륭한 사상가의 논설보다도 더 크게 사람들을 움직인다. 나는 그러한 힘을 느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 입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여러 소설들을 섭렵해야 했지만 그 작품들은 무엇하나 나에게 감동을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난이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감자'를 통해 느꼈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개인주의자의 아픔을 '광장'을 통해 느꼈고, 사랑과 외로움이란 어떤 것인가를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통해 느꼈다.
그러나 나도 그랬듯이, 한국의 학생들은 노련한 교사(혹은 강사)들이 제작한 '리스트'를 통해 문학 교육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작품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작품의 시점과 주제, 배경, 서술 시기, 역사적 상관 관계, 주인공의 성격 등등을 외우다 보면 같밭새 영감의 독기서린 외침과 살인 행위는 신문 끄트머리에 있는 쪽광고보다 가치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교육의 수월성이란 무엇인가? 과연 잘 하는 학생과 못 하는 학생의 기준은 무엇인가? '학력'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행복한 가정'과 '번듯한 직장'과 '안락한 노후'만을 추구하는 정신적 기계들만이 뽑혀나오지는 않는가?
사람들은 점점 어려지고 있다. 나만 해도 이미 스물 다섯, 한국 남성 평균 연령의 1/3 가량을 살았지만 아직도 대학생이란 지위에 머물러 있다.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가 늘어날 수록 소요되는 교육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만큼 배우고 있는가?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돈만이 목적이 아닌 '보람된' 일을 하고 있으며, 적당한 '여가'와 '취미'를 즐기고 있고,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것을 찬양한다. 하지만 이러한 중산층적 수사들 뒤에 숨어있는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정신적으로는 평생 아동기를 벗어나지 못한채, 다른 누군가가 젖병 속에 고이 담아준 이유식만을 옹알이하며 빨고 있지는 않은가?
갈밭새 영감은 무식했다.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알았다. 자신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남아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알고 있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치는 행동가였다. 모래톱 이야기가 교과서와 수능 출제 리스트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점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반체제적으로 읽힐 수 있는 이 소설이 극도로 병영화, 보수화 된 한국 사회의 교과서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신기한 일이지만, 밑에 첨부한 그림(사진?)을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똑똑한 강남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