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연다. 현관에 조그만 검정 구두. 내 구두가 아니다.
"기가 막혀."
나는 중얼거렸다. 그런 한편, 어이없게도 안심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하나코가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하얀 액체가 남아 있는 컵. 창문이 열려 있어 저녁 바람에 커튼이 흔들린다. 낮이 참 많이 길어졌다.
"감기 걸리겠네."
불을 켜고 말하자, 하나코는 일어나 나른한 목소리로, 어서 와, 라고 말했다. 어서 와. 어린애 같은 말투.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1밀리그램의 오차도 없이, 언어가 정확한 중량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정확한 무게의 '어서 와' 를 오랜만에 들어본다.
하나코는 같이 생활하는 사람치고 뜻밖일 정도로 우수했다. 하나코는 타인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방약무인이다. 그리고 타인이 신경쓰도록 하지도 않는다. 당연한 일이듯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다.
하나코는 동물 같지도 식물 같지도 않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음의 거추장스러움이 없는 사람, 생기가 없다는 뜻에 아주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침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건조하고 밝다.
예를 들어, 같이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난 곁에 하나코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옆에 새 구두가 한 켤레 놓여 있는, 그런 느낌.
하나코의 일상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였다.
하나코는 일하지 않았다. 외출도 하지 않았다. 짐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겉옷 몇 벌과 속옷, 신발 두 켤레, 칫솔, 치약, 껌, 라디오, 책 한 권, 담요 한 장, 로션 한 병, 립스틱 한 개, 그게 전부였다. 따라서 집안 풍경은 하나코가 출현하기 전과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하나코는 고립돼 있었지만, 관대했다. 목욕탕에서 이따금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저녁밥을 같이 먹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하나코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이든 똑같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함께 사는 사람이 다케오든 하나코든,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는 듯했다.
하나코는 그 얇은 입술 양끝을 치켜올리고, 후후후, 하고 조그맣게 소리내면서 웃는다.
'우후후' 도 아니고, '쿠쿠쿠' 도 아니고, 반드시 '후후후' 하고 웃는다. 상냥한 눈빛에 하나코의 웃음은 늘 똑같다. 소리의 크기도 분위기도, 고개를 약간 갸웃한 그 각도까지.
"전혀 기분이 흐트러지지 않나 봐."
"기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하나코는 되물었다. 발톱에 칠한 분홍색 매니큐어를 하얀 솜으로 박박 닦아내면서.
"웃을 때는 기쁘거나 재밌거나, 그래서 기분이 흐트러지잖아? 흔들린다고 해야 하나."
나 자신도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말한다. 웃을 때의 기분이 어떤지, 지금까지는 한 번도 분석해 본 일이 없는데.
"그런 일 없어."
딱 잘라 말하고, 하나코는 옆에 있는 캔맥주를 마셨다.
"웃을 때는 말이지, 기쁘거나 재미있어서, 그래서 웃고 싶으니까 웃는 거야."
멋없는 대답인데, 전혀 멋없지 않게 울렸다. 오히려 절실하게.
이런 일도 있었다.
하나코가 왠일로 신문을 펼쳐놓고-내가 관찰한 바, 하나코는 사회의 움직임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텔레비전 뉴스도 신문도,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 위에 누워, 이러고 있으니까 군고구마가 된 기분이다, 하고 말했다.
"리카는 아무렇지도 않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케오가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하고 하나코, 꽤 마음이 잘 맞아."
우리 테이블에 네 번째 침묵이 찾아왔다.
하나코는 말이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코가 없는 집안이 적막할 정도로 고요하다.
외로운 것은 아니다. 밤, 목욕을 하고 목욕 타월만 몸에 두른 채 냉장고에서 세븐업을 꺼내 그냥 서서 꿀꺽꿀꺽 마실 때, 하나코가 없어 오히려 자유로운 느낌이다. 다만 하나코가 없는 방은 모든 것이 무기물처럼 색이 바래 보인다. 따분할 정도로 조용하다. 하기야, 그런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보통 때도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하나코가 있으면, 모든 것이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고. 벽도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화분도, 모든 것이 유유하게 생기를 뿜어낸다. 그래서 방안이 정글처럼 미열을 띤다. 기묘한 일이었다. 하나코 자신은 늘 뒹굴뒹굴 잠만 자는데, 거의 생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잠이 많은가 봐. 하나코도 전화하면 늘 자다 받고."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말하는 다케오의 말투에서, 그가 하나코를 얼마나 좋아하고, 하나코가 없음을 얼마나 아쉬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도 수박 화분이 필요하다. 이 사람도 시간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하나코가 없는 시간을.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 우선 현관에 있는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슬리퍼식 화사한 벅스킨. 금색 장식이 달려 있다. 벗은 모양 그대로 놓여 있는 신발. 나는 그만 미소를 띠고 만다. 하나코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엎드려 한 팔을 바닥으로 축 늘어뜨리고. 조금은 탄 것 같다. 고전적인 면 원피스는 시원한 파란 꽃무늬, 드러난 어깨가 갈색이다. 발치에는 낯익은 보스턴백과 마시다 만 우유. 하나코는 늘 이렇다. 컵에 찰랑찰랑하게 마실 것을 따라서는 절반만 마시고 옆에다 아무렇게나 놓는다.
"아, 목마르다."
하나코는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내 컵 가득 따른다.
그런데 이렇게 아주 기운찬 때조차 하나코가 즐겁게 보이지 않으니 이상하다. 웃고 있어도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는 하나코다운 일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렸을 때, 뭐 되고 싶었는데?"
느닷없이 하나코가 물었다.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자, 하나코가 웃으면서,
"나는 사슴, 그것도 숫사슴이 되고 싶었어."
라고 말한다. 미소짓고 있는데 몹시 외로워하는 듯한 말투였다. 외롭고, 어딘가 모르게 야만적인.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다케오가 어떤 장소에 있는지. 하나코가 어떤 장소에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이 어떤 장소에 있는지.
"......왜, 화내는데."
몹시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다.
"한동안 집 비운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누구하고 있든 상관없는 일이고. 이번 달치 집세도 넣었고, 나쁜 짓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왜 화내는데."
이번에는 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그래도 그렇지, 하고 말을 꺼냈지만 그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 누가 화내는 거 굉장히 싫어해."
무척이나 상처입은 말투로 하나코는 말한다.
"화가 난 거 아니야."
할 수 없이 그렇게 말했다.
"화가 난 건 아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줬으면 좋겠어."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변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뭘?"
정말 툭 하고, 단순히 질문하는 목소리로 하나코가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입을 다문다. 답답한 침묵.
"......외로웠어?"
조심스럽게 하나코가 물었다. 나는 아마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 생각한다.
"여기 있는 데 이유 같은 거 없어. 그냥 즐기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
마음이 맞아요, 라고 나오코가 말했다. 나하고 하나코 누나는 아주 마음이 잘 맞아요.
진지한 말투였다.
"만나러 오면 되잖아."
그만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다음에 놀러와."
하나코와 마음이 잘 맞는다는 나오토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전에, 다케오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다. 나는 하나코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때였다. 마음이 맞아, 라고 다케오는 말했다. 봄이었고, 따뜻한 밤이었다. 그날 낮 둘이서 매화를 보러 갔다가, 나는 다케오에게 버림받았다.
청결한 고독
같이 자도 돼? 라고 하나코가 말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문이 빠끔 열리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만 흘러들었다.
"뭐?"
되묻자 문이 조금 더 열리고 베개를 껴안은 하나코가 들어온다.
"같이 자도 되지?"
아까보다 억지스럽게 말하는 하나코는 이렇게 어린애처럼 굴 때 조차 심각한 표정이다.
"하나코 누나 오면, 전할 말 있어요?"
나오토의 말투에 동정이 배어 있었다. 복잡한 관계, 다 알고 있다는 식의.
"아니, 괜찮아."
나는 나오토의 제안을 물리쳤다.
하나코에게 할 말은 없다. 늘 제멋대로인 하나코, 폐만 끼치는 하나코.
나는 하나코의 조그맣고 하얀 얼굴을 떠올린다. 나른하게 소파에 드러누워, 한쪽 팔을 바닥에 축 늘어뜨리고 있는 하나코. 하나코는 게으름뱅이다.
정말 태평이라니까, 라고 절대 억지스럽지 않게 다케오는 말한다.
"전혀 흐트러집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나는 단박에 질투한다. 그토록 다케오를 '흐트러지게' 하는 하나코에게, 그리고 순식간에 다케오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하나코의 부재에.
"그래서, 하나코 좋아보였어?"
료코는 단박에, 목소리에 힘을 주고 대답했다.
"아니, 전혀. 불행의 밑바닥에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어."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어느 틈엔가 아파트에 눌러 살고 있었다, 며 카츠야 씨는 웃는다.
"그렇게 산 지 한 반년쯤 지났을 땐가, 그때 돌아갈 장소가 없었다고 말하더군, 그 말이- 아니 뭐 별다른 느낌은 없었지만, 담담하게, 이제 다 지난 일이란 식으로 슬쩍 웃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 말이 너무 쓸쓸하게 들려서, 아아 그랬구나, 내 곁에 있고 싶었던 게 아니었구나, 하고 알았지."
돌아갈 장소가 없었어.
담담하게, 슬쩍 웃으면서 그렇게 얘기한 하나코의 말이 얼마나 쓸쓸하게 울렸을지, 나는 추운 밤 산사의 종소리만큼이나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어서 와' 만 해도 그렇게 청명하게 울린다. 하나코의 말에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하나코를 묶어둘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코에게는 도리라는 것이 없다.
하나코의 짐은 무엇 하나 늘지 않았다. 늘 보던 옷. 구두가 두 켤레. 칫솔, 치약, 담요 한 장, 책 한 권. 푸르스트다. 낡은 문고본인데, 나는 하나코가 그 책을 읽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수세미 코롱 한 병, 립스틱 한 개. 그것들은 다다미 방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해외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이 들고 왔을 법한 여행가방도 쇼핑백도, 료코가 말했던 번쩍이는 빨간 원피스도 보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나는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다케오를 이슬만큼도 떠올리지 않았다.
"라디오 되게 좋아하네."
내가 말하자 하나코는 담요를 둘둘 말고,
"한 프로그램 끝나면 허전해지니까, 그래서 좋아."
라고 잘 모를 소리를 한다. 잘 모르겠다고 말하자, 하나코는 소리없이 웃었다.
"리카는 라디오 별로 들은 적 없나 보네."
나는 하나코가 애용하는 라디오를 힐끗 쳐다보았다. 옆으로 긴 사각형, 잡아당기면 길어지는 은색 안테나.
"한 프로그램이 끝날 때면 친한 사람이 곁을 떠나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야. 그 느낌이 좋다는 거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들었거든, 아직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되면 역시 가버리잖아. 라디오는, 정확해."
나는 그래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을 닫고 커튼도 닫는다.
"다들 너를 만나고 싶어해. 왜 그럴까. 너는 다른 사람한테는 티끌만큼도 신경 안 쓰고, 아무 목적도 없이 홍콩 같은 데나 훌쩍 다녀오고 그러는데."
"......같은 데?"
하나코는 우습다는 듯이 내 말을 되풀이했다.
"리카 너는?"
미소는 띠고 있지만 진지한 표정이다.
"뭐?"
"다들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면서?"
하나코는 고개 숙이고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리카, 너도 내가 보고 싶었냐구?"
"......."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나코에게 회유당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보고 싶었는데."
내 얼굴을 보지 않고 하나코가 말했다.
"그럼, 돌아오지 그랬어."
나도 하나코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하나코가 얼굴을 들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돌아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하나코는 맥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 번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거야."
너무도 꼿꼿하게 울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나코의 말은 언제나 아슬아슬하다.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런 거야."
강경한 말투였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일어나 설거지를 시작했다.
"내 동생."
하나코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난감한 표정이 어려 있다.
"동생?"
도깨비니 무민 트롤이니 하는 가공의 생물 이름처럼 들렸다. 하나코의 동생.
"소이치는 나를 사랑하고 있어."
하나코가 말했다. 사진 학교에 다녀, 와 똑같은 말투로.
"나도 사랑하는데, 우리는 한 피를 이어받은 진짜 남매라서."
소이치, 란 동생은 슈크림을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너한테 우리 소이치 소개하고 싶었어. 굉장히."
하나코가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왜?"
큼지막하고 신선한 다코야키를 한입 삼키고 나는 물었다. 하나코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하려던 말과 함께 맥주를 삼켰다. 검정 터틀 넥 스웨터에 여기저기 닳아빠진 청바지를 입고 있다.
"나도 믿는 게 있어."
카운터 너머에 붙어 있는 메뉴를 쳐다보면서 하나코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아. 언제였던가 절망적인 진실을 얘기했던 하나코가 떠올랐다.
요리라도 할 거야? 하고 난 파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딸기와 포테이토 칩은 몰라도 하나코가 채소를 사온 적은 없었다.
"아니, 하얗고 이뻐서 그냥 샀어."
우리는 잠시 침묵한 채 서 있었다.
텅빈 방으로 돌아오자, 다다미 방 구석에 절반으로 자른 파가 컵에 꽂혀 있었다. 하나코가 꽂은 것이리라. 서글픈 아름다움이었다.
콧노래는 참 이상하다. 왠지 쓸쓸하다 싶을 때 부르면 정말 쓸쓸하게 울린다.
다케오는 뭘 하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확신한다. 다케오도 쓸쓸하다고. 어린애 같은 고독.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다케오는 그래서 이 집을 나간 것이다.
"나, 다케오하고 두 번 다시 안 만날 수도 있고, 다케오하고 새롭게 연애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 다케오하고 같이 잘 수도 있어."
그거면 됐어, 란 표시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젓고는 시선을 푸른 하늘로 돌린다. 아주 자연스럽고, 그러면서도 어린애 같은 몸짓이었다. 어린 시절, 어쩌면 하나코는 친구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하나코의 옷에는 전혀 일관성이 없다. 하나코는 과연 어떤 취향인지 1년-도중에 공백은 있었지만-이나 같이 살면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이 찾아올 줄 알면서도 도망치다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창문을 잠그고 커튼을 닫으면서, 찜찜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지만 정말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동요했다. 다케오에게서 도망치려 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놀랄 일이었다.
하나코는 현관으로 돌아온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나는 구두를 신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한가롭고 기분좋은 봄의 공기다.
"아아. 좋다."
바로 옆에서 하나코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뭐 할 거야?"
가게 안에는 우아한 실내악이 흐르고 있다.
"어디로 도망칠 생각이었는데?"
질문이 겹쳤다. 하나코는 여전히 창밖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어, 라고 말했다.
"밤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고, 다른 찻집에 가도 좋고, 어디든 상관없어."
"......."
하나코는 느긋하다.
"도망친다는 거, 굉장한 고통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나는 몹시 소심한 사람인가 보다. 마음이 켕겨서 안절부절못한다. 어서 빨리 이 하루가 끝나고 새로운 날이 시작됐으면 좋겠다고, 아까부터 그런 생각만 하고 있다.
하나코가 내 얼굴을 본다.
"몰랐어?"
조그맣고 하얀, 단정한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진다.
"몰랐나 보구나."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코는 만족스럽게 말하고 다 식은 키페오레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며서, 막, 이라고 말한다.
"막?"
"응, 우유의 막. 입에 닿으면 미끄덩거려서 싫어."
하나코가 피식 웃는다.
"숟가락으로 건져내면 혼났어. 어렸을 때, 엄마한테. 이 막에 영양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느냐고."
뜻밖이었다. 남의 말 따위 전혀 듣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잔을 쥔 하나코의 손가락이 가냘프고 창백해서, 지나치게 정교한 장난감처럼 어딘가 모르게 서글펐다.
"난 늘 도망만 치는 것 같아."
오히려 신이 난다는 듯, 노래하듯 하나코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인생이야, 도망만 다니는, 하지만 절대, 절대 도망칠 수 없는."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정말 싫다."
구두를 벗고 스타킹만 신은 채로 모래 위를 어슬렁거리면서 하나코가 말했다.
"바다는 하나도 좋은 거 없는데, 왜 다들 바다 바다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마음으로는 동의하면서도,
"하지만, 우리도 왔잖아."
라고 말했다. 하나코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린 도망친 거잖아. 도망자는 예외야. 도망자는 장소를 선택할 여유가 없잖아."
웃어도 좋은 건지 어쩐지, 판단할 수 없었다.
"계속 도망치고 있다고 했지, 무엇에서 도망치는 건데?"
묻고서 바로 후회했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다.
"그냥 도망치는 거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하나코는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서, 그냥 도망치는 거야. 이 게임이 빨리 안 끝나나, 늘 그런 생각하면서 말이야."
게임 오버.
"난 말이지, 하늘을 좋아해. 바다보다 훨씬."
하나코는 말하고 얼굴을 위로 들었다.
동생 얘기만 나오면 하나코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진다.
"사랑하는구나."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래. 아주 많이."
가냘픈 몸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감정을 담아 하나코는 말했다.
남의 집에서 잘 때의 왠지 안절부절못하고 허전한 느낌은 서른한 살인 지금이나 어린 시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자 우습기도 했지만, 허전함의 밑바닥에 다른 것이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케오에게서, 이렇게 멀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조용한 마음으로 혼자가 되고 말았다. 한시도 떨어져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지만, 나는 다케오에게 몹쓸 짓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다는 것을 다케오가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옆에서 하나코는 목까지 이불을 덮고 얌전하게 누워 아까부터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왠지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옆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었다.
모두들 하나코에게 볼일이 있다. 가엾은 하나코.
포트와 잔을 씻으면서 나는 하나코와 다케오를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코와 카츠야 씨, 하나코와 나카지마 씨, 하나코와 하나코의 동생도.
아까 버스 정거장에서 다케오를 배웅했다. 오랜만에 다케오와 함께 비 속을 걸었다.
"연애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보슬보슬 부슬부슬. 비가 한없이 단조롭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내렸다.
"연애가 아니면 뭔데?"
비에 젖어 촉촉한 아스팔트 길이 가로등 빛에 거뭇거뭇 빛나고 있었다.
"집착."
다케오는 마른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나는 말없이 그냥 걸었다. 끝없이 내리는 비가 나와 다케오를 우산째 대지에 가둬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설거지를 다하고 하는 김에 빨래도 했다. 돌아가는 세탁기 속을 쳐다보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여우 사냐-앙을 가려거든
라라 조심해서 다녀와요
여우 사냐-앙은 신나죠
살아 도-올아올 수만 있다면
세제가 만들어내는 거품과 세탁기가 윙윙 돌아가는 소리, 좁은 목욕탕을 비추는 하얗고 선명한 형광등 빛.
그리고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다케오에게 주지 않은 세븐업 캔을 따서 마시면서 비를 바라보았다.
집착.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케오를 잃을 수 없는 것도. 싸하게 코를 자극하는 세븐업은 시원하고 신선하고, 그리고 무척 슬펐다.
그날, 하나코는 이미 보잘것없는 소녀였다. 관에 누워, 파르스름하게 부은 얼굴, 본 적 없는 낯선 소녀 같았다. 나는 울지 않았고, 동요하지도 않았다. 어서 집에 돌아가 하나코와 이 일을 얘기하고 싶다.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가 본 것을 얘기하면 하나코는 뭐라고 말할까.
"싫다."
아마도 그렇게 말하고, 콧잔등을 찌푸리리라. 사뭇 불길하다는 듯이. 그리고 무릎 위에 놓인 잡지로 눈길을 돌리고, 가늘고 예쁜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냥 놔둬."
라고 말하리라.
"죽고 싶은 사람은 그냥 죽게."
하지만 그 말은 매몰차게 울리지 않는다.
"그보다, 목마른데. 나, 아이스 티 마시고 싶어."
짧은 바지 밖으로 곧게 뻗은 다리. 엷은 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내가 아는 하나코라면.
"하나코 씨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리고 동요했어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카츠야 씨는."
전부인은 일단 말을 끊고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찾는다.
"충격은 받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짐을 덜은 것처럼, 편안하게 보였어요."
"그럼, 안 되나요?"
나는 물었다. 나 역시, 하나코가 죽어 편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코의 죽음으로 다케오가 편해졌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다케오를 위해서, 진심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몹시 가혹한 일이지만.
언젠가, 가령 언젠가 다케오가 현실 속의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해도, 나는 그때, 다케오를 도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다케오 역시 두 번 다시 나의 혼이 깃들 곳일 수 없다. 나는 지금은 그것을 알 수 있다.
물은 천천히 식어가고, 하나코의 몸은 퉁퉁 부어 흉물스런 윤곽을 무너뜨린다.
나는 욕조 안에서 흔들흔들 팔을 움직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알몸으로 죽은 하나코, 태아가 연상된다.
리카, 동물 길러본 적 있어?
언제였나, 하나코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여름이었다. 베란다에서 풋콩을 먹으면서, 맥주를 마시면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얘기했었다.
"있지. 개도 고양이도. 우리 고향집에는 지금도 개 길러."
그러니, 하고 말하고 무슨 생각에 빠진 듯 침묵한 하나코, 그러고는 부럽다는 듯이, 좋겠다, 하고 어린애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겠다.
너무도 어린애 같은 목소리에 나는 그만 키득키득 웃고 말았다.
"그럼 키우면 되잖아. 넌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키울 수 있잖아."
고개를 저으며 쓸쓸하게 웃었던 하나코의 모습이 기억난다.
"안 돼, 난 살아 있는 거 싫어."
모순이다. 하나코는 늘 모순에 차 있었다.
죽는데도 기운이 필요하다. 어떤 유의 기운이. 그러니까 하나코는 죽을 때, 그렇게 나쁜 상태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일상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니까.
나는 목욕을 하고 침실 창을 열고, 침대에 누워 하나코의 라디오를 듣는다. 라디오는 정말 아무 재미도 없다. 밤의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하나코가 좋아했던 아이돌 탤런트-반드시 여자다. 하나코는 여자의 목소리만 들었다-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특히 더 심했다. 일부러 방송 대본을 저질적으로 썼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청취자들이 보낸 엽서도 시시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코가 열심히 라디오를 들었던 심정을 요즘은 이해한다. 시시하지 않으면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이 끝나는 순간, 어이없을 정도의 그 허전함.
하나코의 부재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부재에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재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늘 하나코가 있었다. 착각이나 공상이 아니다. 하나코는 내가 숨쉬는 공기에 녹아 가득가득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 공기는 한천처럼 딱딱해서 창문을 열어도 바깥 공기의 침식을 받지 않는다. 하나코가 없어도 내가 느끼는 방의 온도와 습도는 늘 일정하다.
작가 후기
마음이란 참 이상한 것입니다. 자기 것인데도 정체를 알 수 없어 때로 두렵기만 합니다.
내 마음은 저녁 나절에 가장 맑고 냉철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저녁때 결정합니다.
나는 냉철함을 좋아합니다. 냉철하고 명석하고 차분하고 밝고, 그러면서도 절망하고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작품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이 소설은 스쳐 지나가는 혼의 이야기입니다. 혼이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의 이야기.
그리고 또 곱지 못한 마음의 이야기입니다. 곱지 못한 마음이란 미련과 집착과 타성, 그런 것들로 가득한 애정.
어렸을 적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순간, 그 몇 초 전부터 넘어지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지만 명료하게, 아아 곧 넘어지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러고는 넘어집니다. 저녁때는 그런 유의 투명한 냉철함에 젖습니다.
곱지 못한 마음의 하늘에, 조용한 저녁이 내리기를.
- 1996년 가을, 에쿠니 가오리
작품 해설 中
「낙하하는 저녁」은 시간의 소설이다. 한 여자가 천천히, 천천히 시간-무려 15개월-을 두고 실연하는 이야기다. 사랑의 상실과 고독과 죽음과 조용히 마주하고, 마침내 받아들이고, 극복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시간을 투명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다.
실연에 울고, 집착하고, 질투하고......곱지 못한 사랑의 흔적. 그 당시 중요했던 일들이 세월이 흐르고 나면 남의 일처럼 멀다. 그러나 곱지 못한 사랑의 흔적은 새로운 사랑의 전조이기도 하다.
리카가 '낙하하는 저녁' 너머로 본 것은 무엇일까.
제각각 마음의 그릇에서 떠서 맛을 보면 알리라. 리카의 이야기는 에쿠니 씨의 이야기이며, 나의 이야기이고, 그 책을 감상한 그대들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 1999년 5월, 영화감독 겸 프로듀서
아이즈 나오키
역자 후기 中
하나코의 등장은 다케오란 존재를 뿌리째 흔들어놓을 만큼 강렬합니다. 하지만 하나코는 전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떨어버린 연기 같은 존재입니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도, 스스로도 소유하지 않으며 베풀지도 않고, 또 베품을 갈구하지도 않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그녀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녀란 존재 자체가 안고 있는 운명적인 결함입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꽃 같은 존재, 그 존재는 다른 사랑을 파괴하면서까지 사랑을 이끄는 흡인력을 갖고 있는데, 그녀 자체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소망하지 않는다면,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존재는 비극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케오나 카츠야가 안고 있는 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 그 존재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아니 그 사랑의 존재마저 불확실하다는 것. 이것이 그들의 괴로움의 근원입니다. 사랑이란 같이 나누어야 빛이 나고, 서로를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안전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사랑을 얻을 수 없어 괴로운 마음들은 그 대상 자체의 소멸로 자기 구원이란 영원한 숙제로 남습니다. 하나코의 죽음이죠. 하나코는 자신의 생명에 대한 애착마저 끊어버림으로써 남은 사람들에게 집착의 끈을 끊어버리게 함과 동시에, 자기 마음은 스스로 구원하라는 마치 종교와도 같은 메시지를 남깁니다.
완전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았던 하나코의 사랑 이야기
- 2003년 9월, 김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