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혜 =☆=
도산 안창호 선생이 배재학당에 입학할 때
미국인 선교사 앞에서 구술시험을 치렀다.
"어디에서 왔는가?"
"평양에서 왔습니다."
"평양이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
"8백리쯤 됩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공부하지 않고 왜 먼 서울까지 왔는가?""
그러자 도산이 선교사의 눈을 응시하며 반문했다.
"미국은 서울에서 몇리입니까?"
"8만리쯤 되지."
"8만리 밖에서도 가르쳐주러 오셨는데,
겨우 8백리를 찾아오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술시험은 끝났고
도산은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41세 임시정부 내무총장시절의 사진
도산 안창호 (1878~1938)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한국 근대 민족운동의 큰 지도자이며 또 뛰어난 민족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겨레가 일제의 침략과 지배아래 고통 받고 있을 때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고 또 독립을 되찾기 위한 구국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성에서 농부 안흥국(安興國)의 3남으로 태어나, 8살까지 집에서 글을 배웠고 집안일을 도우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어릴적 그는 그의 생애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사건을 겪게 되는데, 같은 서당에 다니던 필대은(畢大殷)이라는 몇 살 위의 동문선배로부터 당시에 새롭게 보급되기 시작하던 신학문에 접하게 된 것과 그가 16세 되던 1894년 평양에서 청일전쟁(淸日戰爭)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일본과 청나라가 마음대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싸우는 것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고 상경, 1896년 밀러학당(배제학당, 후에 구세학당으로 부름)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면서 서구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19세의 청년 도산은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독립협회 판서지부를 조직하였으며,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3년 간 각도를 순회하며 연설하였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도산은 1899년 고향으로 돌아와 22세에 강서군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황무지 개간사업을 추진하는 등 3년간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그는 더 큰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정하였다.
일본이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귀국하여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1907년(29세) 비밀결사조직인 를 결성하여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30세가 되던 1908년 평양에 대성 학교를 세우고 서울, 대구에도 태극서관을 세울 것을 계획하고 국민 문화향상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평양 마산동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산업을 일으키는 운동에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의거로 피체되어 취조를 받은 그는 무혐의로 풀려나오자 망명을 결심, 중국 청도(靑島)로 갔다. 여기에서 여러 독립지도자들과 청년학우회를 결성,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며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미국에 돌아간 그는 1910년 5월에 하와이 한인단체와 통합하여 조직된 를 확대 개편하여 를 발족시키고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간행하여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1913년 5월 13일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지들과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191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모습
미국에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그는 5월에 25일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서리가 되어《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고 1919년 9월 6일 통합헌법을 마련하여 통합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1923년에는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중국 남징에 독립운동 근거지로서 이상촌 건설을 시도하였다.
1928년에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였고《대한 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교육운동을 통해서만 자주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은 도산(島山)은「민족개조론」을 주창했다. 특히「무실역행(務實力行)」을 바탕으로 한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큰 영향 미치고 있다.
● 흥사단의 4대 정신
① 무실(務實: 참되자): 거짓을 버리고 참을 사랑하고 실질을 존중하는 정신(진리탐구, 속이지 않는 것.)
② 역행(力行: 일하자): 빈말보다 실천하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자신부터 먼저 실천)
③ 충의(忠義: 충성과 신의):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고(忠), 사람에게는 신의를 지키는 정신(義)(옳은 일이면 끝까지 성실, 신의)
④ 용감(勇敢: 날쌔자): 매사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진취적이며 능동적인 태도를 발휘하는 정신 (참과 진실의 편에 서자.)
도산은 흥사단 운동을 벌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힘이 없어서 나라가 망했으니 흉하게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 힘이란 무엇인가. 나라의 힘이란 부력과 병력이다. 그러나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이는 부력도 국력도 생길 수 없다. 국민의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이 없이는 농업이나 공업도 발전할 수 없고 또 대포와 군함이 있어도 그것을 쓸 사람이 없는 것이다." 도산은 민족운동, 독립운동을 정치문제로 보지 않았고 독립을 위한 도덕적 실력양성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의 독립운동은 준비주의, 실력양성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던 날 일제에 피체되고 그해 6월 7일 인천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하였다. 도산은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일경의 감시와 방해를 무릅쓴 채 전국을 순회하면서 강연을 한 후 평남 강서군 대보산에 은거하면서도 국내 흥사단 조직인 의 민족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 회원들에 대한 일제의 검거에 그도 많은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4년 반에 걸친 두 차례의 감옥생활 끝에 얻은 숙환인 위장병과 폐결핵 증세로 위급한 상태에 빠지자 경성대학(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했으나 1938년 3월 10일 0시 5분에 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만 59년 4개월을 일기로 서거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에 추서되었다.