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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 갚아야 할 은혜 (518광주폭동의 진실)

최성구 |2008.08.09 22:47
조회 1,123 |추천 15

광주시의 5일 천하

광주시는 5월21일부터 5.26까지 폭도들의 점령 하에 있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광주의 시위사태가 폭동화하여 계엄군의 사상자가 속출하고, 무기고에서 무기가 피탈되고, 3공수여단이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는 등 광주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자 5월 21일 새벽 4시 40분경에 황영시 참모차장, 김재명 작전교육참모부장, 나동원 계엄사 참모장, 계엄사 치안처장, 보도처장, 계엄처장이 참석하는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하였다.

광주시민과의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광주시에 출동 중인 전 계엄군을 광주시내로부터 철수시켜 광주시 외곽으로 전환 배치하고, 광주에 1개 연대 병력을 추가 출동시키며, 철수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은 광주시내의 상황을 고려하여 5월 23일 이후에 실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사령부 긴급대책회의에서 건의한 계엄군의 광주시 철수를 승인함에 따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21일 오후 4시30분경에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광주시내의 전 계엄군을 광주시 외각지대로 철수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진종채 2군사령관은 5월 21일 16시 50분경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시내의 전계엄군을 광주시 외각지대로 철수시킬 것을 명령하였으며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5월 21일 17시경 전계엄군을 광주시 외각 지역으로 철수할 것을 지시하였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의 철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11공수여단 61, 62, 63대대와 7공수여단 35대대 병력 1,212명은 21일 20시30분경 도청에서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하였다.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5월 22일 06시경에 조선대를 출발하여 조선대 뒷산 깃대봉을 돌아 지원동을 거쳐 5월 22일 08시경에 주답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광주에 출동하였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에,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은 주답 마을에 철수를 완료하였다. 계엄군이 광주시를 철수하자 전남도지사, 경찰국장과 경찰관들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앞 다투어 광주시를 빠져 나갔으며 무장시위대는 전남 도청, 광주 시청 등 주요 관공서를 점령하였고 광주시는 완전히 시위군중이 지배하는 치안부재의 도시로 전락했다.

이들 폭도들은 탈취한 무기로 원한관계에 있는 민가에 침입하여 일가족을 몰살하고 금품을 탈취하기도 했다.

5.25일에는 광주 지원동 일가족이 칼빈총에 피살되었고,

5.26일에는 학은동에서 3명 일가족이 살해됐고,

같은 날 학동에서도 3인 일가족이 살해됐고,

금은방, 병원 등에 난입하여 금품을 탈취하기도 했다.

바로 이때서야 광주시민들은 속았다는 의심을 갖게 되고, 시민들 자체로 수습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때에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전남대 학생회장인 김창길은 무기를 자진 반납하고 시위를 끝내자 했고, 김종배(국회의원)는 끝까지 싸우자며 맞섰다.

광주시에 있는 전남도청 지하실에는 화순광업소에서 탈취한 8t 트럭 1대 분량의 다이나마이트에 뇌관을 일일이 장착돼 있었다. 시위대는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해 오면 이 엄청난 다이나 마이트를 폭파시켜 광주시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다.

 

도청 지하실 8톤 차량 1대 분량의 TNT를 제거한 사람들

이 사실을 가장 우려한 사람들이 학생수습위원장인 전남대생 김창길 등이었다. 이 폭발물이 터지면 이리역 폭팔사고와 같은 규모의 비극을 초래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들은 전투교육사와 은밀히 접촉했고, 전교사는 폭팔물 전담 요원을 시민군으로 위장 투입하여 장장 4시간 동안 뇌관을 해체했다. 이로 인해 인구밀집지역에 있던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살아나게 되었다. 광주시민들은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이들 온건파들과 계엄군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광주시민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계엄군이 전라도 사람들을 싹쓸이 하러 왔다면 계엄군이 목숨을 걸고 시민군의 그 삼엄한 눈초리를 뚫고 시민군으로 위장해 들어가 그 엄청난 분량의 뇌관들을 하나 하나 분리하는 작업을 해 주었을까?

시민군은 TNT를 가지고 광주시민을 죽이겠다 했고, 계엄군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소굴로 들어가 수만 광주시민을 살려낸 것이 아닌가?

우리는 광주 시민들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며, 광주시민들은 이에 대해 반드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아래는 광주일보 특별취재팀이 1996년1월10일, <<5.18 광주항쟁사>> 도청 폭탄뇌관제거라는 제하에 냈던 기사다.

<광주일보 1996/10/10>

중무장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시민군들이 광주인근 지역을 돌며 무기확보에 나선 결과, 상당수의 무기와 폭약을 확보하게 된다. 당시 도청 시민군의 화력은 기관총.카빈소총.M1소총등 총기류 2천5백 여정, 수만발의 실탄,다이너마이트등 폭약류. 이중 가장 강력한 무 기는 다이너마이트. 특히 대한석탄공사의 화순광업소 광부들이 8t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도촉선(콤포지션)을 싣고 光州에 와 전남도청 안에 다이너마이트 를 설치한 것은 계엄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기에 충분했다. 광주와 인근지역에서 구한 모든 총기와 탄약류은 일단 도청 2층 식당 에 모아졌고 그중 폭약류는 다시 지하실로 옮겨졌다.

이를 관리했던 팀은 폭약류 관리반. 폭약반으로 활약했던 梁홍범씨(당시 20세)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 황을 재현해보자. 당초 폭약반은 9명으로 시작됐다. 23일 梁씨를 포함한 9명이 처음으 로 회의를 열고 위험한 물건이니만큼 철저히 지켜야 하니 원치 않는 사람은 폭약반에서 나가라고 하자 2명이 나가고 7명이 남았다.

이후에도 2명이 줄어 항쟁 마지막까지 폭약반에 남은 사람은 모두 5명. 文영동. 金영복.梁홍범.朴선재.姜남열씨였고 이중 文영동과 金영복씨가 주도적 인 역할을 했다. 당시 폭약류량은 약 리어카 2-3대 분량. 폭약반은 도청내의 사람들에 게도 접근이 쉽지 않았다. 자그마한 실수로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 가 터지면 도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근 지역이 폐허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폭약반은 폭약반출을 철저히 금지했다. 어쩔 수 없이 폭약을 주어야 할 경우에라도 폭약을 박스에 반 정도만 채워주었고 그럴 때마다 책임자 들을 불러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막무가내로 폭약을 가져가려는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서 소위 '계엄군과의 내통'으로 알려진 뇌관제거 사건이 벌어졌다.

25일 오전 10시께. 폭약관리반 文영동.金영복씨등 3명이 지프를 타고 상무대로 들어갔다.
文씨 등은 당시 전교사에서 金基錫 부사령관을 만나 "우리는 도청에 서 폭약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 이라고 신분을 밝힌 뒤 "폭약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뇌관을 분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이들은 그 증표로 다이너마이트 뇌관 6백-7백개를 가져갔다.

文씨 등은 이날 오후 2시께 도청으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이같은 사실 을 알리고 전교사에서 문관이 파견될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문관파견을 요청한 文씨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기도 했으나 폭발위험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뇌관제거를 해야한다는데 폭약 반 모두가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충돌은 없었다.

이날 밤 9시께 폭약 제거를 위해 문관 1명이 들어왔다. 문관은 사복 을 입었었고 몽키스패너 2-3개와 작업도구를 가져왔다. 그 문관은 촛불을 켜고 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신형 수류탄과 이미 조립해 놓았던 다이너마이트의 뇌관 분리작업을 했다. 새벽1시까지 일을 했으나 폭약이 워낙 많아 그날 밤 일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일을 끝내지 못한 문관은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金영복씨의 안내로 도청을 빠져나갔다. 문관은 다음날인 26일 오전 다시 도청에 들어와 폭약반들과 함께 뇌 관분리작업을 완전히 끝내고 오후1시께 상무대로 복귀했다.

지하실 폭탄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이 도청 내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 은 "폭약관리반이 계엄군과 내통했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나 폭약 관리반원들은 이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들은 지하실에 있던 폭약류가 너무나 위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 의 안전을 위해 선의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이들이 폭약류를 사용가능하게 보관했더라면 계엄군 진입 당시 시민군이 이를 사용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럴 경우 光州는 쑥대밭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뇌관을 제거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 했던 이들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 보다는 시민을 위한 충정 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梁씨는 "뇌관을 제거해 안전하게 보관한 자신들이 역사의 죄인이라고 는 생각지 않는다"며 "지금도 폭약반이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 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사실 도청 지하실의 폭발물 뇌관 제거는 전교사 金基錫 부사령관과 도청 항쟁지도부와의 교감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金基錫 전교사 부사령관은 96년 7월 15일 5.18 22차 공판에 나와 "전 교사 부사령관으로서 광주시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판단아래 25일 항쟁지도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폭약반을 소개받았고 이날 오후 폭 약반 대표 文영동씨등 3명을 만난 뒤 뇌관제거를 위해 특수요원 파견 에 합의했다"고 증언했다.

또 지난 85년 6월7일 尹誠敏 국방장관이 국회 국방위에 출석, 발표 한 '光州사태 보고'라는 문건에도 "도청지하실에 모아둔 폭발물의 폭발 방지를 위해 폭약반의 양해아래 특수요원을 투입, 폭발물의 뇌관과 신관을 분리하는데 성공, 광주시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했다"고 밝힘 으로써 신군부와 항쟁지도부와의 사전교감설을 확인해주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취해졌던 뇌관제거. 결국은 계엄군에게 가장 위 협적인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계엄군이 재진입하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겠다며 버텨왔던 시민군. 마지막 보루였던 폭약류의 뇌관이 제거되자 도청은 이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제 신군부는 그들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폭약류 뇌관이 제거되자 상무충정작전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특별취재반>

<증언록>

1980.8.6자 피의자 심문조서에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장 김창길은 이렇게 진술했다.

문: 5. 26.오후 도청 내에서 시민대표들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무기 반납 여부에 대하여 논의한 일이 있나요

답: 5. 26. 18:30경부터 도청 2층 부지사실에서 이종기, 장세균, 오병문, 조철현, 조아라, 이애신, 정상용, 김종배, 황금선, 구성주, 노수남, 김준봉 등이 모여 황금선의 사회로 무기반납에 관한 회의를 개최했는데 대체로 무기반납을 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김종배, 정상용이 대회 진행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회의장 밖으로 나갔고 뒤이어 조아라, 이애신, 오병문, 조철현 등이 나갔는데 약 5분 후에 상황실장 박남선이 권총을 빼들고 회의장으로 들어와 노리쇠를 후퇴 장전시키면서 “왜 우리들을 계엄군에 팔아넘기려고 하느냐”면서 앞에 있던 노수남의 등을 한 대 쳤습니다.

곧이어 김영철, 윤개원, 허구정 등이 회의장 내로 들어와 “왜 무기를 버리려고 하느냐”면서 협박을 했습니다. 박남선의 지시로 타격대장 윤석루가 타격대원7-8명을 이끌고 와서 부지사실 밖으로 아무도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상태에서 윤개원이 일어나 “지금 7함대가 제주도 부근에 주둔하고 있어 전두환 세력을 견제하고 있고 또한 광주사태 때 많은 인명피해가 있어 결코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입해 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회의는 무산되고 저희들은 도청 밖으로 빠져나오게 된 것입니다」


1980.8.14자 피의자 심문조서에서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렇게 진술했다.

문: 5. 26. 새벽에 도청 내에 비상이 걸린 일이 있나요

답: 5. 26. 07시경 광주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진입해 들어온다는 첩보가 들어와 도청 내에 비상을 걸어 경계를 강화하고 홍보부에서 주도하여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한다고 하면서 가두방송을 하러 다녔습니다.

문: 시민궐기대회는 곧바로 개최되었는가요

답: 동일 10시경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당시 계엄군은 진입해 들어 왔는가요

답: 그 후 사정을 알아보니 계엄군이 진입해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서울과 목포 간을 연결하는 도로를 뚫어 놓기 위해 약간 이동한 것으로 판명되어 계엄군은 절대 시내로 진입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원장이 된 이후에 한 일이 무엇인가요

답: 1980. 5. 26. 12시경 정상용과 함께 도지사실로 전남도지사 장경태를 만나 매스컴에서 광주시민들을 폭도라고 보도한 데 대하여 항의하던 중 동인에게 “광주시민이 폭도라는 누명만은 벗어야 되겠다, 대통령 담화문 내용을 믿을 수 없다, 대통령의 광주사태 담화문 발표 후 이어서 광주사태 일부 사설 쇼 방영은 우리들을 더욱 흥분시켰다”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

동일 14시경 도청 내무국장실에서 광주시 장인구용상 및 도청 각국장들에게 “1일 쌀 1가마 반을 제공해 달라,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해 달라, 관40개를 제공해 달라, 시내버스를 제공해 달라, 상가를 개점토록 해 달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여 대부분 승낙을 받고 유류 제공에 대해서는 보류된 바가 있습니다.

문: 기동타격대는 언제 편성되었는가요

답: 25일 10시경부터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시에 의하여 윤석우와 이재호가 기동타격대를 편성했습니다.

문: 피의자가 기동타격대에 관여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5. 26. 14시 30분경 도청 2층 기획관리실에서 기동타격대원 30여명이 집합되어 있는 가운데 “지금 우리가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광주시내가 무질서하게 되면 우리들의 이미지가 나빠진다. 따라서 여러분들에게 시내 치안질서 유지와 순찰의 임무를 부여하고 여러분들만이 총을 들고 시내 순찰을 하며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줄 테니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달라”는 내용의 격려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시민대표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이 있나요

답: 동일 15시경 도청 내 부지사실에서 김신근 목사와 성명불상자 3-4명으로부터 모금 목표 1,000만원 중 일부인 100만원을 현금으로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문: 전 위원이었던 김창길이 무기반납을 제의한 일이 있었나요

답: 동일 15시경 도청 내 부지사실에서 시민대표 및 학생대표들인 이종기, 김재임, 장세균, 조비오, 조아라, 김화성, 정상용, 황금선, 구성주, 노수남 등이 모여 있는 가운데 김창길이 “오늘 낮에 계엄분소에 다녀왔는데 계엄당국에서 금일 24시가 무기반납 시한이라고 하더라 빨리 무기를 반납하자”라고 제의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답: 김창길이 위와 같이 무기 반납을 제의한 데 대하여 본인은 “지금 무기를 반납하면 전부 죽으란 말이냐, 나는 여태까지 시민의 의사에 따라 행동해 온 것이다”라고 무기반납에 심한 반대의사 표시를 한 후 밖으로 나와 2층 복도에서 상황실장 박남선을 만나 동인에게 “지금 김창길이 우리들을 계엄군에게 넘기려고 한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위 위원회의 결론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답: 저는 회의 도중 나와 버렸고 박남신이 저의 말을 듣고 회의장에 들어가 무기반납 제안을 묵살시켜 위 회의가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그 후 피의자가 한 일은 무엇인가요

답: 19시경 도청 2층 기자실에서 “보도”라는 완장을 차고 있는 30대 가량의 성명불상자로부터 국내외의 여론이 광주사태에 집중되어 있으니 5일만 더 버티면 문제해결이 될 것이다라는 격려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문: YWCA에서 도청 내에 들어 온 예비군은 어떤 경위를 거친 건가요

답: 5. 26. 23시경 YWCA에서 성명불상자로부터 “YWCA에 예비군 등이 대기 중인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라는 쪽지를 건네받고 저는 “지금 도청 내에는 수용능력이 부족하니 우선 YWCA에 대기하도록 해달라”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 후 5.27.03시경 도청 내에 비상이 걸렸을 당시 상황실장 박남선이 본인에게 “YWCA에 가서 49명을 인솔해 가지고 무장시켜 5개조로 편성한 후 도청 밖 외곽지에 배치했다”라고 보고를 들은바 있습니다.

문: 피의자는 정부종합청사 상황실에 계엄군의 진입 여부 확인 전화를 건 사실이 있는가요

답: 26일 23시30분경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해 들어온다는 첩보를 받고 정부종합청사 상황실로 전화를 해서 계엄군의 진입 여부를 확인해 본 결과 성명불상자로부터 계엄군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라는 맡을 듣고 제가 계엄군이 선제공격해 오면 우리도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한 사실이 있습니다.

 

 

결론: 소수의 불순세력과 남파간첩들의 유언비어 배포와 선동으로 시작된 광주사태는 말기에 가서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누어졌다.

 

또한 초기 시위에 참여하였던 대다수의 순수한 광주시민들은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질되자 더 이상 시위에 합류하지

 

않았으며, 선동세력들은 차량에 마이크를 달고 계속해서 선동방송을 하며 광주시내를 돌아다녔다.

 

후에 온건파는 '무기를 반납하자' 고 주장했으나 강경파(불순세력)는 이를 무시하였다.

 

전남도청에 설치된 TNT 폭파물을 이를 지키고 있던 시민군(온건파)과 계엄군이 긴밀히 내통하여 해체하는 데에

 

성공했고 이것이 만일 해체되지 않았다면 광주는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추천수15
반대수0
베플박명희|2008.08.09 22:55
거짓된 글. 거짓정보를 흘리는군요.
베플김영우|2008.08.10 00:06
...나 참 전사모사람이네... 님들아 이분 전사모임
베플손지호|2008.08.10 01:40
아무리 무지하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이런글을.... 그리고 이런 리플들을 달수있는 사람이 있다는게 놀랍기만하네요, 역사에 이미 재평가 되어진 일. 좌파, 우파 한번도 생각해 본적 없는 일이지만, 극우파 정말 무섭네요. 사람의 생각이라는게 어떻게 저렇게 극단적이게 변해 질수도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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