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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정석모 |2008.08.07 14:01
조회 539 |추천 0

 


 

(※ 스포일러 있을 수 있음..)

 

 

어디 한 번 마음대로 놀아 보라고 멍석을 깔아주니, 정말 제대로 노는 배우.. 김윤석!

 

개봉 전부터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이끌어내며, 신인 감독의 심상치 않은 데뷔작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 영화를 나는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작할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기다려 왔었다. 최근에서야 '타짜'에서 소름끼치는 악역으로 뒤늦게 자기 이름 석 자를 대중에게 각인시키긴 했지만, 김윤석은 오랫동안 연극에서부터 연기의 내공을 다져오면서, 그동안 여러 편의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던 배우였기에, 드디어 그가 주연을 맡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부터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려 왔던 것이다.

 

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아귀'라는 악역을 맡았었지만, 사실 그동안 이 배우가 출연한 영화 속의 배역들 중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던 배역들은 주로 고단한 삶의 밑바닥에서 좌절감을 온 몸으로 떠안고 사는 배역들이 많았다.  에서 빚 때문에 친구에게 무릎을 꿇고 도움을 청하다가 거절당하고 결국 자살을 하고 마는 배역으로 잠깐 나왔을 때나, 에서 전직 복서로서 노가다판에서 일하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냉소적인 아버지 역으로 나왔을 때, 눈빛 하나만으로도 삶에 대한 절망감을 절절히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이상하게도 이 배우의 연기만이 자꾸 머리 속에 떠올랐었다.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엄중호"라는 배역 역시 그동안 그가 가장 인상깊게 보여주었던 캐릭터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였고, 그래서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진가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CF나 드라마 몇 편의 인기를 등에 업고, 국어책 읽는 듯한 연기로 영화 찍어서 자신의 인지도를 내세워 홍보하기에만 급급한 '무늬만 배우'들이 넘쳐나고 있는 요즘에 정말 '배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몇 안 되는 배우들 중 한 명인 김윤석.. 드디어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더니, 마치 그동안 꾹 참아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듯이 고수로서의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 잠깐 TIP 하나.. 김윤석이 영화 안에서 "후달리다"라는 표현을 쓰던 장면이나, 다른 포주를 앞에 앉혀놓고 마주앉아서 "읊어 봐" 라는 대사를 날리던 장면은 마치 의 아귀에 대한 "오마주" 같아 보였다.  그 순간 '아귀 김윤석'이 저절로 겹쳐졌으니까 말이다..

 

 

아예 처음부터 패를 다 보여주고도, 판을 가지고 노는 타짜 같은 감독.. 나홍진!

 

이 감독. 이 영화가 장편영화 데뷔작이랜다. 그런데, 정말 노련하다. 그것도 다른 장르도 아닌 스릴러 영화에서.. 조폭 코미디 영화에서처럼 우스꽝스런 상황설정이나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할 수도 없고, CG로 떡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탄탄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감독의 연출력이 전체적인 영화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그래서 감독으로써는 꽤나 까다롭고 어려운 장르가 스릴러일텐데..

이 신인감독의 이 데뷔작에서 한국 영화가, 그것도 스릴러 장르의 영화가 진화하고 있다는 희망까지 발견하게 될 줄이야..

 

그동안의 한국 스릴러 영화를 보다보면, 너무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결말에 가서 어설프게 끼워맞추느라 급급해하거나, '나중에 알고보니 가장 엉뚱한 놈이 범인이더라'라며 관객의 뒤통수 좀 쳐볼려다가 2시간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본 사람으로 하여금 되려 맥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러나 이 영화. 처음부터 아예 다 패를 보여주고 판을 시작한다. 복잡하게 머리 쓸 일도 없다. 범인이 누구인지 대놓고 말해준다. 이제 문제는 '누가 범인인지' ' 왜 그가 범인인지'가 아니다. 오직 '어떻게' 잡아야 될 것인가만 명확해진다. 그래서 쫒는 자와 쫒기는 자에만 집중하면 되고, 그 단순한 상황설정만으로 영화는 2시간 동안 팽팽한 긴장감을 전혀 놓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있고, 그래서 더 대단하다.

 

감독의 뚝심이 엿보이는 탄탄한 시나리오의 힘.. 거기에 디테일한 연출까지..

 

쫒는 자와 쫒기는 자.. 누구나 결말이 예측가능한 이 단순한 상황설정 하나만으로 2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관객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스크린에 몰입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추격자(김윤석)와 희생자(서영희)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될 수 있게 만들었던 탄탄한 시나리오의 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윤석의 독촉에 못 이겨 아픈 몸을 이끌고 영업을 나간 서영희. 하정우의 집 앞에서 을씨년스럽게 집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을 올려다 보니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고, 곧 그 불길한 예감은 겁에 질린 서영희를 통해 자연스럽게 관객에게까지 마음을 조이게 만들기 시작한다. 심상치 않은 욕실의 모습.. 창문 아닌 창문, 굳게 잠긴 현관문 앞에까지 서게하며 살인마가 친절하게 그녀를 가지고 놀듯이, 감독도 관객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그녀가 된 것처럼..

 

어느 평론가가 쓴 글을 보면, "영화를 보다 보니, 정말 저 여자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했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나 역시도 이 부분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서영희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범인이 서영희가 있는 슈퍼로 들어섰을 때, 그리고 그 곳에 서영희가 있는 것을 알고 서영희에게 다가갔을 때,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었다면 그것은 그만큼 영화에 몰입된 상태에서 서영희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반증이었을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서영희가 짧은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그녀가 탈출하기까지 감독은 다시 일말의 희망을 안겨주는 듯 했다. 그러나 감독은 끝내 관객과 타협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평범한 스릴러의 공식을 어기고 관객에게 정서적인 불편함까지 안겨주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독하게 밀고 나간다. 바로 이 부분이 감독의 뚝심이 엿보였던 순간이었고, 그럼으로써 이 영화가 그저 그런 스릴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돋보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아프다는 서영희를 독촉해 영업에 나가게 한 김윤석은 또 어떤가.. 나중에 알고보니 애까지 있었던 서영희를 결국 자신이 사지로 몰아넣은 꼴이 되고 말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범인의 누나를 찾아가 돈을 요구하는 잔머리까지 굴리던 그는 범인이 자신의 조카에게까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서영희를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범인에 대한 분노, 서영희에 대한 죄책감, 거기에 아이에 대한 동정심까지 겹쳐지면서 김윤석은 이제 절박해진다.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헐떡거리는 김윤석을 카메라는 아무 기교도 부리지 않고 투박하게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고스란히 그에게 감정이입이 되게 만들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살던 김윤석이 아이에게 갑자기 마음을 열면서 자신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접도 해주지 않고 무시했던 서영희 때문에 가슴아파하는 것을 두고 '잘 나가다가 어설프게 휴머니즘과 결합'한 거라고 비판하는 의견이 많은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

그동안 세상의 온갖 때에 찌들어 "쓰레기"로 살아오던 김윤석이 아직 아무런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어린아이와 함께 가장 근원적인 인간의 생명마저 존중할 줄 모르는 살인범을 추격했던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 둘과 자신을 비교해보며 그동안 잊고 살았던(혹은, 놓치고 살았던)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찾아갔던 과정이었고, 그 힘겨운 추격 끝에 그가 진정 잡은 것도 범인이 아니라 그것 아니었을까.. 형사였던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돈 밖에 모르는 '쓰레기'는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에 그 비판을 받아들여서, 김윤석이 '일관성있게' 끝까지 아이를 무시하고, 서영희가 시체로 발견된 다음에 이제 어차피 범인을 잡아도 지금까지 추격의 원동력이 되었던 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해서, 범인을 쫒는 걸 포기했다면 그것처럼 절망적인 결말이 또 있을까.. 김윤석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범인을 응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휴머니즘과 어설프게 '결합'했다고 비판을 하기보다는 김윤석의 추격이 최소한의 휴머니즘을 '되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너그럽게 봐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덧붙여, 하정우에게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극한의 광기까지 표출하게 하면서 끝까지 독하게 밀어 부치던 감독이, 인간 말종으로 그려지고 있는 김윤석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마지막에 아이를 통해 마음을 열고 최소한의 인간성을 살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시선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김윤석이 병원에 누워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마치 사건 현장이었던 동네처럼 보이는 창 밖 풍경을 응시하던 마지막 그 시선이 감독의 그런 시선을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하나. 초반에 김윤석이 하정우를 힘들게 쫒아가 두들겨 팬 후, 전봇대를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며 헛구역질을 하던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추격씬이 전혀 과장되지 않고 리얼리티가 살아 있었지만 특히 이 장면은 리얼리티와 디테일함이 돋보였던 장면이었던 것 같다.

 

 

과 이 떠오르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머리속에 오버랩된 영화가 과 이었다. 정의나 양심과는 거리가 멀고, 적당히 비리와 타협하며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전직)형사가 정말 파렴치한 연쇄살인마를 잡는다는 전체적인 설정에서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나 은 감독 특유의 코미디적인 성격이 많이 섞여있었던 스릴러 영화였고, 은 정치, 사회적인 풍자가 은유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던 스릴러 영화였다면, 이 영화 는 정통 스릴러에 충실한 영화인 듯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최근에 흥행한 와 영화 전반의 분위기가 갖는 느낌이 흡사하다는 느낌도 든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직접적인 대결구도가 없다는 점이다. 처럼 살인마와 형사가 두뇌 싸움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에서처럼 형사를 비웃기 위한 뉘앙스를 풍기기 위해서 추가살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에서처럼 미친 듯이 범인을 잡는데만 집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에서 김윤석과 하정우는 어쩌다 보니 상황이 얽혔을 뿐, 각각 서로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김윤석은 하정우가 여자들을 죽였다는 말을 믿지 않고, 하정우가 여자들을 돈을 받고 빼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없어졌을 때 생기는 금전적인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서영희를 찾아다니는 것 뿐이었다. 실종된 서영희를 찾으면, 자연스레 다른 여자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도 같이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하정우의 누나까지 찾아내서 대신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것을 봤을 때 이 점은 더 명확해진다.

 

그 과정에서 하정우의 조카를 보게 되면서 김윤석은 그 때서야 어쩌면 하정우의 말이 다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던 서영희의 애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그 때서야 비로소 서영희를 '구출'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것 뿐이다. 즉, 이 때까지도 하정우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처참하게 죽은 서영희의 죽음을 목도하고, 뒤늦게 서영희가 남긴 메세지를 들으며 그는 서영희에 대한 죄책감과 동시에 살인마에 대한 분노를 느끼고 마지막까지 하정우를 찾게 되는 것이다. 김윤석이 마지막에 하정우를 망치로 내려치려하기 전에 그의 머리속에 죽은 서영희와 그의 딸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장면을 상기해 보면, 그가 서영희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서영희의 죽음을 전환점으로 그동안 서영희를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겨왔던 김윤석은 이 때가 되서야 서영희도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 때부터의 추격은 더 이상 물질적인 이유(돈) 때문이 아닌, 인간으로써의 '순수한' 응징을 통한 속죄를 위한 추격으로 그 성격이 달라졌다고 본다. 추격의 목적이 그대로였다면, 더이상 추격할 이유가 없어져 버리니까 말이다. 김윤석이 뒤늦게 서영희가 죽은 방에서 주저앉아 있었을 때, 아마 속으로 이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과연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한 추격을 한 건지, 그리고 이제는 무엇을 추격해야 하는지..)

 

※ 마지막에 김윤석이 동료들에게 제압당해서 바닥에 얼굴을 맞대고 엎드려 있었던 장면에서, 맞은 편에 잘린 서영희의 얼굴이 위에서 흘러내린 물 때문에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김윤석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 그것을 바라보는 김윤석의 회한어린 눈빛 연기는 그의 연기의 절정을 보는 듯 했다. 마치 에서 송강호의 그 마지막 눈빛처럼.. 

 

하정우 역시 김윤석 때문에 경찰에 잡혔고, 그에게 죽도록 엊어맞았지만 김윤석에게 아무런 원한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다만, 하정우는 단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나중에 하정우가 경찰서에서 나와서 김윤석에게 복수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시체들을 마당에 묻고 양복을 입고 떠나려는 것을 보면 그렇다.

 

경찰 역시 이 둘에게 직접적인 관심은 없는 듯 했다. 다만 시장이 똥 맞도록 방치한 사건에 대한 경찰의 책임을 따지는 여론을 덮기 위해, 더 극적인 사건이 필요했기에 이 연쇄살인사건에 그토록 매달렸던 것 뿐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서로 추격의 대상(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세 가지 부류를 개연성있게 서로 얽히게 만들어 하나의 꼭지점으로 귀결시킨 점에서 감독에게 가산점을 주고 싶기도 하다.)

 

'노골적으로' 잔인한 장면이 거의 없었음에도, 왜 잔인했다는 생각이 드는걸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잔인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곰곰히 되집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잔인한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망치나 정으로 직접적으로 머리를 가격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았고, 시체와 분리된 머리, 손 등이 나오긴 했지만 직접적인 훼손 장면이 나온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피 튀기는 장면 정도..

오히려 감독은 하정우가 둔기로 사람을 가격하기 바로 직전에 카메라를 돌리고, 효과음이나 비극적인 음악으로 대체하면서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는 절제된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관객으로 하여금 결정적인 장면을 스스로 상상하게끔 만들게 하는 이런 감독의 절제된 연출이 오히려 그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 잔인했으면 잔인했다랄까..

(실제로 유영철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들과 비슷한 흉기로 대부분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한다. 실제 현장이 얼마나 참혹했을지 한 번 상상해 본다면, 감독이 얼마나 관객을 배려하면서 표현의 수위를 자제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럼 무엇이 그토록 전체적으로 잔인하고 끔찍하다는 인상을 남겼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영화 속 현장이 마치 내가 사는 동네 골목길처럼 다가오고, 아무런 동기나 목적도 없이 살인 자체를 즐기는 살인마의 광기가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유영철이 저질렀던)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과 겹쳐지면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여지고 있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윤석에게서 느껴지는 송강호의 향기.. 그러나, 같은 듯 하면서 무언가 다른...

 

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송강호'와 '김윤석'을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외모가 은근히 닮은 듯 싶은 이 두 배우, 오랜 무명 시절에 연극할 때부터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보며 붙어지낸 친구라고 한다.

각자가 맡은 배역의 성격은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 않는데, '송강호'와 '김윤석'이 드러내는 연기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 듯 싶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루저로써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송강호는 그 상황을 이완시키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에 비해, 김윤석은 철저하게 그 상황에 파고들어 눈빛 하나, 심지어 툭 내뱉는 농담 한 마디에도 고단한 삶에 대한 무력감과 냉소감을 절절하게 담아 분위기를 냉랭하게 수축시켜 버리고 있는 듯한 점에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엉뚱하게, 혹은 무능력하게 "삽질"하기 바쁜 공권력을 풍자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맨 처음에 범인을 잡고, 다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범인을 증거가 있는 현장까지 추격해서 잡은 사람은 경찰이 아닌 '현직 포주'였다. 불법도 아닌, 그렇다고 합법도 아닌 법망의 경계선에서 법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법을 피해 살아가는 포주가 오히려 법의 '혜택'을 입고 있는 살인범을 쫒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거기다 직접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당사자가 직접 나설 때에만 그나마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걸 보면 그저 씁쓸하기만 할 뿐이다. 경찰은 제3자에 불과할 뿐이었고, 단지 자신의 밥줄 때문에 범인을 쫒아가 잡은 것이 결과론적으로 앞으로 범인에게 희생될지도 모르는 많은 예비 피해자들을 구해내며 사회의 안녕과 정의를 도모한 영웅적 행위가 되고 말았으니 이것도 기가 막히지 않은가.

 

경찰은 절대 김윤석만큼 절박한 입장이 아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다. 범인을 잡으면 좋고, 못 잡으면 그만인 것이다. 어차피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날 것을 믿고 웃으면서 살인을 자백하는 범인을 앞에 두고도 증거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고, 오히려 김윤석이 '비공식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조하고, 행여 나중에 그 폭행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쓸까봐, 김윤석을 앞에 내세워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해할 뿐이다.

 

솔직히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범인의 모습은 그다지 완벽하지 못하다. 경찰서에서 앞뒤가 안 맞게 말을 바꾸다 걸릴 정도로 그다지 계산적이지도 못하고 치밀하지도 못 할 뿐더러, 그렇다고 해서 특출나게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날렵하지도 못한, 그저 어디에서나 한번쯤 마주칠 수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청년의 모습일 뿐이다. 그리고, 얼핏 보면 마치 경찰의 수사망을 교묘하게 빠져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범인이 경찰에 맞서 의도적으로 한 일은 애당초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무능력하고 사명감마저 없는 공권력이 마치 그가 지능적이고 교활한 면까지 갖춘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보이게끔 만들었던 것은 (혹은, 그렇게 되도록 방치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게 다소 과장되게 공권력의 허점을 꼬집으면서까지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유나 동기가 없는 살인.. 그게 더 개연성있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무섭다..

 

성불구나 종교적인 문제가 언급되긴 하지만, 감독은 직접적인 살인 동기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직접적인 원한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에서처럼 보험금을 노린 것도 아니고, 에서처럼 부모의 유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에서처럼 사회에 거창하게 메세지를 던지기 위한 극적인 수단도 아니며, 에서처럼 부녀자들만 골라 죽이지도 않는다.

왜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느냐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도대체 살인의 동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고 화를 내는 기동수사대 대장의 답답함에 저절로 공감이 될 정도로,  얼핏 보면 이해가 되질 않고, 이런 살인은 그다지 현실적이지도 않고, 개연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었고, 실제 유영철이 그랬다. 그가 죽인 20명은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직접적인 이유나 동기가 없다는 건, 다시 말해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거다. 어쩌다 재수없으면 당할 수 있는 교통사고처럼 말이다.  교통사고를 당하는데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영화 속 서영희나 슈퍼 아줌마가 당했듯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더 현실성있게 느껴지고, 감독이 이 현실을 잠깐이라도 부인해주기는 커녕 새삼 더 확실하게 각인시켜 줌으로써 이 끔찍한 살인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점이 지켜보는 이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다.

아울러 연쇄살인을 저지른 범인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해 그 어떤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범인 스스로 살인을 합리화할 수 있는 여지를 조금도 남겨주지 않음으로써, 범인에게 인간적인 연민에서 비롯되는 최소한의 동정심마저도 차단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처음부터 작정한 듯 독하게 밀고 나가는 감독의 뚝심이 다시 한 번 엿보이는 순간이다..)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다. 하정우, 서영희, 조인기, 아역의 김유정까지..

 

아무 죄책감없이 웃으며 사람을 죽이는 희대의 살인마 역을 맡은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의 독한 연기변신을 통해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배우임을 여실히 입증한 듯 싶다.

(그러나, 향후 몇 년동안 의 이성재가 그랬듯이 CF는 절대 들어오지 않을 듯...)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영희의 연기 역시 따로 말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특히나, 마지막에 하정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죽은 척 고개를 떨구면서 두려움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던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김윤석의 선배 동료이며 현직 기동수사대 형사로 나온 조인기. 작년에 가장 많은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라고도 하는데, 약방에 감초처럼 나오면서도 어떤 역을 맡든 완벽하게 자신의 배역을 소화하는 모습이 멋진 배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서영희의 딸로 나온 아역의 김유정.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나중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에서 김수로의 숨겨진 딸로 나와 깜찍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바로 그 아역배우였다. 이 영화에서도 김윤석을 따라다니며, 말 한 마디 지지 않으며 당찬 연기를 보여주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몰라보게 컸다니..

 

탄탄한 시나리오, 배우들의 열연, 신인감독의 심상치 않은 연출력까지 삼위일체된 A급 스릴러..

 

아무런 과장이나 기교없이 투박하게 오로지 스릴러 그 자체에 충실한 영화.

탄탄한 시나리오와, 좋은 배우들의 열연,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영화를 잘 만들려면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영화.

그리고 영화를 잘 만들면, 굳이 나 같은 오락프로그램에 나와서 온갖 호들갑을 떨며 홍보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관객의 입소문만으로도 인정받고 흥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드는 영화.

물론 다소 부족하거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제 갓 첫발을 내딛은 신인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이 정도라면 웬만한 단점들은 너그러이 감싸주고, 그저 아낌없이 격려를 보내주고 싶을 뿐이다..

아울러, 기나긴 무명 시절을 거쳐오면서 단 몇 분밖에 안 나오는 조연을 맡아도 늘 혼신을 다한 연기를 보여주면서 묵묵히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김윤석이라는 배우가 드디어 이 영화를 통해 빛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뿌듯한 마음까지 드는 한편으로, 이런 '배우다운 배우'와 동시대를 살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 영화가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한국영화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S >> 혹시,, 설마,,   아님 말고~

 

이 영화의 모티브는 유영철이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저지른 21명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한다.

유영철이 서울에서 살인을 저지르던 시기는 2003년 9월~2004년 7월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의 서울시장님은 누구셨더라?

카메라 앞에 나서기를 유독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가오"를 세우는데만 가장 많은 신경을 쓰셨던 그 분과 영화 속 서울시장의 이미지가 겹치는 건 과연 우연일까?

거기다 역사가 심판할 거라고 분개해 하면서 '서울시장님' 얼굴에 과감하게 분뇨를 투척한 이유가 다름 아닌 '상수도'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은 단순히 우연으로 넘기기엔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쌩뚱맞게도 나는 이 순간, 몇 년 뒤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를 "대운하의 재앙"을 떠올려보고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다지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하필 범인의 은신처가 "교회 장로님"의 집인 건 또 뭐니...)

어찌 되었든 개인적인 정치적 취향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에서 묘한 대리만족의 쾌감까지 덤으로 느끼고 말았다.

 

'높은 분'께 자신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무언가'를 던지는 일이야 가끔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냥 유력정치인이나 당대표, 혹은 장관이나, 아님 무난하게 국회의원쯤으로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릴수도 있었을텐데, 굳이 분뇨투척대상이 "서울시장"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이었어야 했던 것에 뭔가 감독의 장난어린 꿍꿍이가 있었다면, 이건 센스가 봉준호 감독 못지 않은 듯 싶다.

뭐 꿈보다 해몽이라고, 감독이 이 부분의 설정에 대해 별다른 의도없이 각본을 썼던 것일 수도 있으니...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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